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소문의 덕을 톡톡히 본 영화 '덕혜옹주' 스틸컷.ⓒ 롯데엔터테인먼트
광복절이나 삼일절에 맞추어 일제시기 관련 영화가 등장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특수한 시점에 관계없이 관련 영화가 제작되는 어쩌면 특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더구나 특이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일제 시기 소재를 다룬 영화들은 참패를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실패한 이유는 대의 명분에 충실하거나 너무 스타일리시했기 때문이다.
대의 명분에는 독립운동이나 비분강개가 중심 정서로 자리를 잡는다. 이런 대표적인 영화는 '도마 안중근'(2005)으로 5만명의 관객 동원에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물론 독립영화가 아니었다. 스타일리시하다는 것은 당시의 문화사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단지 그 시대의 트렌드나 풍물을 보기 위해 영화 관람을 선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예컨대, 영화 '라듸오데이즈', '모던보이', '해어화'가 여기에 속할 수 있다.
일제시기 마지막 호랑이를 다룬 '대호', 일제 상류층의 속살을 헤집은 영화 '아가씨'는 물론이고 마지막 옹주를 담아낸 '덕혜옹주'는 물론이고 '밀정', 그리고 '군함도'도 대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일제 강점기 코드의 영화가 본격적으로 쏟아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단지 영화 '암살'이 천만관객을 넘어섰기 때문일까. 이미 그러한 움직임은 영화 '암살'이전에 시작되었다.
우선, 대중 상업영화의 복합장르화가 일제강점기 코드를 소환하고 있다. 일제시대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액션, 추리 스릴러, 멜로 등등 장르 영화들이 융합할 수 있다. 일제시기는 폭력과 전쟁이 난무하였기 때문이다. 억압과 통제, 그에 대한 저항과 자유 쟁취는 현대적인 상황과 맞물릴 수 있다. 더구나 현실의 답답함은 누군가 책임지워야 할 대상을 필요로 하게만든다. 그것이 대중상업영화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책임지워야할 나쁜 놈은 일제시대처럼 명확한 때도 없다.
일제 강점기는 오락 영화에 필요한 선악의 이분법이 분명하다. 대중상업 영화는 오락적인 요소는 물론이고 나쁜 놈과 좋은 놈이 명확하게 갈릴수록 좋다. 그렇게 할수록 이해와 기대감이 분명해 지기 때문이다. 이런 전통적인 서사 전개는 한국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여기에서 나쁜 놈은 일본인 특히 군국주의자들이 된다. 한국인들은 그러한 일부인 군국주의자들에게서 고난과 핍박을 받는다. 이 때문에 그들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거나 공격을 감행하여 성공을 거둘 수록 좋다. 통쾌하다. 현실은 그렇지 못했고, 그러지 못하기 때문이다.
등장하는 인물들이 과거의 영화들처럼 반드시 독립운동을 필요는 없다. 사필귀정의 잘못을 되돌리는 일도 가능할 수 있다. 여기에서 군국주의자들은 단지 일제 시대 자체에만 머물지 않는다. 지금 현재 관객들을 괴롭히는 모든 존재들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국제 정세 측면에서 일본의 군국주의 재무장은 현실과 분리되지 않아 보인다. 영화 '귀향'에서 다뤄내는 현실은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
그것은 앞으로도 청춘의 현실과 맞닿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유형의 영화들에 청춘들의 선택이 가해지기도한다. 영화 '동주'에 나오는 윤동주를 통해 부각되는 청춘의 방황과 고민은 이 시대 청춘들의 현실이다. 그 청춘의 관점에서 영화 '귀향'도 자유롭지 못하다. 일제에 위안부로 끌려간 이들은 모두 청춘들이었고, 영화 '군함도'에 나오는 징용자들도 청춘들이었다. 독립운동에 나선 이들이 청춘이 아니었다면 가능했을까.
무엇보다 집단적인 가치보다는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우선하고 그에 부차적으로 국가적 사회적 가치를 녹여내는 것이 특징이다. 영화 '암살'에서나 영화 '귀향'에서는 개인의 자유의지와 함께 가족이 융합하고 있었고, 영화 '동주'에서는 개인의 꿈이 일제강점의 현실에 저항하고 있었다. 영화 '덕혜옹주'는 개인의 자유박탈과 이를 극복하려는 고군분투에 초점이 맞춰졌다.
일제 36년은 상당히 긴 시간이고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영화에서 다양하게 다뤄내지 못한 측면이 있었다. 그것은 역사적인 사실과 가치에 전적으로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90대 10퍼센트의 법칙이 새롭게 통용되고 있다. 대중적인 요소가 90퍼센트이고 진지한 메시지는 10퍼센트 결합하는 방식이 흥행을 견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현대인들이 고민하는 화두들이 하나 둘씩 투영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일제시대 코드만 다룬다고 해서 영화가 자동적으로 흥행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 시대가 아니면 안되는 소재와 스토리 이어야 한다. 단지 제작자가 자신의 세계관을 위해 일제 시기를 차용하는 수준이거나 고증의 재연에만 머문다면, 제작비의 상승을 통한 스크린 지배라는 오명만을 남길 가능성이 많다. 이런 제작비의 상승과 거리를 두며 영화 '동주'나 '귀향'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시대적인 흐름을 관통하는 진실과 진정성이었다. 그것이 오늘은 물론이고 미래에도 통한다는 것은 기쁘면서도 슬픈 일이기 때문이다.
글/김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