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 1. 경기도에 사는 직장인 황 모 씨(여, 27세)는 얼마 전 용산에 위치한 회사에 계약직 사원으로 취직했다. 월급은 120만원 정도. 업무 특성상 퇴근이 늦어 회사 근처에 오피스텔을 구했다. 월세 70만원에 관리비는 별도다.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은 그는 남은 수입의 상당 부분을 소형 가구나 인테리어 소품을 구입하는 데 쓴다. 당분간 저축은 생각도 안하고 있다.
사례 2. 직장인 이 모 씨(남, 38세)는 ‘자동차는 할부가 끝나면 바꾼다’는 주의다. 3년에 한 번씩 차종을 바꾸는 것은 물론 시트나 휠 등을 바꾸는 튜닝에도 꽤 많은 금액을 지출하고 있다. 올해 초에도 그는 외제차를 새로 구입했고, 연봉의 절반 이상을 자신의 ‘애마’에 투자한다. 내집 마련은 이미 포기했다. 전세금을 줄여서라도 자동차에 대한 투자를 줄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부동산 경기가 좀처럼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서 최근 부쩍 ‘하우스 푸어’가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하우스 푸어는 ‘집을 가진 가난한 사람’이란 뜻으로 대출로 아파트를 산 후 부동산 침체로 손해를 보고 있는 이들을 가리킨다. 통계에 따르면 하우스 푸어는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수도권에만 10만여가구에 달하고 전국적으로는 200만가구에 이른다.
재미있는 사실은 하우스 푸어 논란 밖에서는 모순적인 소비 바람이 불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모순적인 소비 행태란 앞서 소개한 사례처럼 경기가 어려운 시기에 자신의 소득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한 소비를 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 모 씨 사례처럼 일반적인 한국인의 재무 목표(내집 마련)를 포기하고 자신의 만족을 위한 소비에 아낌이 없는 행태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지경부가 발표한 유통업체 매출 동향을 살펴보면 이런 과시적이고 모순적인 소비성향은 단지 몇 명의 사례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매출 동향을 보면 생필품을 취급하는 대형 마트의 매출증가율은 마이너스와 플러스를 왔다 갔다 한다. 반면 백화점은 지난해 5월부터 매달 증가세를 보인다. 특히 명품 소비는 계속 증가세다. 백화점 상품군별 매출 증감률 추이를 보면 명품 매출 증가율은 지난 2월 단 한 번 마이너스를 기록했고, 지난 6월에는 무려 16.4%의 증가율을 보였다.
전통적인 경제학에서는 ‘경제주체인 소비자는 합리적’이라는 전제조건이 있다. 주머니가 든든하면 소비가 늘고, 그렇지 않으면 소비가 줄어야 합리적인 경제주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왜 이런 모순적인 소비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이문규 연세대 경영대 교수는 “소비자행동이 이성적이라는 생각은 매우 구태의연한 생각이며 이는 소비자들의 심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경기가 나쁘고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명품 소비나 큰 규모 소비가 느는 이유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과시적인 소비에는 ‘부인(denial)’하려는 심리가 작용한다. 경기 침체로 직장을 잃었거나 소득이 줄었어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리가 누구에게나 있다. 아직 경제적인 어려움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다 보면 비이성적인 소비가 발생하기 쉽다. 눈앞의 소비에 급급해 납득하기 어려운 선택을 하기도 한다. 국내 한 홍보회사에서 인턴을 하는 A씨의 사례가 여기에 속한다. A씨는 월급 80만원에 인턴으로 6개월 정도 일한 후 정규직으로 전환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A씨가 인턴으로 일하는 회사는 여느 홍보회사보다 규모면에서나 내용면에서도 탄탄하고 비전 있는 곳이었다. A씨는 능력도 인정받아 정규직 채용이 확실시됐다. 그러나 그는 3개월 만에 이름 없는 홍보회사에 바로 취직하기로 결심했다. 월급은 150만원 정도. 인턴으로 일했던 홍보회사에서 정규직으로 일하게 될 때보다 월급이 적지만 그는 “당장 명품을 사느라 밀린 카드값이 부담스러웠다. 3개월 내에 카드값을 막기 위해 당장 회사를 옮기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고 전한다.
두 번째는 과거에 대한 향수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과거에 집착하는 소비자는 과소비를 할 가능성이 높다. 취업준비생 B씨. 한때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따로 용돈을 받아쓴 적이 없었다. 하지만 구직 기간이 길어지면서 28살에 부모님께 용돈을 타서 쓰는 형편이 됐다. 그런 그는 얼마 전 휴가에 괌을 다녀왔다. 면세점에서 명품 가방도 하나 장만했다. 그는 “100만원가량 되는 6개월 인턴 월급에서 저축했던 돈을 거의 다 쓰고 왔다. 어차피 당장 목돈이 필요한 건 아니니 괜찮다”고 했다. 김정주 사람과사람들 연구소장은 “불황, 호황 할 것 없이 과시적인 소비는 언제든지 일어나지만 특히 경제가 어려워진 후에 늘어나는 명품 소비는 ‘나 아직 괜찮다, 이 정도는 쓸 수 있다’는 자기 위안을 위한 소비 성향이 강하다”고 했다.
미래에 대한 낙관도 소비를 부추긴다. 경기라고 하는 것은 좋은 시절이 있으면 다시 나쁜 시절이 찾아오듯이, 나쁜 시절을 겪는 사람들은 다시 좋은 세월이 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진다. 불황이 지난 후 폭발적으로 소비가 느는 것에 대해 ‘의외의 선택, 뜻밖의 심리학’의 저자 김헌식 씨는 밀턴 프리드먼의 항상소득가설(Permanent income hypothesis)을 근거로 들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은 현재 주머니에 돈이 없어도 미래의 소득까지 생각해서 평균적인 소득을 산정한다는 것. 지난해 사법고시에 합격한 C씨가 여기에 속한다. 그는 연수원에 들어가면서 카드에 마이너스 통장까지 만들었다. 현재 통장 잔고는 마이너스 300만원을 넘어섰다. 집에서 연수원이 멀어 일산에 오피스텔을 구했고, 얼마 전 차도 구입했다. 연수 후 로펌에 채용되면 이 정도쯤은 문제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문규 교수는 “자의든 타의든 남들에게 보이는 상품에 대해서는 자신의 자존심과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는 성향이 있다. 이를 사회적 상품이라고 하는데 아이폰, 스타벅스 커피, 유럽 고급 승용차, 명품 패션 등이 그 예”라며 “개인용품은 싸구려를 써도 남들에게 보이는 상품은 명품을 쓰고 싶어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라고 말한다. 취업을 앞둔 여대생 D씨는 얼마 전 자신 이름 앞으로 든 보험으로 대출을 받았다. 취직한 친구들은 월급으로 산 옷이며 명품 가방, 명품 신발을 두르고 모임에 나타나곤 했다. 위축되는 게 싫었던 그는 부모님 몰래 대출을 받아 명품 가방을 구입했다. 강남구 신사동에 사는 30대 남성 E씨도 비슷한 케이스다. 8000만원짜리 전세에 사는 그는 차는 반드시 외제차를 탄다. 어차피 자신의 월급으로 강남에 내집 마련은 힘들다는 생각이고, 그렇다고 강남을 떠날 생각도 없다. 은행 대출 이자를 갚느라 허리가 휜다는 친구들과 달리 그는 얼마 전부터 골프에 취미를 붙였다.
이런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의 얘기만은 아니다. 최근 비즈니스위크는 경제위기 이후 미국인들의 소비행태가 달라졌다고 보도했다. 계속해서 자산가치(부동산 가격)는 떨어지는데 아이패드는 잘 팔리고, 스타벅스 역시 2006년 이후 2분기 최대 영업이익을 내는 등 과시적 소비가 늘고 있는 상황이다. 비즈니스위크는 이 같은 현상의 원인으로 크게 두 가지를 꼽았다. 한 가지는 부자들의 경우 경기침체 이후 주가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일찍 안심을 하고 소비를 늘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
또한 일반 소비자들은 자신들의 부동산 및 펀드 자산가치가 떨어지니 실제로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를 손에 쥐고 싶어 한다. 자기 위안을 위한 과시적인 소비, 충동구매를 많이 하게 된다.
게다가 당장 경기가 나아질 것으로 보지 않는 부정적인 소비자 중 일부는 ‘어차피 집이나 차를 못 살 형편이라면 편하게 여행이라도 가자’는 마음으로 고급 호텔에 숙박하는 등 자신을 위한 무리한 소비를 한다.
이 때문에 P&G의 마케터들이 고생을 한다고 비즈니스위크는 전한다. 개별 소비자들이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적극적으로 소비하면서도 생필품을 살 때는 브랜드 제품 대신 저렴한 제품을 구매하는 경향이 늘기 때문이다. 비즈니스위크는 “과시적인 소비를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필품은 싼 것을 구매한다. 이후 소비자들은 ‘이만큼 아꼈으니 스타벅스 커피쯤은 사먹을 수 있어’라며 자신의 소비를 합리화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정고은 기자 chungke@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571호(10.09.01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