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크나이트’ 시리즈의 미국 시카고, ‘노팅힐’의 영국 런던,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뉴질랜드 북섬, ‘인터스텔라’의 아이슬란드 스비나펠스요쿨….
어떤 영화는 이야기나 주인공보다 풍경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는다. 영화 팬들은 기억 속 잔상을 좇아 기어이 영화 촬영지를 찾고, 스크린 속 환상과 현실 속 실재의 간극을 확인하곤 한다. 영화가 흥행하면 촬영지는 유명 관광지로 여행 책자에 등장하고 사람들이 모여든다.
‘스크린 투어리즘(Screen Tourism)’ 또는 ‘필름 투어리즘(Film Tourism)’은 이처럼 영화가 흥행한 뒤 그 촬영지에 영화 팬들이 몰리는 현상을 말한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어벤져스2)의 경제효과를 두고 영화 팬들 사이에서 조소(嘲笑)가 나오지만, 그럼에도 정부가 영화 촬영 유치에 사활을 걸었던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영화 촬영이 관광 수입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각국이 촬영 로케이션 유치에 나서고 있다.
◇‘반지의 제왕’ 나라 된 뉴질랜드=영화가 한 나라의 산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첫 사례는 영화 ‘반지의 제왕’이다. 인구 약 450만명의 낙농업 국가인 뉴질랜드는 이 영화가 자국에서 촬영된 이후 ‘반지의 제왕’의 나라가 됐다. 3편의 시리즈가 개봉하는 동안 뉴질랜드는 ‘가장 가보고 싶은 여행 장소’로 꼽혔고, 실제 영화가 개봉했던 2001년부터 2003년 사이 총 400만명의 관광객이 이 영화 때문에 뉴질랜드를 방문했다. 관광 파급효과만 38억 달러에 달한다는 분석도 있다.
관광 수입뿐이 아니다. AFP통신은 이 영화로 뉴질랜드 광고효과가 4800만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또 영화가 제작된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영화 제작팀이 현지에서 쓴 돈만 2억5000만 달러에 달하고, 영화 촬영 관련 고용 인원만 약 2만3000명이었다. 1년에 영화 5편 정도만 제작되던 뉴질랜드의 영상산업이 2010년 기준 연 28억 달러 규모로 성장해 ‘웰리우드’(뉴질랜드 수도 웰링턴+할리우드)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한 편의 영화를 시발점으로 거대한 효과를 일궈낸 이 사례는 ‘프로도 경제효과(Frodo EconomyEffect)’라고 불린다. 프로도는 ‘반지의 제왕’ 주인공이다.
프로도 경제효과의 배경엔 뉴질랜드 정부의 지원이 있었다. 정부는 감독 피터 잭슨의 고향이 뉴질랜드라는 이유로 ‘반지의 제왕’을 자국 영화로 인정해 세금을 면제해줬고, 홍보비 등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는 행정부 내에 ‘반지의 제왕’ 제작 후원 전담 부서도 설치했다. 영화 촬영 지원책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2012년 개봉한 영화 ‘호빗’이 뉴질랜드에서 촬영될 때 제작사와 배우 노조 간 갈등이 있었는데, 정부는 노동법까지 바꾸면서 영화 제작을 지원했다. 그 결과 2013년 뉴질랜드 관광객의 8%는 ‘호빗’ 촬영지를 보기 위해 방문했다.
◇영국, 영화 촬영지 지도 제작=뉴질랜드 외에도 스크린 투어리즘의 효과를 본 나라들은 영화 촬영 로케이션 유치에 적극적이다. 그중 영화 ‘해리포터’ ‘007’ 시리즈 등으로 영화의 막강한 경제효과를 체험한 영국이 가장 앞선다. ‘해리포터’의 대표적 촬영지였던 안위크 성의 경우 2000년도 방문객이 5만2000명이었지만 2002년에는 약 14만명으로 3배 가까이 증가하는 효과를 거둔 바 있다.
세액 공제 정책은 영국의 영화 촬영 유치 정책의 핵심이다. 예산이 2000만 파운드 이하인 영화의 경우 영국 내 지출액의 20%까지, 예산 2000만 파운드 초과 영화의 경우 16%까지 세액 공제를 해준다. ‘어벤져스2’는 영국 촬영으로 3100만 파운드 세액 공제 혜택을 받았다. 또 영국관광공사는 96년부터 영화 촬영지 안내지도를 만들어 홍보해오고 있다. 영화 촬영을 관광으로 연계시키겠다는 의도에서다. 2003년 첩보영화 ‘쟈니 잉글리쉬’가 개봉한 뒤에는 스파이 활동을 테마로 한 지도도 만들었다. 옥스퍼드 이코노믹스에 따르면 이 같은 노력으로 영국 영화가 관광에 미치는 경제효과는 96년 4억 파운드에서 2005년 16억 파운드까지 증가했다.
미국은 영상산업을 통해 관광산업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데 가장 성공한 나라다. 일찍이 영화 ‘킹콩’은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빌딩으로 영화 팬들에게 각인시켰다. 세제 혜택은 물론이고, 각 도시들이 영화 촬영을 위해 도로 통제도 허용해준다. 시카고가 ‘트랜스포머3’ 촬영을 위해 2010년 45일간 시내 곳곳을 통제하는 것을 허용한 사례는 유명하다. 일본 정부는 영화 ‘레지던트 이블5’ 촬영을 위해 도쿄 중심부 시부야 거리 통제를 허용했고, 영화 ‘007 스카이폴’은 2012년 터키 정부의 협조로 이스탄불의 한 재래시장에서 촬영할 수 있었다.
◇한국은 제작비용 20∼30% 환급=한국의 경우 영화 로케이션 유치 사업은 주로 국내 영화에 한해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진행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98년 제작된 영화 ‘쉬리’에 등장한 제주도 중문관광단지의 ‘쉬리의 언덕’은 영화 흥행 뒤 관광객이 늘었던 대표적인 장소다. 2001년 개봉한 영화 ‘친구’의 배경인 부산 자갈치시장, 기장 대변항, 범일동 국제호텔 등은 ‘친구의 거리’로 조성된 바 있다.
정부가 나서서 해외 영화 로케이션 촬영을 유치하기 시작한 것은 2011년부터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운영하는 ‘외국영상물 로케이션 인센티브 사업’은 외국자본이 순수 제작비의 80%를 초과해 투자하는 영화, TV시리즈 등에 제작비용의 최대 30%(국내 촬영 10일 이상, 국내 집행비용 20억원 이상일 경우)를 지원한다. 한류 열풍으로 중국과 일본 영화가 주로 지원을 받았다. 지난해 국내에서 촬영한 ‘어벤져스2’의 제작진은 올해 중 정산을 한 후 약 39억원을 환급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반지의 제왕이 뉴질랜드 산업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공간에 대한 매력을 강화시키는 신화적 콘텐츠이기 때문”이라며 “해외 영화라고 무작정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매력을 높여주는 영화에 우선적으로 지원하는 식의 정밀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세종=윤성민 기자 wood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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