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하지만 여전히 낯선 섬, 독도
[서평] 주강현의 <독도 견문록>
익숙하지만, 낯선 경우가 종종 있다. 익숙할 수록 오히려 익숙하지 않을 때도 많다. 낯선 것은 오히려 그것에 대해 알려고 노력해 잘 알겠지만, 익숙한 것일 수록 모르게 될 뿐이다. 수십 년 같이 항상 옆에 있던 배우자는 익숙하지만, 막상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럴 때 배우자가 누구인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그냥 내 아내, 남편 혹은 누구엄마, 아빠로 칭할 뿐이다. 오히려 바깥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더 많이 아는 아이러니.
독도도 익숙하지만, 막상 알고 있는 내용이 없다. 자신이 없다. 누군가 물어볼 때면 그냥 우리 섬이라고 말할 뿐이다. 일본이 자기 땅이라고 떼를 쓴다면, 더욱 우리네 땅이라며 격분으로 죄의식을 스스로 사한다. 하지만 정작 독도는 더욱 익숙하지만 낯선 섬이 된다. 바깥에서 지켜본 이들이 더욱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 혹은 오히려 진정한 가치는 다른 이들이 더 아는 것이다.
‘견문’은 보거나 듣거나 하여 깨달아 얻은 지식을 말하며, ‘견문록’은 그 지식을 기록문이다. 견문록은 익숙해 잘 아는 것보다는 낯설어 잘 알지 못하는 풍광에 대해서 적는다. 주강현의 <독도견문록>에 익숙한 독도에 견문록이라는 단어가 붙은 것은 바로 익숙하여 잘 알고 있을 듯싶은 독도가 사실은 우리가 낯설고도 잘 알지 못하는 대상임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가 독도에 잘 알고 있다면 많은 양을 할애하며 <독도견문록>을 출판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알아야 사랑하고 사랑하면 논리를 세우기도 용이해진다.
유길준의 <서유견문>을 생각해보면 자세한 해설서를 연상하게 마련이다. 그 나라에 대해서 처음 소개시켜주는 것이니, 자신이 보고 들은 내용을 너무나 소소하게 설명한다. 주강현의 <독도견문록>은 사실 자신에 대한 뒤늦은 관찰인지라 어떻게 보면 부끄러운 견문록이 된다. 독도에 익숙한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데, 다만 그 설명 과정은 학제 간 연구의 성과에 토대를 두고 있다. 해양학, 생물학, 역사학, 민속학, 지리학을 망라하면서 독도에 대한 지식을 종합하고 있다. 여기에 각종 연구서와 보고서, 과학적 데이터는 물론 많은 매체 보도 자료를 곁들인 점이 장점으로 꼽힌다. 자료적으로 이렇게 대중적으로 풍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울릉도를 포함한 독도는 단순히 견문과 지식의 매트릭스에 갇히지 말아야 한다. 그동안 많은 학술 연구들이 감정의 영토적 개념에 갇혀서 현실의 삶을 탈색시키는데 치중해버리면서 정작 독도를 소외시켰다. 사실 그 섬은 인간의 땅이었다. 독도는 삶의 투쟁 공간이었다. 굶주림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피워낸 인간의 역사였다. 수많은 이들의 땀과 피가 어우러져 있는 시공간인 것이다. 문화는 인간의 땀과 피의 응축이다. 그래서 독도는 하나의 문화다. 사람의 흔적인 문화적 관점을 배제한다면, 그 의미를 올곧이 찾기 힘들다. <독도견문록>은 필자의 14번의 탐방으로 이러한 점에 초점을 두었다. 고대와 현대가 교차하고 해양과 대륙이 휘감아 돌아간다.
하지만 <독도견문록>은 <울릉도 견문록>으로 바꾸어야 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이 울릉도에 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울릉도에 할애한 이유는 독도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고, 역사의 기록이 모두 울릉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다만, 독도 자료가 부족하기 보다는 울릉도를 통하지 않고는 독도 문제가 풀리지 않는 점 을 필자도 밝히고 있다.
세밀한 풍광과 역사의 교차는 영토적 측면에 모아지는데 논지는 간단하다. 독도는 울릉도 천부동 석포에서 보이는 섬이다. 시네마현 오키 제도에서 독도는 보이지 않는다. 오키 제도와 독도의 거리는 159㎞, 울릉도에서 독도까지는 88㎞다. 이동성의 발달이 뒤진 과거로 갈수록 인간의 육안은 영토적 개념을 획정하는데, 결정적일 수밖에 없다. 이는 국제법상 실효 지배의 근간이 되는데 유리하다.
이렇듯 이 책은 단순성에 따라 핵심 논리를 구성한다. 예컨대, 1878년(고종 15년) 울릉도 개척령 이전까지 공도 정책 추구는 조선 땅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남의 땅에서 공도 혹은 수토를 집행할 수 없다. 실효 지배의 증거인 것이다. 또한 오타니 가문 등이 1618년 에도 바쿠에게서 독도 도해(渡海)면허를 받은 것 자체가 다른 나라 영토임을 인정한 것이다.
도해 면허가 다른 국가의 영역을 가도 좋다는 허가기 때문이다. 명칭에 대한 논란도 마찬가지다. 돌섬이 당시 울릉도에 대거 진출했던 전라도 사투리로 독섬이 되고, 다시 독섬은 다시 한자로 독도가 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제 해양법은 해양 제국주의가 만들어 놓은 법이므로, 법리상으로 한국에 대한 우호적인 입장을 기다리는 것은 난센스라고 주장할 법하다. 이외에도 일련의 일본 자료를 통해 일본의 논리를 간단하지만, 뼈아프게 반박한다.
미세한 부분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독도영유권 이전에 일본의 강치 남획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과거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없을 때 그들의 생태학적 위해는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물위의 동도와 서도만이 아니라 바다 밑의 해산도 넓은 관점에서 드넓은 영토의 개념으로 보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 무엇보다 독도의 실효 지배 위에 해양제국주의의 충돌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도 잊을 수 없게 한다.
다만, 해양 제국주의 전쟁의 이면은 경제 전쟁의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잊을 수는 없다. 독도 앞바다는 문화전쟁터이자, 결국 경제 전쟁의 전장이며 정치와 정부는 전위라는 점을 부각할 필요는 있다. 아울러 문헌과 연구자료, 매체에 실린 다양한 자료와 직접 찍은 사진들이 풍부하게 담겨 있지만,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너무 많이 담으면 오히려 담은 것이 적게 된다. 없던 국민교양교과서를 지향했기 때문에 내용을 총망라한 탓이다.
영상다큐멘터리가 해야 할 일을 한권의 책이 감당하기 버거움이 있기 마련이다. 여전히 다른 견문록답게 나그네 시각에서 감수성 논지에 충실하다. 더구나 현재 사람들의 육성보다는 자연 지물 자체에 머문 감이 크며, 미래보다는 과거에 더 매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무엇보다 독도에 대한 폭넓은 학제 간 연구는 결국 세계 바다 속에서 본 독도가 아니라 우리의 시야에서 본 독도에 머물고, 일본과 한국 사이의 바다만이 존재한다. 내 시야가 너무 강할 때, 여전히 그에 대해서 모를 수 있다. 여전히 독도는 익숙하지만, 낯선 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