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장애인과 관련한 드라마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09. 4. 25. 03:10

내일이 모호한 드라마 <내일 또 내일>

06.02.02 11:14 ㅣ최종 업데이트 06.02.02 11:14 김헌식 (codess)

지난 1월21일 장애인들의 관심 속에서 방영됐던 KBS 2TV 드라마시티 <내일 또 내일>(이진서 연출/최민기 극본)은 드물게도 전신마비 장애인을 다루었다. 전신마비 장애인 아버지를 둔 가족의 일상을 소재로 삼은 것은 더욱 눈에 띄는 점이었다. 선천적인 장애가 아니라 후전적인 전신마비 장애를 다룸으로써 장애는 누구에게나 해당된다는 장애의 일상성을 부각시켜 의미를 더했다.

이 드라마는 지난 1992년 SBS <사랑의 징검다리>에 소개되었던 사연을 소재로 삼아 대본·연출·연기 삼박자가 비교적 제대로 갖춰진 작품이었다.

드라마는 한천(전신마비 남편)과 순려(한천 부인)그리고 아들인 행수(9살 아들), 갑수(행수의 철부지 동생), 장모 장씨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보여준다.

드라마의 내용은 전신마비 남편이 자신을 보살피고 가족의 생계를 도맡아 고생하는 아내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떠나보낸다는 것. 장모를 구하려다가 대신 차에 치인 한천은 전신마비자가 되지만 입에 붓을 불고 그 붓으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지역 특산물을 홍보하는 등 열심히 살아가려 한다. 하지만 가족의 생계비를 충당하기엔 역부족이어서 아내인 순려가 식당과 노래방 등에서 일하게 된다. 그러던 중 순려를 좋아한다는 남자가 등장하고 이 때문에 가족은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 점점 순려가 다른 남성과 만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어머니와 남편은 물론 아이들까지 알게 된다.

새로운 삶과 사랑을 찾아 떠나가는가, 아니면 전신마비의 남편과 아이들을 계속 붙잡고 있어야 하는가. 기존의 드라마에서는 도덕적 딜레마에서 방황을 하다가도 가족에게 회귀한다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드라마는 순려가 새로운 사랑과 삶을 찾아 떠나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제작진이 밝힌 기획 의도는 장애인의 받는 사랑이 아닌 주는 사랑 이라고 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이견이 있었다. <내일 또 내일>에서 전신마비 장애인 한천이 보여준 사랑이 주는 사랑이었는가에 대해서 동의하고 싶지 않다는 의견들이 많았다.

처음에 드라마는 꿋꿋하게 살아가는 한천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했지만 사실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한천이 지역특산물을 팔며 생활 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모습은 거의 부각이 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전신마비 남편이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함이 더욱 도드라졌다.

한천의 아내 순려가 새로운 사랑을 찾아가는 것에 대해서도 그것이 진정한 사랑 찾기냐는 반문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일단 무조건적인 여성의 희생의 강요보다 자신의 삶과 진정한 사랑을 찾는 것은 매우 중요할 것이다. 다만 그것이 현실적, 가치적인 타당성을 갖는가가 매우 중요하다.

드라마에서 행수의 어머니 순려의 번민과 인간적 고민이 매우 현실감 있게 드러나기는 했다. 하지만 부유한 사장이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고 식상했다. 더구나 부유한 사장이 순려를 일방적으로 좋아하고 쫓아다닌다. 정작 순려가 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그녀가 꿈꾸는 행복이 어떤 것인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순려는 철저하게 수동적으로 끌려가는데, 이럴 때 처음부터 사랑 찾기 보다는 신분 상승과 현실 도피에 머문 인상을 준다.

한편, 아빠의 전신마비 장애를 너무나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아들 행수의 역할이 감동을 주곤 했다. 행수는 전체적으로 갈등하는 가족구성원 사이에서 중심 추 역할을 했다. 아버지를 병신으로 부른다거나 동생을 낳아달라고 떼쓰는 동생을 의연하게 타이르고 상황을 설명한다. 꿋꿋하게 아버지의 수발을 드는가 하면 엄마에 대한 소문이 안 좋게 들려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한천에게 한 말이다. 한천이 아내를 사랑하기 때문에 보내야 한다고 말하자, 아들 행수는 사랑하면 더 붙잡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을 꼽으라고 한다면 입에 봉을 물고 아내의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려주려는 장면이다. 아들 행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천은 아내를 떠나보내려고 마음을 굳힌다. 한천은 "더러워~"라며 아내에게 일부로 모멸적인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는 진정으로 그렇게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떠나보내기 위한 준비였다. 더럽다는 말을 듣고 속상해진 순려는 만취해서 돌아와 잠든다.

안쓰러운 한천이 잠든 아내의 얼굴을 보려는데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보이지 않는다. 이때 한천은 아내의 얼굴을 보려고 입에 붓을 물어 붓끝으로 머리카락을 올리려 하지만 거리가 좀 있어서 채 머리카락을 올리지 못하고 만다.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끝내 한천은 숨죽인 울음을 터트린다. 여기에서 붓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데 사용하는 도구인데 이는 세상과 소통하는 수단이다. 심지어 아내와 소통이 되지 않는 비극성을 고조시키는 장치였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전신마비 장애인 한천과 남은 가족의 '내일'에 대해서도 암시를 해줬으면 하는 것이다. 제목이 '내일 또 내일'인데 이는 드라마 주제의 핵심과 닿아있는 부분이지만 결말이 좀 미진했다. 이 드라마에서는 김수철의 <내일>이라는 노래가 일관되게 흘러나오는데 이 노래는 한천이 시상식장에서 아내를 위해 부르기 위해 준비하는 노래이자, 드라마의 주제를 압축적으로 상징하는 노래다. 정작 시상식장에서 한천이 노래를 부를 때 아내는 다른 사람의 차를 타고 떠나가고 만다. 라디오 방송에서는 행수의 사연이 소개되며 노래가 흘러나온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위해 준비한 노래이자 마지막이 될 노래가 될지 모르기 때문에 꼭 방송에서 소개해달라는 내용의 사연과 함께. 여기에서 '내일'이라는 노래는 어떤 형태로든 다른 내일이 열린다는 의미를 던져준다.

하지만 남겨진 한천과 그의 가족들의 내일이 어떠한 지에 대해서는 부각되지 못했다. 장애를 너무 감상적으로 다뤘다거나 남편의 장애 때문에 부인이 다른 남자와 사귄다거나 하는 내용들은 식상한 장치이긴 하지만 이 드라마가 장애인을 이해하는데 역할을 했다.

갑작스럽게 사고를 당해 전신마비의 장애 혹은 여타 장애를 얻게 된 장애인의 심경을 대체적으로 잘 그려 주었다. 장애인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겪게 되는 상황을 이해하게 해준다. 또한 무조건 희생을 강요당하는 여성들의 삶에 대한 성찰을 하게 만드는 계기를 주었다.

출처 : 내일이 모호한 드라마 <내일 또 내일> - 오마이뉴스

TV문학관 <새야 새야>의 감동과 흘려 버린 소리들

06.02.06 19:30 ㅣ최종 업데이트 06.02.06 19:30 김헌식 (codess)

지난해 12월 24일 밤과 1월 31일, 두 번 방영된 KBS TV 문학관 <새야 새야>는 소설가 신경숙의 같은 이름의 작품을 극화했다.

소설 <새야 새야>는 1993년 <문예 중앙> 봄호에 발표되었고 이후 소설집 <풍금이 있던 자리>(문학과 지성사사,1993), <2001 제25회 이상문학상수상집>에 작가 대표작품으로 수록되었다.

<새야 새야>는 청각장애인 가족이 나오는 작품으로, 문단과 독자의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그 이면에 여러가지 생각할 점이 있다. 원작 소설과 달리 드라마는 주인공 형제가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으면서 성장하는 과정을 많이 부각한다. 원작은 앞뒤 전후맥락이 뒤섞여 있는데, 이를 아름다운 영상으로 알기 쉽게 풀어준 것이 TV 문학관 <새야 새야>의 장점이다.

그리고 들을 수 없는 큰놈의 비극성이 강화되었다. 글자를 배우지도 않고, 아이들하고 어울리지도 않으며, 사랑도 떠나보내는 큰놈과 그의 아내 사랑 이야기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원작은 여러 가지 기억과 사건과 성찰이 농축되어 있지만 드라마는 어머니 무덤으로 가는 '작은 놈'의 눈길 여정에 과거의 기억들이 삽입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소설과 드라마의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어머니와 귀가 안 들리고 말을 하지 못하는 아버지. 그리고 이들의 두 아들인 큰놈 작은놈. 아버지는 형님의 집에서 문전박대를 당하고 나서 일가족을 이끌고 철길에 누워죽기로 한다. 그러나 두려웠던 어머니는 두 아들을 이끌고 도망치고 만다.

잠시 행복한 어린시절을 어머니와 보내던 형제, 그러나 그나마 둘을 지켜주던 어머니도 죽고만다. 하지만 말을 하지 못해 죽어가면서도 끝내 어린 아들들에게 이를 알리지 못하고 어머니. 어머니의 최후를 알지 못한 채 너와집 마당에서 구슬치기에 마음이 팔린 '큰놈'과 '작은놈'. 이는 표현의 수단이 없는 이들의 참혹한 파국의 연속을 암시한다.

역시 큰놈과 작은놈은 어머니, 아버지와 같은 장애를 가지고 있다. 큰놈은 아버지와 같이 듣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말하지 못한다. 작은놈은 소리는 듣지만 말을 하지 못한다. 큰놈은 나씨의 도움으로 결혼을 하지만 그의 부인은 다른 남자와 도망가고 만다. 작은놈은 펜팔을 통해 작은 놈에게 호감 가는 여성을 알게 되고 그녀와 편지를 주고받게 된다.

작은놈이라는 이름을 예명으로 알고 호감을 표한 여성은 실제로 작은 놈을 보고는 급히 도망 가버리고 만다. 결국 장애를 가진 사람이기에 다른 이들이 그들을 버린 것이다. 큰놈은 아내가 떠나 가버리고 아내와 추억이 깃든 집을 태우는데 실패하자, 기찻길에 눕는다. 아버지가 그렇게 했듯이 큰놈은 떠난다. 혼자 남은 작은놈은 삶의 목표를 잃고 방황한다.

오갈 데 없는 정신 지체 여성과 함께 그는 어머니의 무덤에 가고 그곳에서 함께 죽음을 맞는다.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는 듯이 무덤 속으로 빠져만 가는 것이다. "숨겨주세요… 숨겨주세요…"는 정신지체 여성의 말이지만. 그것은 정작 큰놈과 작은 놈이 필요한 것 작은 놈은 어머니의 무덤, 작은 놈은 어머니의 무덤에서 말한다. 숨겨달라고. 그리고 땅속으로 숨어버리는 것이다.

여운의 감동적인 장면은 아내를 보내는 장면이다. 큰놈은 다른 사람과 도망간 아내를 기다린다. 가방을 두고 간 아내가 언젠가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그러나 아내는 동생에게 가방을 갖다 달라고 하고 불을 켜놓고 자는 척 하던 큰놈은 동생이 가방을 가져가는 것을 느끼며 자는 척 감은 눈 사이로 물 한줄기를 흘린다. 그리고 울음이 나올까 주먹으로 입에 꽉 문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살아가는 게 슬픈 생각이 든다. 당신도 그러겠지만 슬퍼도 당신은 그에 버금가는 힘을 가졌으면 한다. 이 돈으로 기차를 타고 먼 데루 가라. 그리고 행복하여라."

대개 영화나 드라마에서 장애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낸다. 희생과 헌신의 존재이자 순교자인 것이다. KBS 드라마 시티의 <내일 또 내일>이라는 드마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천은 아내의 삶을 위해 떠나보내는 전신마비 장애인이었다.

전체적으로 평하자면, <새야, 새야>의 배경은 60~70년대로 순수성을 나타내는 풍광과 함께 청각 장애인들의 사랑이 중심이라는 점에서 이채롭다. 산골마을의 풍광과 특히 설원의 모습은 시청자의 눈길을 잡아두기에 안성맞춤이다. 어떻게 보면 장애를 가진 형제의 사랑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수작이다. 말 하지 못하는 형제의 언어 표현, 소리의 문제를 세밀하게 그려준 것은 의미가 있다.

큰놈과 작은놈으로 대변되는 이들이 외부의 개입으로 일종의 쫓김을 당하고 파괴되는 순수한 영혼들의 모습을 그렸다. 형수, 펜팔, 서커스, 기차가 그 상징이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들의 내적 동일성을 해치는 외부의 소리를 상징하는 것들인지 모른다.

큰놈의 아내, 그녀는 평소 "평생 이렇게 살 거예요? '배고프다' '졸리다'와 같은 말 말고요, 나는 당신하고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요"라고 말한 데서 전적로 드러난다. 다만, 대화란 무엇인지 소리의 의미가 무엇인지 좀 더 성찰하는 계기를 더 마련해 주었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콩이 싹트는 소리, 바람소리, 개울물 소리, 씨감자 눈뜨는 소리, 칡뿌리가 나무뿌리를 휘감는 소리가 큰놈에게 무슨 의미를 주는가.

“기차는 무슨 소리를 내지?”

“과거로부터 도망치는 소리.”

그들은 결국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죽음에서 빛을 본다. 그들이 말을 하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죽음에서 빛을 본 것이다. 되새길 것은 있다. 현실에서 많은 장애인들은 그렇다고 생을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입의 말은 비장애인들이 여기는 유일한 표현 수단이겠지만 그들은 그들의 표현 수단을 통해 잘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새야, 새야>에는 비장애인이라는 사람들의 감상적 시혜, 연민주의가 배어 있기도 하다.

흔히 장애인들을 등장시키는 드라마들의 특징은 그들을 감동의 수단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결국 <새야, 새야>에서 큰놈과 작은 놈은 물론 정신 지체 여성도 사랑이라는 감상적 여운 속에 죽는다. 현실의 능동적 감동은 없고 순수한 사랑의 외투를 쓴 패배적 자학적 감동이 강하다. 아마도 장애인들이 이 드라마를 보고 얼마나 감동을 느낄지는 의문이다. '숨겨준다'는 의미는 아름답지만 퇴행으로 보인다. 비극적 자학의 감성적 완결이라는 신경숙 작품의 한계를 그대로 노정시켰다.

요컨대, 죽음을 통해 행복한 나라로 어머니와 형이 있는 즐거운 곳으로 간다는 결말에서 보면 슬프고도 아름다워 보이지만 동심의 어머니 품으로 퇴행하는 것은 아닌지. 어떻게 보면 장애인들이 살아가기에 버거운 공간이 현실이라는 점은 공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언제나 불행한 존재로 현실 감동을 이유로 패배적인 부적응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되돌아 볼 일이다.

출처 : TV문학관 <새야 새야>의 감동과 흘려 버린 소리들 - 오마이뉴스

정신지체장애인에게도 '자의식'은 있다

KBS <안녕하세요, 하느님> '하루'의 모습이 그대로였으면...

06.01.17 20:13 ㅣ최종 업데이트 06.01.18 11:08 김헌식 (codess)

ⓒ KBS

대형 스타도 없고 재벌2세나 신분상승, 혹은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자극도 없다. 불륜이나 삼각관계를 통한 식상한 경쟁의 구도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오필승 봉순영>의 작가 강은경과 지영수 피디가 1년여의 고심과 작업 끝에 내놓은 <안녕하세요, 하느님>의 특징이다.

정신 지체 장애인 하루 역을 맡은 유건은 데뷔 작품에서 풋풋하면서 진솔한 연기를 펼쳐 보이고 있다. 정신 지체 장애를 가져 지능지수 65인 하루가 수술을 받고나서 180의 천재소년이 된다는 내용이다. 드라마는 갑작스럽고도 황당한 이러한 과정의 미비점을 보완이라도 하려는 듯이 학습의 과정을 끼워놓고 있다.

애초에 수술을 받게 되는 이유는 서은혜(김옥빈 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지능이 높아지면 성공하고 성공하면 서은혜와 사랑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물론 드라마는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오필승 봉순영>에서 오필승(안재욱 분)이 재벌가의 후계자에 올랐다가 다시 서민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뒤늦게 인생의 의미를 깨닫는다는 동일한 교훈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어떤 방식으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장애를 가진 상태에서도 충분히 사랑이 가능하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간 드라마에서 장애인의 사랑을 충분히 다루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이 드라마가 순수한 사랑과 삶의 의미를 내포하려고 고심한 흔적이 보이는데 다만, 정신 지체 장애인을 다루는데 몇 가지 더 고려해야할 점이 있어 보인다. 장애인의 삶을 지나치게 불행하고 비참한 것으로 그리고 있다. 하루의 삶은 연민을 일으키고 시혜의 대상으로 보게 만든다. 그러나 장애를 가지고 즐겁고 훌륭하게 사는 이들은 많다는 점이 간과된다.

두 번째,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항상 그렇듯 이 드라마 역시 정신 지체 장애인을 순수하고 밝게만 그리고 있다. <웰컴투 동막골>에서 여일(강혜정 분)은 정신 지체 장애자인지, 정신분열증인지 구분이 안 되었다. 그러나 역시 정적인 순수한 인물로 등장했다. 현실에는 <안녕하세요, 하느님>의 하루같은 정적인 정신지체 장애인뿐만 아니라 동적 흥분형 장애인도 있다. 이렇게 밝게만 웃음 짓는 존재로 나오는 것은 선한 사람으로 그린다는 점에서 비판의 화살은 피할 수 있지만 한 가지 캐릭터로 장애인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줄 염려가 있다.

세 번째, 장애인에 대한 좀더 배려있는 묘사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현금자동지급기와 실제 사람을 착각하는 묘사는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다. 3회에서는 좀 더 심각한 장면이 등장했다. 박동재(김성수 분)는 의사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말한다. "수술을 받으면서 자의식이 생기고 자의식이 생기면서 불만과 불평이 생기는 거야. 그러면서 자신의 요구를 상대방에게 각인시키려고 말을 하지 않지."

이 말은 아이큐 65의 3급 장애인은 자의식이 없다는 말이다. 지능지수 65의 청년이 자의식이 없을까? 지난 15일 KBS 스페셜 <마음>은 오랑우탄 침팬지에게도 자의식이 있다는 점을 일본 연구소의 몇 십 년에 걸친 실험을 내용을 통해 상세하게 다루었다. 드라마대로라면 하루가 침팬지만도 못하다는 셈이 된다. 침팬지와 비교 이전에 당연히 자의식을 지능지수 65에 3급 장애인은 자의식이 있다.

<안녕하세요, 하느님>엔 그동안 한국드라마가 보인 고질병들을 털어 버리려 한 노력의 흔적이 많이 보인다. 또한 장애인의 사랑을 주제로 삼았다. 하지만 장애인 그대로의 사랑을 중심에 두고 있지는 않다. 수술 후 대폭 지능이 증가한 하루의 천재적 삶과 성공이 더욱 도드라질 태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때 결론에서 '겪어보니 서민의 삶'이 더 좋았다는 <오필승 봉순영>과 같은 방식으로 '장애인 시절이 좋았다'며 끝맺음 된다면 섭섭하기 이를 데 없다. 장애인의 일상과 내면이 상대적으로 주변부로 밀려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장애인 그대로의 모습으로 직업을 가지고 꿈을 향해 열심히 달리면서 사랑을 이루어가는 청년, 하루의 모습이 더 부각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생긴다.

덧붙이는 글 | kbs <내일은 푸른 하늘>에서 말한 내용을 부분 정리한 글입니다.

출처 : 정신지체장애인에게도 '자의식'은 있다 - 오마이뉴스

뇌수술로 지능이 65에서 180이 된다고요?

[주장] KBS 드라마 <안녕하세요, 하느님>를 보고

06.01.13 18:35 ㅣ최종 업데이트 06.01.13 18:35 김헌식 (codess)

KBS가 지난 9일 새롭게 선보인 2TV 월화드라마 <안녕하세요, 하느님>은 지능장애 청년을 통해 순수한 사랑을 드러내려 했다. 드라마의 제작 의도는 지능지수 65의 청년이 뇌수술을 통해 180이 넘는 천재의 능력을 지니게 되고 이제까지 누려보지 못한 성공을 누린다는 설정을 통해 행복과 성공의 의미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가능한지도 의문이거니와 여러 가지 편견을 줄 요소가 있어 보인다. 우선 인물과 줄거리를 살펴보고 더 생각해야 할 점들을 정리해 본다.

우선 <안녕하세요 하느님>에는 세 인물 '박동재', '서은혜', '하루'가 등장한다. 박동재(이종혁 분)는 뇌 전문의로 지능 발달 장애인(정신지체아)을 일약 천재로 만들 수 있다는 자신의 가설을 증명하려 한다. 서은혜(김옥빈 분)는 본업이 사기 전문인 27세의 여성이고 하루(유건 분)는 3급 장애 판정을 받은 정신 발달 장애 청년이다.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서은혜는 한강수와 투자사기를 저지른다. 한강수는 서은혜를 따돌리고 돈을 챙겨 달아난다. 그러자 서은혜는 한강수의 아들이 있다는 지방(춘천)으로 내려간다. 버스 안에서 특수학교 임시직 교사로 부임 받아 내려가는 '한 선생'과 옆자리에 앉는데 한 선생은 무료한 터라 자신이 특수학교에 한 달 간 임시로 부임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버스는 사고를 내고 전복된다. 이때 하늘병원 뇌신경외과에 새로 부임하던 박동재가 그 옆을 지나가게 되고 서은혜는 사고 난 버스에서 빠져나와 사고를 알리면서 정신을 잃게 된다. 이로써 서은혜와 박동재가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이다. 하루는 새로 오는 선생님을 터미널에서 기다리지만 못 만나게 된다.

병원에서 다시 만난 박동재와 서은혜. 박동재가 서은혜에게 직업을 묻는데 사기꾼이라고 대답할 수는 없는 법. 얼떨결에 한 선생이 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특수학교 임시 교사라고 말한다. 다친 한 선생 대신에 서은혜는 가짜 선생님 행세를 하게 되고 하루는 병원에서 그녀를 진짜 선생님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차츰 서은혜를 사랑하게 되는데 하루는 한강수의 아들이다.

한편 하늘병원과 박동재는 박동재의 가설의 실험 대상으로 하루를 찍어두게 된다. 하루는 똑똑하고 능력 있는 남자를 선생님이 좋아할 거라는 박동재의 말에 수술에 동의하게 되는데 즉, 사랑하는 여선생님을 위해 자신이 똑똑해지고자 수술을 받으려는 것이다.

현재 드라마에서 나타나는 점은 정신지체인을 지나치게 착하고 순수한 관점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반드시 지능이 낮다고 착하고 순수의 관점으로만 볼 수 없는 데도 많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이러한 형에 의존한다. 이는 정신지체인에 대한 편견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무엇보다 뇌수술을 통해 아이큐가 증가한다는 것 자체가 비과학적이다. 또한 아이큐의 증가가 성공과 부를 보장한다는 식의 설정은 너무나 뜬금없다. 즉, 뇌수술→지능 증가→성공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성공은 지능보다 오히려 감성, 그리고 피나는 노력과 경험에 의거한다는 게 더 현실적이다. 또한 한 사람의 뇌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힘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한편 여러 가지 맞지 않는 장면도 나온다. 1회에서 지능지수 65, 정신연령 7세의 3급 장애인인 하루가 자신이 항상 살아온 지역의 터미널에서 나가는 곳과 들어오는 곳을 구분하지 못한다.

2회에서는 현금자동 지출기와 사람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현금 자동지급기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나오니까 돈을 달라고 계속 카드를 들이댄다. 기계의 여성 소리와 사람 목소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하루가 계속 돈을 기계에 대고 돈을 달라고 하자, 이를 본 은행직원이 경찰에 신고한다. 기계음과 실제 사람 목소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

1회에서 박동재가 서은혜에게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야단맞을 말인지도 모르는 장애인"이라고 하면서 너무 다그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지능이 65 정도이면 경도(moronity)의 수준이므로 그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다.

또한 박동재는 정신지체인의 삶이 비참한 것이라고 하면서 뇌수술을 받아 천재가 되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또한 드라마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하루의 삶이 불행한 것으로 그린다. 지능보다 삶의 가치와 태도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임을 강조하는데 드라마는 아직 역부족이다.

이처럼 드라마 대사 중에는 장애인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줄만한 말이나 편견이 드러나고 있다. 본격적인 뇌수술 장면 등 이후 연출은 이러한 편견을 강화하는 쪽으로 이루어지지 않아야 한다.

출처 : 뇌수술로 지능이 65에서 180이 된다고요? - 오마이뉴스

장애인들은 왜 '프라하의 연인'에 열광하나

05.11.11 09:07 ㅣ최종 업데이트 05.11.12 17:38 김헌식 (codess)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 초기, 환호성을 지른 이들 중에는 장애인들도 있었다. 전도연이나 김민준, 김주혁의 사랑 구도 때문만은 아니었을 듯싶다.

마빈 해리스는 "가슴을 가리면 가슴이 더 보고 싶어진다"라고 했다. 장애인을 애써 구분지으면 지을수록 그것은 오히려 장애인에게 해로운 것이 된다는 것도 같은 역설이다. 규정하고 구분하고 분별할수록 미혹에 빠진다는 선가(禪家)의 가르침도 이와 관련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사람은 육체적, 정신적, 정서적, 도덕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육체적, 정신적으로 부족한 부분 때문에 장애인이라고 규정하여 배제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도덕적으로 마음의 장애가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또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누구에게나 장애는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장애인이 아니라 '불편인'이라는 단어를 만들자는 사람도 있다. 장애가 아니라 눈이 나빠서 불편하고, 다리가 불편할 뿐이라는 개념이다. 그러나 불편없이 사는 장애인도 많다. 장애를 불편이나 장애로 여기지 않는 경계인 셈이다. 장애인들이 바라는 것은 장애인에 대한 규정과 그에 대한 시혜가 아니다. 장애인, 비장애인을 구분하지 말고 동등하게 대하기를 바란다.

이 경계의 비구분, 동등성이 <프라하의 연인>과 관련 있다.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을 보고 장애인들이 환호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서윤규(윤영준)라는 장애인 때문이다.

장애우권익연구소 미디어비평 글쓰기 팀에 따르면 이렇다.

서윤규는 최초로 직업을 가진 장애인이다. 그것도 외교관이다. 그동안 수많은 드라마에서 장애인은 집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거나 특정한 직업이 없는 사람이었다. 갈등의 제공자이거나 무능력자로 비쳐졌다. 여성은 항상 남성이 도와주어야 하는 청순가련형 인물이었다. 또 장애인은 언제나 동정심과 시혜를 받아야 하는 인물이었다. 그럴 때 비장애인과 장애인은 만족하고 좋은 프로그램이라는 인식에 부합했다. 그러나 서윤규는 그간의 장애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외교관으로서 주인공 윤재희(전도연)의 친구이자 든든한 배경이 된다. 또 이 드라마에서는 애써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도드라지게 하지도 않았다.

물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어서 문화평론가 김원씨가 지적했듯이 서윤규는 사랑을 할 수 없는 무성의 존재로 등장한다. 더구나 남성 장애인이 직업을 갖기까지 이렇게 오래 걸렸는데 여성장애인이 드라마에서 직업을 갖는 데는 얼마나 오래 걸릴지 의구심이 일기도 한다.

한편으로 짚어볼 문제는 대중문화의 냄비가 식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진호, 말아톤, 배형진, 초원이, 클론, 박대운. 지난 한해 장애인이라는 수식어로 방송미디어를 채운 인물들이나 이미지들이다. 그러나 이미 사라졌거나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오히려 여일과 같은 희화화된 장애인 이미지만이 남은 것은 아닌지. 또 한때의 유사 개별화였는지 우려스럽다. 다만, 여기에서는 서윤규가 의미하는 바를 이후 드라마들이 계속 잇거나 진전시켜야 할 필요성이 충분하기에 흔적을 남길 필요가 있었다.

다가오는 연말, 불우이웃이라는 이름으로 장애인을 시혜나 동정의 대상으로만 그릴까 우려스럽다. 경계의 비구분, 시혜나 동정의 대상을 넘어야 할 터이고 같은 오류를 반복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바람직하지 않다.

출처 : 장애인들은 왜 '프라하의 연인'에 열광하나 -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