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논평

MBC·SBS 사극, 권위 지우고 인간을 비추다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1. 2. 13. 17:44

MBC·SBS 사극, 권위 지우고 인간을 비추다

MBC드라마 ‘이산’에서 정조역의 이서진.
MBC드라마 ‘이산’에서 정조역의 이서진.
“아바마마도 어마마마도 꼭 왕이 되라 하셨지만, 소자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궐이 무섭습니다. 오늘은 어찌하고 내일은 또 어찌해야 하는 겁니까. 소자,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는 겁니까.”

이산은 고뇌한다. ‘백성을 어떻게 다스릴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실존적 고민이다(MBC ‘이산’). 그간 역사 드라마 속의 왕은 ‘공적 존재’였다. 사극의 최대 화두는 정치성이었고, 왕의 고민은 주로 대의명분에 얽매였다. 왕 개인에 대한 묘사 역시 ‘그가 왕이 되기에 얼마나 충분한가’에 초점을 맞춰 왕의 명석함과 성군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훈련 과정을 그리는 데 주력했다.

반면 최근 브라운관으로 귀환한 왕들은 ‘사적 존재’로서의 성격이 더욱 부각된다. MBC ‘이산’은 조선 후기 개혁군주였던 정조의 삶을 그린다. 그러나 드라마의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군주 ‘정조’의 면모보다 ‘이산’이라는 한 인간의 내면적 고뇌를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역적으로 몰려 뒤주에서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사도세자)를 부정해야만 왕이 될 수 있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시시때때로 울고 어찌할 바를 몰라 한다. 왕이 되려는 이유도 뚜렷한 대의명분 때문이 아니라 “왕이 되지 못하면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병훈 프로듀서는 제작발표회에서 “(정조라는 임금에 대해) 평면적이기보다 다각적으로 바라보고 싶었다”며 “겉으로 나타난 왕의 모습의 이면에 있는 내면적 갈등과 인간성을 부각시키고자 했다”고 밝혔다.

SBS ‘왕과 나’의 왕(성종)은 정치보다 연애에 심취한 것으로 보인다. 정인과 혼인할 수 없었던 아픔과 내시 김처선과의 삼각관계가 주된 구성을 이루고 있다. 그는 ‘왕답지 못하게’ 유약하며 소화의 사랑을 얻지 못해 ‘징징거린다’. MBC ‘태왕사신기’ 역시 담덕(광개토대왕)이 어린 시절 왕이 되기 위해 숨죽여 살았던 시간 동안의 개인적인 외로움, 회한, 분노 등을 비교적 상세히 묘사했다.

SBS드라마 ‘왕과 나’에서 성종역의 고주원.
SBS드라마 ‘왕과 나’에서 성종역의 고주원.
사극이 ‘사생활화, 탈정치화’하고 ‘인간’의 내면에 집중하는 것은 권위주의가 해체되고 권력이 일상화된 최근의 사회상황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문화평론가 김종휘씨는 “과거에는 왕이나 지도자를 탈인격화해 신비한 존재로 바라봤지만, 지금은 사회가 민주·다원화되면서 왕도 한 개인일 뿐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라며 “이런 환경에서는 고위 공직자 등에 대한 사생활과 사적인 정보들이 끊임없이 흘러다니고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틀도 그런 쪽에 익숙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경기대 사학과 김기봉 교수는 “역사소설 역시 거대담론 위주의 소설에서 역사적 인물의 사적인 부분과 내면을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변화해가는 징조들이 있다”며 “‘우리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목표가 분명치 않은, 복잡·애매하고 다의미한 시대적 경향성이 그런 독법을 요구하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반면에 일시적으로 유행하는 소재에 그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문화평론가 김헌식씨는 “‘인간적인 왕’은 시청자로 하여금 힘을 가진 왕이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해 감정 이입하기 좋은 캐릭터”라며 “소재 제한에 허덕이는 사극이 새로운 소재를 찾은 것은 분명하지만, 지속적으로 인간의 본질을 건드리는 것인지 한번 유행처럼 휩쓰는 소재에 머물 것인지는 좀더 두고볼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로사기자 r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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