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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킨포크(kinfolk)가 유행하리라?!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5. 1. 8. 11:32

올해 킨포크(kinfolk)가 유행하리라 예측하는 전문가들이 꽤 있는 듯 싶다. 트랜드 예측서에서 이를 잘 확인할 수 있기도 하다. 


킨포크는 본래 일가 친척을 뜻하는 말이지만 여유자적하면서 소박한 삶의 방식을 통칭하는 개념이 되었다. 직접 작물을 길러 먹는 전원 생활을 일컫기도 한다. 당연하게도 이는 매우 이상적인 삶으로 보인다. 더구나 웰빙생활이나 자연친화적 회귀농의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유기농 식재료를 직접 길러 얻는 생활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이런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니 관심을 받을만 하다. 그렇기 때문에 유행할 수 있음을 능히 이야기 할 수 있어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그것이 실제적인 실천 가능성과 지향적 가치가 맞아 떨어져야 한다.


그럼 킨포크는 이에 부합하는 것일까. 이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킨포크의 개념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 킨포크라는 개념이 단지 친척이라는 개념에서 이상적인 자연친화적인 삶이 된 것은 미국의 포틀랜드의 잡지 이름에서 시작되었다. 


두 부부는 시골에서 살면서 이웃들과 함께한 일상을 잡지에 실어냈다. 이에 대한 반응은 좋았다. 그런데 그 두 부부 주변에는 작가와 화가, 사진예술가 등 40여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먹을 식재료를 직접 키우고, 이를 요리하여 음식을 만들었다. 또한 단지 혼자 먹는 삶이 아니라 나눠먹는 음식문화를 추구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킨포크라는 개념은 우리의 식구 개념과 같았다. 다만, 식구가 혈연적 개념이 강할 수 있다. 하지만, 현대적인 의미로 보았을 때 같이 밥을 먹는 사이이면 가족이 될 수 있다. 오히려 혈연이 없어도 식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영화 ‘비열한 거리’에서 조인성은 자기 조직원들을 식구에 비유하기도 했다. "하나만 묻자 식구가 뭐여? 식구란 뭔 뜻이여? 식구란 같이 밥 먹는 입구녕이여. ... 혼자 밥 먹겠다는 놈은 뭐여? 호로XX여" 보통 조직폭력배들이 피가 섞일리 없다. 






그렇다면, 킨포크는 유행할까. 몇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포틀랜드에서 사람들의 직업은 예술가들이 많았다. 그런 면에서 제주도에 정착한 이효리를 두고 킨포크 개념을 적용했는지 모른다. 하루하루 출근 전쟁을 벌어야 하는 이들과는 거리가 있다. 꼭 예술가일 필요는 없지만, 자유직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알맞다. 아니면 절충방안으로 '주말 킨포크족'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소한 취향과 기호가 일치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어야 한다. 







또한 은퇴 후 생활을 모색하는 이들에게 맞을 수 있다. 또한 각자 작물을 키우더라도 공동체 차원에서 음식을 서로 나누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 일명 소셜 다이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공동체적인 식사를 항구적으로 유지할 의사가 있는지 의문인 경우가 많다. 정작 이효리의 경우에도 킨포크라고 부르기에는 한계점이 있다. 공동체적인 식사 문화가 우선은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블로그 상으로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전원생활을 누리려는 것은 개인들의 사적 생활의 보장을 통한 휴식을 원하는 점이다. 전원으로 돌아가는 것은 단지 오염되지 않은 자연환경에서 좋은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고자 함만은 아니다. 복잡다단한 인간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은 심리도 반영되어 있다. 


우리 일상의 많은 스트레스와 불만 그리고 분노는 바로 인간관계에서 오기 때문이다. 킨포크의 이상적인 가치는 바로 그런 불편한 관계들을 어떻게 편하게 만드는가이다. 전원생활의 초기에는 인간적인 관계들이 매우 좋은 정서적 효과를 나타내지만, 곧 일반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다시 빚어내기 시작한다. 


킨포크의 담론에서 우리가 생각해야할 것은 무조건 이상적인 가치만 보여주는 점이다. 사적인 관계와 공적인 관계들을 잘 조화롭게 맺어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나아가 개인과 공동체의 조화를 말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 관계의 문제이다. 이는 마치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오류를 프로이트가 지적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인간이 불행한 것은 문명 때문이 아니라 인간관계 때문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도 그곳에도 인간관계는 있는 법이다. 



문화콘텐츠학 박사 김헌식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