문화

´의형제´와 ´추노´, 다르고도 같은 쫓음과 쫓김의 화두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0. 2. 11. 18:52

´의형제´와 ´추노´, 쫓음과 쫓김의 화두

   By 김헌식

-디아스포라의 사회와 분단

 

보통 드라마와 영화에서 추격의 대상은 누명이건 진범이건 범죄자였다. 하지만 최근의 상황은 훨씬 다채로워 지고 있다. 쫓는 자가 반드시 형사나 요원일 필요도 없고, 추격의 목적이 공공의 명분도 아니다. 영화 <추격자>에서 보도방 운영주인 조필성(김윤석)은 처음에는 자신이 데리고 있던 아가씨들을 쫓는다. 도망간 성노예(?)를 쫓는 셈이다.

 

하지만 정작 여성들을 채 간 이는 변태적 고객이었다. 조필성은 심각한 문제적 인간인 지영민(하정우)를 잡으면 여성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필사적으로 그를 쫓는다. 추노의 해결 고리는 바로 지영민이 잡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영민을 잡았어도 비(婢)를 찾을 수는 없었다.

 

조필성이 결국 여성들을 찾으려 한 이유는 그녀들에게 미리 지급한 수천만원의 돈 때문이었다. 이러한 면에서 금전적인 이유로 노비 쫓는 일에 나서는 추노꾼과 비슷하다. 하지만 조필성은 드라마 <추노>의 이대길과 같이 의뢰를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산을 찾으려고 직접 나섰다.

 

흥행 영화 <의형제>에는 쫓고 쫓기는 구도 속에 베트남 여성을 쫓는 현대판 추노꾼(흥신소) 이야기도 나온다. 사람 찾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 일을 하는 이가 전직 국정원 핵심 요원이었다는 점이 분단 현실의 냉혹함을 상기시킨다. 분단 상황이 수많은 쫓는 자와 쫓기는 자를 양산하는 듯 보여진다.

 

어쨌든 영화 <의형제>를 통해 영화 <추격자>를 떠올릴 만하고, 또한 그 안에서 드라마 <추노>가 있다는 지적이 있을 수밖에 없겠다. 이런 면에서 쫓고 쫓김이라는 화두를 생각해볼만도 하다. 쫓고 쫓김이 주는 상대적 역학이 증가시키는 대중적 몰입도는 언제나 흥미롭다. 다만, 다루어지고 있는 그 쫓고 쫓김이 과연 본질적인지는 충분히 의문이 들 수 있겠다.

 

다만, 영화 <추격자>와 영화 <의형제>의 비교는 같은 영화 장르라는 점 외에는 매력이 없다. <추격자>보다는 <의형제>가 코믹스러우면서도 묵직하다. 영화 <의형제>는 가족애의 강조가 우선이지만 분단 코드가 융합되어 있다. 송지원은 가족을 지키지 않기 위해서는 배신자라는 낙인에서 벗어나야 했다. 의형제라는 단어가 주는 것도 역시 가족주의다.

 

하지만 민족주의는 다시금 생래적인 혈연적 형제가 아니라 분단 구조 속에서 의형제로 다시금 자리매김한다. 사회적 메시지도 담겨 있다. 여기에서 사회적 메시지는 단순히 분단 상황이 주는 비극적 갈등과 화해가 아니다. 남북은 서로의 생존을 위해 상대를 잡아야 하는 극단적인 상황을 가늠하게 한다. 서로의 존재기반을 통해서 생존을 모색할 수밖에 없는 존재적 화두를 전해주고 있다. 물론 해결책은 서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상생을 모색하는 것이다.

 

영화 <의형제>에서 남파 킬러 송지원(강동원)과 그림자(전국환)는 월남한 북한 인사들을 집중적으로 쫓아다닌다. 국정원 요원 이한규(송강호)는 팀원들과 이들을 쫓는다. 하지만 그는 쫓는 과정에서 일어난 총격전으로 국정원에서 쫓겨난다. 생계를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은 도망간(?) 베트남 여성들을 쫓는 일이다.

 

한편 동료의 배신으로 북한의 지원에서 배제된 송지원은 공사장 일용직을 전전한다. 하지만 우연히 이한규를 접하고 그를 쫓아서 북한의 지원을 다시 받아내려 한다. 송지원은 이한규와 같이 베트남 여성을 쫓는 일을 하며 북한에 있는 가족을 데려오기 위한 자금도 마련하면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쫓는다. 베트남 여성들을 쫓는 일은 그 둘 사이의 긴장감 어린 쫓고 쫓김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이한규도 송지원을 감시하며 북한과 접촉하기를 기다린다. 물론 둘은 서로 각자의 조직에서 버림을 받은 사실을 모르고 있다. 결국 두 사람은 각자 쫓고 쫓기는 역할을 하며 자신의 존재의 의유와 삶의 회복을 기대한다. 송지원과 이한규는 서로를 통해 자신의 더 나은 삶을 얻으려 한다. 송지원은 이한규를 통해 북에 있는 가족을 살리려 하고, 이한규는 송지원을 통해 금전적 이익은 물론 명예회복을 노린다.

 

물론 그들이 사는 것은 협력이었다. 또한 인간적 배려였다. 하지만 인간적인 배려만으로는 해결될수 없는 제도적 모순은 도망다니는 베트남 여성에게서 발견할 수 있었다. 쫓김의 대상이 되는 베트남 여성이나 쫓김의 대상이 되는 월남인사들에게 대한 근본적인 대안은 없었다.

 

드라마 <추노>에서 이대길(장혁)은 큰놈이를 쫓고, 큰놈이는 이대길을 쫓았다. 이대길은 송태하(오지호)를 쫓아 큰 몫을 챙기려 하지만, 송태하는 자신이 10년간 찾아 헤매는 언년이(이다해)의 새로운 연인이다. 송태하를 쫓을수록 딜레마에 빠진다. 한편, 황철웅(이종혁)은 좌의정 이경식(김응수)의 제안을 받아들여 원손 추종 세력을 쫓아 암살에 나선다. 암살 대상에는 자신의 동지는 물론 상관, 그리고 스승도 포함되어 있었다.

 

천지호(성동일)와 그 일파는 황철웅을 도와 추격에 나서지만, 결국 천지호 자신도 수하를 다 잃고 자신도 위험에 빠진다. 이대길과 황철웅, 천지호는 결국 쫓을수록 위험 속으로 쫓겨 들어간다. 송태하는 세상을 바꾸겠다며, 언년이의 마음을 얻기도 하지만, 결국 그것은 제도와 체제의 근본 변화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러한 낭만적 관념적 개혁 의지는 노비로 전락하고 비인권적인 상황에 처하는 구조는 그대로 온존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각자의 욕망이 추격의 동인이다. 하지만 그 추격은 그것을 양산하는 제도적 모순과 그것을 활용하는 권력자들 때문에 증폭된다. 무엇보다 추격자는 추격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추격하는 사람의 관점이 중심이다. 추노(推奴)는 노비를 쫓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결국 노비가 주인공은 아니다. 노비를 쫓는 행위가 중심이기 때문이다. 추격을 하는 사람은 추격하는 이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추격을 할수록, 쫓을수록 쫓기는 사람이 된다. 그렇다면 쫓는 자의 자기 모순도 부각 되어야 한다.

 

드라마 <추노>에서 당시 대다수의 인구를 자치하고 있던 노비들이 진정한 주인공들은 아니다. 단순히 양반을 테러하는 노비 모임이 있을 뿐이며 주인공 이대길은 양반의 후손이다. 도망자 송태하는 자신이 노비가 아니라 무관이었음을 강조하며, 혁명을 열어갈 원손의 원종수호자로 나선다. 결국 이다해도 자신이 노비 출신이라는 점을 부정하는데 급급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할수록 위선과 거짓 그리고 기만이 판을 치고 쫓고 쫓기는 일은 더욱 강화 된다. 결국 그들의 혁명은 양반의 것이다.

 

영화 <의형제>에서 추격을 하는 사람의 관점이 담겨 있다. 결국은 추격하는 요원들의 이야기다. 예컨대, 북한 요원에게 추격을 당했던 월남한 인사들의 관점은 배제되었다. 어쩌면 노예와 같은 삶을 거부한 베트남 여성들은 동정과 연민을 불러일으키지만, 여전히 주변부화 되었다. 결국 송지원도 베트남 여성에 대한 인간적인 배려에만 머물고, 그들의 귀가 이후에 대해 고민할 여력은 없다. 현실은 여전히 냉혹하지만 영화는 그것을 회피했다.

 

세계적인 디아스포라보다는 남북 정서에 의존해 흥행을 크게 했다. 송지원과 이한규가 한국을 떠나 행복을 찾아 떠나지만 그들을 쫓아 다시 킬러가 나설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것은 분단 현실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그 현실을 외면한 쫓고 쫓김의 구도는 분단과 가족주의라는 신파적 감수성을 통해 흥행에서 성공해도 그래서 공허하다. 결국 보편성보다 특수성을 크게 고려했기 때문에 해외에서 설득력을 갖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김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