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현대영웅은 왜 가면을 쓰나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5. 7. 20. 15:52



-벵자맹 주아노의 ‘얼굴 감출수 없는 내면의 지도’ 리뷰



우리는 하루에도 셀 수 없이 사람을 만날 때 얼굴을 본다. 얼굴을 보고 사고하고 대화하고 판단하며 행동한다. 한 사람의 정체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얼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관상을 다룬 허영만의 <꼴>이라는 만화가 큰 인기를 끄는 것은 얼굴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굴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 같으면서도 정작 우리는 얼굴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오히려 얼굴에 대한 조작과 훼손에 더 열정적이다. 이 극단화의 정점에 영웅들이 있다. 





어찌된 일인지 영웅들은 얼굴을 가리면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 배트맨이나 원더우먼, 스파이더맨은 얼굴을 가리면 하늘을 날고 무술의 달인이 된다. 영화 <마스크>(1994)의 주인공처럼, 마스크만 쓰면 무미건조한 사람이 명랑 쾌활한 표정과 언행을 얻고  천하무적의 초능력을 갖게 된다. 이렇게 주인공들은 ‘얼굴 포기’를 통해 ‘새로운 얼굴’을 얻어 삶의 터닝포인트을 얻기도 한다. 얼굴에 가면을 하나 썼을 뿐인데 말이다. 그들은 순전히 자신이 누구인지 감추기 위해 얼굴을 은폐한다. 쾌걸 조로나 일지매도 생각할 수 있다. 자신의 얼굴을 가려야 활동하는 그들은 본래 얼굴을 내놓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이들이다. 얼굴을 가릴 때 진정한 정체성을 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얼굴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굴을 드러낼수 없는 사회구조와 상황속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게 때문에 얼굴의 이중성에 웃고 운는다. 


한편 사람들은 영웅의 진짜 얼굴을 보려한다. 하지만 그의 진짜 실체가 드러나고 나면 자칫 그를 둘러싼 꿈과 선망이 사라진다. 진짜 얼굴은 인간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얼굴은 말 그대로 인간을 상징한다. 얼굴을 볼 때 초인의 면모보다는 동정과 연민, 배려의 감정이 나타나도록 한다. 이는 인간을 벗어난 우월자의 모습이 아니다. 논객 미네르바의 실체가 밝혀졌을 때 지지자들의 많은 이들이 보인 반응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일부 사람들은 가짜라며 소송을 걸기도 했다. 인터넷의 아이디나 필명은 가면이면서 얼굴의 가공이고 훼손이다.


영웅들이 얼굴을 은폐하고 초인이 되거나 자신이 역량을 펼친다는 설정은 현대사회의 산물이다. 현대에 올수록 우리는 얼굴불안에 사로잡혀 왔기 때문이다. 이런 얼굴 훼손의 영웅이 인기 있는 것은 현대인들의 자아와 얼굴에 얽힌 심리 때문이다. 현대인은 바로 그러한 얼굴 은폐를 통해 자신도 삶의 변화를 일으키려한다. 그것은 얼굴이라는 육체가 규정하는 정신이다.


불안은 허구의 세계로 인간을 몰입하게 한다. 얼굴은 사실이자 현실이다. 얼굴에 대한 훼손과 가공은 비현실이자 허구가 된다. 가면과 분장은 얼굴에 대한 훼손이자 가공이다. 가면은 금기를 허용으로 바꾸어주기도 하며 이는 허구가 주는 편안한 시공간의 탄생이다. 안동하회탈춤에서는 탈을 쓸 때 지배층에 대한 비판이 허용된다. 탈을 쓸 때만이 지배층에 대한 비판을 할 수가 있다. 탈이 없으면 그는 광대가 아니라 인간으로 돌아온다. 그것은 진지함 그 자체이자 현실이 된다. 허구에 얼굴이 갇힌 상태에서 편안함이 찾아온다.


요컨대, 일련의 사례에서 사람들이 얼굴을 이렇게 가만두지 않는 것은 얼굴이 그냥 물리적인 골격과 살덩어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푸코는 육체를 유토피아로 설정할 때 너무 강력하면 가장 먼저 공격 받는다고 했다. 얼굴은 유토피아다. 사람들은 얼굴을 통해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래의 얼굴이 그 꿈을 채워주지 못하면 얼굴에 손을 대고 훼손하고 가공하기 시작한다. 고대인들은 가면을 쓰거나 얼굴을 꾸며 신과 소통하려 했다. 하지만 꼭 가면을 써야 하는 것일까. 가면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다른 우월적 존재로 만들어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부정을 통해 새로운 존재가 되려는 욕망을 담고 있다.



얼굴에 대한 꿈이 크다면 곧 실망은 커진다. 꿈은 대개 스스로 만들어지기보다는 다른 사회구성원을 통해 지지되기 때문이다. 사람의 얼굴은 단순히 라깡의 거울이론처럼 객관적으로형성되지 않는다. 얼굴은 각 사회와 문화의 코드를 담고 있다. 얼굴의 이상적 상태는 스스로 만들기보다는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사회적으로 구성된 얼굴을 거울에 비쳐볼수록 얼굴에 대한 불만은 커져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화장에 만족하지 못하고 성형수술을 하는 것은 또 하나의 사회적 가면을 쓰는 것이다. 화장에서 이룰 수 없는 유토피아를 얼굴개조인 성형수술을 통해 얻으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유토피아는 오지 않고 항상 고도를 기다리며가 반복된다.



유토피아가 있다면 디스토피아가 있는 법이다. 메두사의 얼굴은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는 상징이다. 그 얼굴은 사람이 피하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외면하려 할수록 그 얼굴을 손에 쥐고 있는 이들은 더욱 권력을 강화한다. 영화 <스크림>(Scream, 1996)의 내용처럼 연쇄살인범들은 자신들을 부정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가면착용이나 분장이라는 훼손 의식을 거행한다. 얼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의 강화를 통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만약 장승이 하나도 무섭지 않은 아기공룡둘리의 모습이라면 정체성을 잃는다. 조폭은 조폭다운 얼굴이어야 그 쓰임이 있다. 얼굴의 부정성이 효과를 발휘할 때면 우리는 그쪽으로도 얼굴을 훼손한다. 하지만 대부분 좋은 얼굴로 바꾸려고 하는데 그것은 사회적 기준에 부합하는가에 달려 있기에 끊임없는 자기불안과 소외에 시달릴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람들이 얼굴을 가공하고 훼손하는 점들을 중점적으로 살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얼굴은 본질적이라는 전제가 담겨있다. 그러나 얼굴은 그 자체가 하나의 가면이 아닌가. 이러한 점에서 이중성을 고민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얼굴은 사회적 관계를 위한 편안한 가면이다. 얼굴이 본질이라고 생각할수록 감정을 그대로 노출하며 사회적 유대를 위한 인사치례의 표정을 혐오하게 될 것이다. 얼굴은 자아를 표현하는 매개이면서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서양의 상상에 대한 논쟁은 바로 얼굴이 가면이라는 전제에 따른 것이다. 한편, 얼굴은 하나의 매개물이기 때문에 한국의 초상화는 얼굴을 통해 그 정신의 숭고함을 드러내려고 노력했다. 얼굴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그 속에서 정신을 표현하려 했다. 단순히 이익을 위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사용되는 얼굴을 뛰어넘은 것이다. 확실히 저자의 말대로 이제 한국초상화가 추구했던 얼굴을 통한 정신의 추구라는 예술의식은 단절되었다. 


현대에 우리는 그냥 그대로의 얼굴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대로의 얼굴에 정신이 깃들이게 하는데 전혀 무심이다. 대중스타들은 패리스 힐튼이나 마이클잭슨처럼 얼굴을 가공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의 매개물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훼손하고 가공해도 된다는 말일까. 얼굴 훼손은 주체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사회적으로 구성된 유토피아를 찾으며 자신을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연구가 에고의 독자적 주체성을 파괴한 것과 같은 개인 주체성의 상실이다. 그러나 그 주체성의 상실은 시각에 의존한  얼굴론이 강할수록 더욱 그렇다.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블라인드니스>(Blindness)에서 의사는 자신의 부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눈이 안보이고 나서야 당신이 보이다니!"


평생 시각장애인으로 사는 사람들은 성실하게 살았지만 눈이 잘보였던 이들이 갑자가 눈이 보이지 않으면서 그들은 인류문화의 근간을 무너뜨렸다.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은 결국 얄팍한 시각에 기대고 있었던 것이다. 얼굴에 대한 대부분의 담론은 시각적 입장이다. 저자가 서문과 말문에 인용한 한용운의 시는 얼굴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더욱 확장시킨다.


"당신의 얼굴은 흑암(黑闇, 암흑)인가요.


내가 눈을 감은 때에


당신의 얼굴은 분명히 보입니다.


당신의 얼굴은 흑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