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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클론의 휠체어 댄스가 화제가 되고 있다. 가수들의 컴백은 연예 활동의 한 과정처럼 돼 있어서 클론의 컴백 자체가 흥미로운 것은 아니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클론이 휠체어를 타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나를 비롯해 사람들은 클론이 더 이상 댄스 가수로 활동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하고 예전의 클론과는 달리 발라드 풍의 노래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예상은 빗나갔다. 클론은 여전히 댄스 가수로 무대 위를 춤으로 꽉 채웠다. 예전의 클론, 바로 그 모습이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들이 휠체어를 타고 춤을 춘다는 것이다.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강원래뿐만이 아니라 구준엽과 백댄서들까지 모두 휠체어에 앉아서 춤을 춘다.
클론이 보여준 휠체어 댄스는 격렬하면서도 절도있는 멋진 춤이었다. 사람들은 휠체어 댄스라는 새로운 춤을 신기한 듯이 흥미롭게 보면서 한편으론 가슴이 뭉클했을 것이다. 그것은 강원래의 도전과 구준엽의 우정이 만들어낸 눈물과 땀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 휠체어댄스에 가슴 뭉클 -
클론의 컴백 무대를 본 장애인들은 무대 위의 바퀴들이 한없이 멋져 보였다며 자신들이 하지 못한 도발적인 몸의 향유에 카타르시스를 느꼈고 일반인들은 클론이 무대 위에서 펼치는 휠체어 댄스를 보면서 장애인의 수동적인 이미지를 능동적인 이미지로 바꾸어 인식하는 마법에 걸려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수도 없이 외치던 장애인과 함께 하는 사회가 무엇인지를 느꼈을 것이다.
구준엽이 강원래 뒤에서 휠체어를 밀고 무대에 올라와 느린 템포의 노래를 불렀다면 그것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하는 사회의 모습이 아닌 장애인을 연민하며 돕고 사는 차별적인 사회 모습을 다시 한번 확신시켜주는 것으로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클론은 누가 누구를 돕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그것을 하나의 트렌드로 들고 나왔다. 휠체어 댄스는 강원래를 위한 어쩔 수 없는 대안이 아니라 클론이 함께 살기 위한 선택임을 보여주었다.
장애인을 돕는 것이 아닌 함께 사는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 바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하는 사회이다. 그런 점에서 클론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하는 모습의 전형적인 모델이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클론의 휠체어 댄스가 가요계에 새바람을 일으키지 못하면 휠체어 댄스라는 트렌드가 실패하게 되고 그러면 장애인과 함께 사는 것은 이득이 없는 실패의 요인으로 고착화되면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더욱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문화비평가 김헌식씨가 고뉴스에 발표한 ‘말아톤의 수상과 강원래 복귀’라는 칼럼에서 말아톤의 7개 부문 대종상 수상을 지식인 사회의 속죄 의식이라고 비평했고 강원래에게 갈채를 보내고 있지만 그것이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클론의 컴백은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개선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벌써부터 사람들 눈에 휠체어가 낯익은 물건이 됐고 휠체어는 장애인의 이동 수단일 뿐 아니라 춤을 추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 장애인에 대한 차별 버려야 -
클론이 휠체어를 타고 돌아온 까닭은 세가지가 있다. 첫째, 세상이 변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둘째,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 세상은 변해야하기 때문이다.
인류 사회의 역사가 차별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이라고 볼 때 지금이 바로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말소시킬 시점이다. 클론이 그 장애 해방의 도화선이 돼야 한다. 달마가 동쪽으로 온 까닭이 진리의 깨달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듯이 클론이 휠체어를 타고 돌아온 까닭은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버리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