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장훈 / 주연 송강호 강동원/ 개봉 2월4일
‘의형제’는 혈연이 아니라 인연으로 형제가 되는 두 남자의 이야기다. 타고난 형제도 같은 수 없거늘 두 남자는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 없다.
형인 이한규는 전 국정원 요원. 시내 총격전 사건으로 파면당한 뒤 도망간 베트남 신부들을 찾아주는 흥신소 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한다. 머리보다 몸으로 현실에 순응하는 스타일로 적당히 겁 많고 적당히 무식하며 적당히 사기도 칠 줄 안다. 이따금 배짱도 퉁긴다.
반면 동생인 송지원은 남파공작원. 김정일의 친인척을 암살하려다 배신자로 오해를 사 남한에 홀로 버려진 후 막노동일을 하며 살아간다. 북한 엘리트 출신으로 문무를 겸비했지만 어떻게든 사람을 다치지 않으려 하는 진지한 휴머니스트다.
두 사람은 이한규가 파면당하고 송지원이 버림받은 그 사건 현장에서 처음 만난다. 그리고 6년 뒤 두 사람은 사장과 직원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 공사판에서 송지원을 알아본 이한규가 간첩단을 일망타진해 현상금을 탈 요량으로 동업을 제의한다. 송지원 역시 이한규에게 접근해 국정원에 포섭된 진짜 배신자를 찾아내고 북으로 돌아가기 위해 제의에 응한다.
두 사람의 차이는 이한규를 연기한 송강호와 송지원을 연기한 강동원이라는 배우를 통해 한 순간에 육화된다. 두 배우는 생김새부터 다르다. 푸짐하고 넉살 좋은 아저씨 같은 송강호와 송강호의 반밖에 되지 않는 듯한 작은 얼굴과 길고 날씬한 몸매에 늘 별 말이 없어 보이는 강동원은 보기만 해도 이질적이다.
2008년 데뷔작 ‘영화는 영화다’로 호평받은 장훈 감독은 전작에서와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처지의 두 남자가 얽히고 설켜 묘한 동질감을 느끼는 과정을 그리고자 했다.
한규와 지원 두 사람에게도 묘한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조직으로부터 용도폐기 되었고 그 원인제공자인 상대방을 이용해 재기를 노린다. 그러다 상대가 자신과 같은 처지라는 것을 깨닫고 연민을 느끼기 시작한다. 가족이 있으면서도 만날 수 없다는 점에서도 동병상련이다. 게다가 겪으면 겪을수록 절대 배신은 하지 않는다는 의리까지 닮았다.
두 사람을 따로 떼어 놓고 보면 송강호와 강동원은 각자의 캐릭터에 더할 나위 없이 충실하다. 이미 여러 편의 영화에서 수없이 봐왔음에도 불구하고 송강호의 현실적인 코믹 연기는 볼 때마다 압권이다. 웃기려고 해서 웃기는 게 아니라 보고만 있어도 실소와 폭소를 자아내는 그의 지극히 일상적인 모습은 비슷한 경력과 이름값을 가진 다른 남자 배우들과 달리 식상함을 줄줄 모른다. 어느 누가 그 배역을 저만큼 연기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데뷔 때부터 만화 속에서 빠져 나온 듯한 외모로만 주목받았던 강동원 역시 다양한 장르를 소화해낸 8년차 배우답게 이제는 스타의 포스와 수준급 연기를 겸비했다는 느낌이다. 최고의 연기라고는 할 수 없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가능성을 어떻게 하면 끌어내고 활용하는지 분명히 감을 잡고 있는 듯하다. 그런 점에서 그 역시 또래 청춘스타들 중에서도 한 단계 도약한 소수에 속한다.
송강호와 강동원을 캐스팅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일단 성공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장훈 감독은 두 사람의 관계를 전작만큼 농밀하게 진행시키지 못했다.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 매끄럽고 자연스럽다기보다는 돌발적이고 인위적이다. 관객이 두 사람의 변화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보다 머리로 이해하도록 만든다고나 할까.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두 사람을 둘러싼 사건이 남과 북의 대립, 살인과 총격전 같은 거대한 에피소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극적인 사건으로 인연을 맺게 된 두 사람의 감정이 무르익어 갈 무렵(혹은 아직 무르익기도 전에) 다시 너무나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갑작스레 모든 것이 달라져 버린다.
두 사람이 의형제가 되는 ‘순간’보다는 ‘과정’에 좀 더 집중했더라면 훨씬 더 재미있는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김지영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213호(10.02.0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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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 영화]인간애는 이데올로기보다 진하다
ㆍ<의형제>“일본에 가면 ‘한국영화는 왜 이렇게 힘이 있냐’는 질문을 꼭 받아요. 제 대답은 한국은 역사도 고난스럽고 남북이 갈려 강대국 사이에서 정치·경제적 영향을 받는 복잡다단한 사회이기 때문에 영화적으로도 역동적일 수밖에 없다는 거죠. <남극일기> 찍으러 뉴질랜드에 갔을 때 걱정없이 자연과 벗삼은 풍경을 보면서 “여기선 대체 무슨 영화를 찍나”하는 의구심이 들더라고요.”(송강호, 2006년 <씨네21> 인터뷰)
일상의 디테일에서 영화적 성찰과 오락의 소재를 건져내는 일본 영화에 비해 한국 영화는 대체로 선이 굵고 역동적이다. 한국 영화인들이 발을 딛고 서 있는 정치적·사회적 토양이 영화의 서사에 현실의 중력을 부여함으로써 현실과 허구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을 스크린에 불어넣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영화다>로 데뷔한 장훈 감독의 두 번째 영화 <의형제>는 분단 상황이라는 한국적 소재를 완성도 높은 시나리오와 빈틈없는 연출력으로 담금질한 작품이다.
<의형제>는 두 주인공의 앙상블이 영화의 성패를 가름하는 버디 무비다. 분단 상황은 대립적인 캐릭터의 갈등과 화해, 강력한 힘을 지닌 공동의 적, 액션과 코미디의 조화 등 성공적인 버디 무비의 요건을 자연스럽게 배치할 수 있는 안정적인 배경으로 작용한다.
국정원 직원 이한규(송강호)는 남파 간첩 송지원(강동원)을 잡으려다 실패하고, 6·15 남북정상회담 후 불어닥친 국정원 구조조정 때 조직에서 쫓겨나 변두리 흥신소의 사장이 된다. 송지원의 신세도 처량하긴 마찬가지다. 그는 당으로부터 존재조차 잊혀진 채 공장에서 받는 월급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당대 한국 사회의 현실이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매개로 작용하는 지점은 또 있다. 결혼 또는 불법체류라는 과정을 통해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존재가 그것이다. 이한규의 흥신소가 하는 일은 궁벽한 시골에서 도망친 베트남 신부의 소재를 파악해 한국인 남편에게 알려 주거나 인계하는 것이다. 이한규와 송지원이 6년 만에 다시 만나 동거동락하는 계기를 제공하는 장소 또한 베트남 이주노동자들이 일하는 공장이다.
이한규와 송지원은 첫 대면에서 상대의 정체를 알아보지만 그 사이에 바뀐 신분까지 알아채지는 못한다. 이한규는 간첩단을 잡아 한몫 챙기기 위해, 송지원은 당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흥신소 일에 힘을 합친다.
상업영화로서 <의형제>가 지니고 있는 장점은 분단이 남과 북을 쪼개 놓고 자본주의가 내국인과 이주노동자를 갈라놓는 우울한 현실을 ‘재미’와 ‘감동’이라는 흥행 코드로 녹여 내는 능란한 화술이다. 이질적인 배경과 성격의 두 사람이 함께 일하면서 생기는 부조화는 곳곳에서 코믹한 상황을 연출한다. 도망친 베트남 신부들을 찾아 헤매는 길에 마주치는 시골 풍경은 점점 커져가는 둘 사이의 인간적 공감대를 보여 주는 시적 배경으로 작동한다. 암살자인 ‘그림자’의 존재는 영화에 스릴러의 긴장감을 제공한다. 이데올로기 장벽이 인간적 공감의 열기 안에서 마침내 용해되는 장면에선 찡한 감동이 기다린다. 장 감독은 자칫 상투성의 함정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이 같은 요소들을 시종일관 긴장감 있게 이어 나가면서 탁월한 완급 조절력을 보여 준다.
송강호의 빼어난 연기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코믹함과 진지함 사이를 이음매 없이 오가며 어떤 인물에든 현실의 질감을 입히는 데서 그의 오른편에 나설 배우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강동원 또한 화려한 비주얼이 연기를 압도하지 않는 적절한 균형점을 찾은 듯하다.
1월 19일 시사회장을 찾은 관객들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 박수를 보냈다. 한국 영화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는 수작이다.
2월 4일 개봉.
생계형 간첩 vs 생활형 전직 국정원 요원
[한겨레21]
같으면서 다른 두 ‘극우’의 만남… 송강호·강동원 주연, 장훈 감독의 <의형제>
극과 극은 통한다. 여기 두 명의 남자가 있다. 둘은 다른 듯 똑같다. 가족을 제쳐두고 긴박하게 일한다. 암호를 통해 실체를 확인한다. 그러나 둘은 한참이나 다르다. 서로가 적이다. 한 명은 남파간첩(강동원·지원 역)이고, 다른 한 명은 국정원 대공3팀 요원(송강호·한규 역)이다. 그런데 둘은 순식간에 같은 위치로 전락한다. 단독 실행한 작전에서 대규모 사상자를 낸 한규는 국정원에서 잘리고, 작전에 실패한 지원은 오도 가도 못하고 숨어지내는 신세가 된다. 한규는 지원 때문에 실패했고, 지원은 한규 때문에 실패했다. 같은 듯 다른 둘의 뫼비우스띠 같은 관계는 새로운 모양의 뫼비우스 모양을 이룬다. 6년 뒤 지원은 이주노동자가 많은 공장의 노동자로 일하고, 한규는 도망간 외국인 며느리를 잡으러 다닌다. 둘은 변두리 공장에서 극적으로 만난다. 서로를 단번에 알아보지만 그들은 상대방이 자신을 모를 거라고 생각한다. 전락은 둘의 손을 잡게 한다. 한규는 자신의 흥신소 일을 도와달라며 지원을 스카우트한다. 여전히 그들 사이에 뾰족한 극점은 남는다. 어쨌든 이것도 한마디로 통한다. 그들은 남과 북의 ‘극우’다. 이 두 극우가 동거를 시작한다. 장훈 감독의 <의형제>다.
화해의 동력은 ‘밥벌이의 괴로움’
장훈 감독은 <영화는 영화다>를 통해서 아주 다른 두 남자가 닮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영화배우 강지환(수타)과 그의 액션 상대역으로 영화에 입문하는 깡패 소지섭(강패)이 주인공이었다. 촬영장에서 스타는 진짜 ‘연기’를 하고 깡패는 ‘진짜’ 연기를 한다. 촬영장 밖에서 스타는 깡패에게 깡패처럼 굴고, 깡패는 진짜 싸워볼 테냐며 촬영장 안 스타의 포지션을 훔친다. 그렇게 둘은 실제 싸움이 벌어지는 영화와, 영화의 현실이 옮겨가는 실제를 통해 조금씩 섞여 들어간다. 결국 둘은 유명한 진흙탕 싸움 장면에서 뒤섞인다. 그들의 얼굴과 몸은 진흙으로 모두 지워져 있다. 서로의 얼굴을 향해 팔을 뻗은 두 남자의 형체는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하다. 영화의 결말에는 극적인 화해도 준비해놓았다.
<의형제>도 서로의 차이를 지워나가는 영화다. 그리고 그를 통해 명백한 주제를 준비해놓았다. 이미 제목에도 드러나 있지 않은가. ‘피를 나누지 않은 형제’라는 뜻으로.
“잊었단 말인가 나를, 타오르던 눈동자를… 사랑을 하면서도 우린 만나지도 못하고… 서로가 헤어진 채로 우린 이렇게 살아왔건만….” 영화의 첫 장면 비가 내릴 때 흐르는 노래다. 남파간첩이 암호로 사용하는 노래는 남궁옥분의 <재회>. 한용운의 ‘님의 침묵’의 침묵한 님이 절대자·국가라고 ‘돼지꼬리 땡땡 용꼬리 용용’했던 우리에게 이 ‘재회’하는 사람이 한때 사랑했던 남녀의 은유로만 다가오랴.
영화는 남북관계에서 가장 반목하는 두 지점의 대표자를 내세웠다. 송강호는 국정원을 나온 뒤에도 ‘간첩 포상금 1억원’에 목맨다. 국정원 후배와 은밀히 내통한다. <조선일보>를 구독하고(화면에 ‘PD수첩은 오류수첩이었다’는 제목이 선명하게 보인다) “PD라는 새끼가 빨갱이니…” 등의 발언을 내뱉는다. 지원은 찾아간 김일성대학의 옛 은사가 자수를 권하자 “저에게 사상교육을 시켰던 게 당신”이라며 거부한다.
화해는 서로의 차이를 눅이면서 온다. 화해의 동력은 ‘밥벌이의 괴로움’이다. 지원은 생계형 간첩이고, 한규는 생활형 흥신소장다. 한규는 국정원에서 잘리는 순간 “밥벌이하려고 간첩 잡는 놈 때문에 우리가 보수·꼴통 소리를 듣는다”는 말을 듣는다. 그가 현상금에 목매는 것도 이혼한 아내와 딸에게 돈을 보내기 위해서다. “빨갱이가 돈을 밝혀”라는 말을 듣는 지원도 개인적인 사정이 있다. 둘 다 국가와 민족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아버지다.
화해의 와중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잡아들인 외국인 며느리를 차에 태우고 수갑을 채우자, 지원은 달리는 차에 왜 수갑이 필요하냐고 항의한다. 공장에서 지내며 베트남 말을 배운 지원은 마구잡이가 아니라 설득을 통해 며느리를 집으로 돌려보낸다. 고맙다는 순박한 농촌 아저씨에게는 사례금 대신 닭과 배추를 선물로 받기도 한다. 또 다른 약자를 통한 에둘러 가는 길은 뫼비우스 띠의 아이러니를 푸는 방법이다.
비장한 대립, 절박하면서도 코믹한 개인
의연한 대립과는 다른 절박하면서도 코믹한 개인의 속사정. 베트남 청년들과 싸울 때 한규가 빼든 총과 비슷하달까. 한꺼번에 몰려드는 베트남 청년을 향해 한규가 총을 드는데 어설프다. 베트남 청년들은 한국어로 “가짜가짜?”라며 숙덕댄다. 총은 가스총이다. 가스총은 무력하고 베트남 청년들은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가 머리를 쥐어뜯고 함께 무너져내려 모래 위를 구른다. 배경으로는 코믹한 음악이 흐른다.
<의형제>의 주제는 이렇게 욕심을 부리지 않는 액션을 통해서도 구현된다. 비장하지만 코믹한. 차가 질주하는 시장 골목에는 쓰레기가 널려 있다. 차는 골목길을 주춤주춤 더듬더듬거리다가 벽에 박고, 초라하게 일그러진 뒤 식식거린다. 너덜너덜한 방음막이 그대로 보이는 고가도로에서 밀린 차들은 빵빵댄다. 집 나간 며느리를 잡아들이는 ‘나름’ 추격신은 농촌의 한가로운 풍경에서 우스워진다.
극도로 세련된 강동원의 얼굴은 영화에선 순박하게 보인다. 의외다. 송강호는 영화에서 특유의 활기를 되찾았다. 5분 넘게 원맨쇼를 하는데도 지루할 틈이 없게 만든다. 송강호의 얼굴은 북한군 장교였던 <공동경비구역 JSA>와 시골 형사였던 <살인의 추억>을 합친 것 같다. 두 영화 다 500만 이상이 들었다. <의형제>는 2월4일 개봉한다. 설 대목을 겨냥했다는 말이다. 한규와 지원의 운명이 국제정세와 남북관계의 긴장 여부에 달렸듯 영화가 그러할 듯도.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내러티브 저널리즘 리포트] <상> 결혼이민자를 보는 대한민국의 불편한 시선
[중앙일보 강인식.강정현]
자스민은 한국인이다
부잣집딸, 의대생, 미인대회 출신 … 자스민은 필리핀에서 '엄친딸' 1등 신붓감이었다. 그런 그녀가 한국서 온 띠동갑 연상 항해사 남편과 사랑에 빠져 그의 아내가 됐다. 열아홉에 장남 승근이를 낳고 한국아줌마 됐다. 그러나 그건 그녀의 생각일 뿐이었을까?
귀화했고, 주민등록증까지 나왔지만 사람들은 수군댔다 “외·국·인인가봐”… 2등 국민같이 느껴졌다. 6년 전 아들 학교에 급식봉사를 갔다. 아들은 큰 소리로 “엄마”라고 외쳤다. 그때부터 그녀의 삶이 달라졌다. 지금 그녀는 당당하다. 영화와 방송에 나갔고 지방선거 비례대표의원 추천 소동 유명세도 치렀다.
10년 뒤 10가구 중 1가구가 다문화가정이 된다. 배우와 정치인이 되겠다는 그녀의 꿈이 이뤄질 날도 멀지 않았다
'필리핀 며느리' 자스민(33·여)은 2일 지방선거에서 자신의 투표권을 행사했다. 한국인으로서 그녀는 투표했다. 주변에 있는 이주 여성들이 자스민에게 물었다.
“투표는 어떻게 하는 거야.” “시의원은 뭐하는 사람들이야.” “그럼 우리 사는 것도 좀 나아지나….”
자스민은 이번 선거 과정에서 유명인이 됐다. 지방선거를 두 달여 앞둔 4월, 한나라당이 광역 비례대표 의원으로 그녀를 추천할 것이라는 뉴스가 보도됐다. 그러나 최종 명단에 자스민은 없었다. 그녀는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희망을 발견했다. 함께 투표를 고민하는 이주 여성들이 생겼다는 변화가, 자스민은 신기했다. 자신의 정체성이 한국인에 더 가까워진 것 같아 기분이 괜찮았다.
1995년 띠동갑 한국인과 결혼한 필리핀 출신의 자스민. 필리핀 명문 의대에 다녔고, 집안은 부유하고 외모는 빼어나다. 한국에 시집와서 두 아이를 키우느라 12년간 바깥생활을 못했다. 하지만 현재 그녀는 다큐멘터리 번역가로, 방송 패널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필리핀에선 1등 신붓감이었겠다고, 그녀에게 질문한 적이 있었다.
“그랬겠죠. 하지만 한국에선 2등 국민, 아니 등외죠.”
그녀는 '2020년이면 10가구 중 1가구는 다문화 가정이 될 대한민국의 오늘'을 이야기했다. 이 글은 자스민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자스민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에 관한 이야기다. 그녀의 15년 한국 생활은 동남아 출신 이주 여성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그녀에 대한 편견은 곧 우리 사회의 수준을 말해 주고 있다.
발렝케 퀸
자스민의 어린 시절 애칭은 '발렝케 퀸'이었다. 발렝케는 필리핀어로 시장이다. 부모는 시장에서 가장 큰 잡화점을 운영했다.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4명, 가게 직원이 3명이었다. 승용차 6대 중 2대가 독일제였다. 스쿨버스에서 내려 우아하게 시장으로 걸어오는 소녀를 보며 사람들은 '발렝케에 퀸이 오셨다'고 말하곤 했다.
자스민은 공부를 잘했다. 92년 필리핀 대입 시험에서 100점 만점에 99점을 맞았다. 필리핀국립대(우리의 서울대)에 합격했지만, 마닐라까지 보낼 수 없다는 부모의 반대로 집(민다나우 다바우) 근처에 있는 아테네요 대학 의대를 선택했다. 최상위권 사립대다. 의대 재학 중이던 94년에는 미스 필리핀 다바우 지역예선에서 3위에 올랐다. 대학 밴드에서는 리드 보컬을 했다.
바로 그해, 남편 이동호씨가 2등항해사로 일하던 선박이 다바우에 정박했다. 동호씨는 식료품을 사러 편의점에 들렀다. 자스민의 부모가 운영하는 가게였다. 동호씨는 그곳에서 자스민을 봤고, 사랑에 빠졌다.
그로부터 6개월 뒤 동호씨는 직장을 그만두고 필리핀으로 건너왔다. 끈질긴 구애였다. 그 정성에 부모는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오히려 친구들이 완강했다.
“네가 뭐가 부족해서 저런 외국인과…. 백인이라면 모를까. 영어도 형편없잖아.”
그러나 자스민은 동호씨의 진심을 봤고, 사랑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95년 4월 결혼했다. 자스민은 공부를 그만두고 싶지 않아 필리핀에 남았다. 그러다 덜컥 임신을 했다. 자스민은 시부모가 있는 한국으로 건너갔다.
첫째 승근이가 96년 7월에 태어났다. 자스민의 나이 19세였다. 그날 이후 자스민은 대학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혹시 한국에서 편입할 때 필요할까 봐 대입시험과 내신 성적표를 가져왔지만 쓸 일은 없었다. 둘째 딸 승연이는 2000년 5월에 태어났다.
자스민바
한국에 시집온 지 3년째인 98년. 자스민은 귀화했다. 주민등록증이 나왔다. 이름란에는 '자스민바'라고 적혀 있었다. 원래 이름은 '자스민 바쿠어나이'.
이름은 네 글자까지만 들어갑니다, 동사무소 직원이 친절히 설명했다.
바쿠어나이가 성(姓)인데…, 자스민은 네 글자 이름이 어색했다. 하지만 더 묻지 않았다(자스민은 12년 만인 올해 '자스민 이(李)'로 개명신청한다).
그로부터 얼마 후 자스민은 장을 보러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두 사람이 앉는 좌석에 50대 초반의 아줌마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자스민은 얼른 자리를 잡았다. 아줌마는 자스민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한국인은 자기들과 조금만 다르다 싶으면 집요하게 쳐다보는 습성이 있다. 그건 자스민이 가장 불편해하는 한국인의 특성이다. 자스민이 얼굴을 피하자 아줌마는 몸을 틀어 따라오며 쳐다봤다. 어색해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어, 한국말 하네!”
자스민은 고개만 끄덕였다.
“어.디.서.왔.어.요?”(못 알아들을까 봐 또박또박, 모두 들을 수 있을 만큼 크게)
“필리핀요.”
“필리핀! 나 가봤어. 거기 애들 너무 불쌍하더라. 가난하잖아. 도둑도 많고.”
“거기도 여기랑 사는 건 같아요.”
“무슨 소리야. 가이드가 가방 조심하라던데.”
자스민은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아줌마는 존대하지 않았다.
“여긴 어떻게 왔어?”
“결혼이요.”
“통일교?”
“아니에요.”
필리핀에는 무니스(Moonies, 문씨를 따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라고 알려진 종교. 90년대 중·후반까진 합동결혼으로 한국에 왔느냐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었다.
“아니구나…, 어디서 만났어?”
“필리핀요.”
“연애? 아… 내가 말실수 했네. 미안, 미안.”
“….”
“남편이랑 나이 차이 많이 나지?”
“조금요.”
“10살 이상 나지? … 쯧쯧. 어려 보이는데….”
90년 후반부터 이주여성, 국제결혼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드라마에선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쉽게 볼 수 있었다. 한국에 시집온 동남아 여성을 보는 시선은 늘 슬펐다.
첫째가 2002년 취학했지만 자스민은 학교에 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슬픈 시선을 아들에게 보내는 걸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들의 외모는 누가 봐도 한국인이었다. 피부는 하얬다. 다행이었다. 나만 안 가면 아무도 모를 거라고, 자스민은 결론 내렸다.
자스민의 아들
2003년 이후 '다문화 가정 자녀의 왕따' 문제가 종종 보도됐다. 다문화 가정이라는 단어가 2003년부터 생겼으니 그 전엔 혼혈아로 보도됐을 것이다. 혼혈아든 다문화 가정 자녀든 그런 식의 규정은 당사자들에게 적절하지 않았다.
아들 승근이가 취학한 후, 한 달에 두 번은 학교에 나가 급식을 도와야 했다. 자스민은 급식봉사에 시어머니를 보내고 시동생을 보내고 남편을 보냈다.
2004년 10월, 그러니까 승근이의 2학년 2학기였다. 어느 날 아들이 물었다.
“엄만 왜 학교 안 와?”
“바빠서.”
“뭐가 바빠? 왜 거짓말 해?”
“….”
“이번 급식봉사엔 꼭 와. 응?”
“승근아…, 엄마는 다른 엄마들이랑 좀 다르잖아. 그래도 괜찮아?”
“응! 내가 애들한테 다 얘기했어. 엄마 필리핀 사람이라고. 엄청 예쁘다고. 영어도 정말 잘한다고. 이번엔 꼭 올거지?”
“어? … 어, 응, 그… 그래.”
첫 급식봉사.
엄마 자스민은 무채색 옷을 입었고, 무난한 신발을 신었다.
내가 백인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자스민은 생각했다. 백인이 아니어서 남편을 반대했던 친구들 생각이 났다. 인종 편견은 전 지구적인 것이어서 자스민은 피할 수 없었다.
급식은 강당에서 진행됐다. 엄마들끼리의 대화가 들렸다.
“원어민 선생님인가.” “앞치마 두르네. 도우미를 대신 보냈나 봐.”
자스민은 연희동에 살며 두 명의 필리핀 여성을 만난 적이 있다. 둘 다 직업이 가사 도우미였다. 학부모들은 현실을 얘기했지만, 예외를 생각하지 못했다.
아이들이 물밀 듯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와, 외국인이다.” “와~ 아프리카 사람인가봐.”(꼬마들은 피부색이 검으면 아프리카를 먼저 떠올린다.)
자스민은 활짝 웃으며 아이들을 맞이했다.
“맛있게 먹어요.”
“우와, 한국말 한다.”
저기 멀리서 아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를 찾나. 그냥 나가지 않을까. 모르는 척하면 어쩌지.'
자스민은 숨이 막혔다.
“엄! 마!”
그건, 지금까지 아들이 엄마를 불렀던 목소리 중 가장 큰 것이었다. 아들은 엄마를 부르며 뛰어왔다. 강당에 있는 모든 이가 아들을 봤고, 고개를 돌려 자스민을 봤다.
“얘들아, 우리 엄마야.”
꿈틀! 엄마는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학부모들도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승근이 친구 엄마예요.”
승근이는 학교에서 반장이었다. 아들은 강당의 분위기를 이끌었다. 아무도 자스민을 무시하지 못했다. 아들이 측정하지 못할 만큼 커 보였다.
그날 이후 자스민은 학교에 자주 갔다. 봉사할 일이 있으면 손을 들고 자처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완벽하게 좋은 건 아니었다. 그날 이후 아들에겐 '몽키'라는 별명이 생겼다. 아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 나 원숭이다.”
별거 아니라는 저 말투…, 저 쿨함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쿨한 아들이 몇 번 싸운 적이 있다. 원숭이란 놀림이 엄마를 향할 때.
첫 급식 날은 자스민의 한국 생활에서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됐다. 그녀는 안으로 숨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영화 '의형제'에 단역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맡은 역은 도망간 베트남 며느리. 외국인 며느리에 대한 고정관념은 일상에서도, 영화에서도, 꿈 속에서도 이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유쾌하게 배우와 정치인을 꿈꾼다. 내일 '자스민의 꿈'을 소개한다. 필리핀 며느리가 꿈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 그것은 우리 사회의 질적인 변화를 의미할 것이다.
글=강인식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내러티브 저널리즘(narrative journalism)
기존의 '단순 사실 전달식' 기사 형태에서 벗어나 소설 문장처럼 '이야기하듯' 구성하는 기사 형식. 주요 인물을 추적해 사건의 이면을 보여주고, 사실을 현장감 있게 전달하는 글쓰기 방식이다.
[사설] 캄보디아가 국제결혼 금지한 대한민국
관객 500만 명을 돌파한 영화 ‘의형제’는 전직 국정원 직원과 북에서 버림받은 남파 간첩 사이의 갈등과 의리를 그린 영화다. 탈북자 2만 명, 외국인 100만 명 시대를 맞은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내면이 배경으로 등장하고 있다. 전직 국정원 직원 이한규(송강호 분)의 주업은 도망간 베트남 신부를 찾아 주는 일. “베트남 신부가 도망갈까 봐 수시로 때렸다”고 천연덕스레 말하는 의뢰인이 그의 눈엔 그저 물주일 뿐이다.
캄보디아 정부가 이달 초 한국을 자국인들의 국제결혼 금지국으로 지정했다고 한다. 캄보디아 주재 한국대사관에 국제결혼 신청서 접수를 한시 중단하겠다고 통보해 왔다. 자국 여성들이 한국인과 결혼하는 과정에서 인신매매 우려가 있어 이를 막는 절차를 마련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캄보디아와 수교한 많은 나라 가운데 오직 한국에만 취한 조치다.
지난해 9월 결혼중개업체가 현지에서 캄보디아 여성 25명을 불러다 놓고 한국인 남성으로 하여금 신부를 고르도록 주선하다 적발된 게 계기가 됐다고 한다. 우리의 관습 ‘중매’와도 거리가 먼, 인간 대 인간의 결혼과도 거리가 먼 참담한 광경 아닌가.
여기에다 한국에서 자국 여성들이 임신중에 구타를 당하고 마음에 안 들면 이혼당하는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캄보디아 여론은 악화됐다.
훈센 캄보디아 총리는 지난해 10월 프놈펜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에게 한국에 머물고 있는 캄보디아 근로자와 결혼이민자들을 잘 보살펴 달라고 특별히 부탁하면서 “캄보디아 며느리가 있다고 생각해 달라”고 당부했다. 캄보디아인의 국제결혼 상대자의 60%가 한국인이라고 한다. 문제는 불법 중개업체들의 이런 행태가 한두 해 된 일이 아니고, 지역적으로도 베트남·몽골 등에서 광범위하게 활개치고 있다는 점이다. 몇 년 전엔 ‘베트남 신부 100% 후불제, 환불가능’이란 플래카드가 한·베트남 사이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된 적도 있다.
대한민국은 전쟁의 상처를 딛고 세계 13위 경제력과 민주화를 달성한, 세계 현대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성공한 나라다. 동남아·아프리카·중동 지역 개발도상 또는 빈곤국들이 모델 국가로 여기고 있다. 이런 기적 위에 소프트파워가 더해져 한류도 형성됐다. 서울 광화문 거리에서 자랑스럽게 ‘대~한민국’을 외칠 수 있는 이유였다.
하지만 주변을 보자. 가난한 나라 출신이라고, 피부색이 다르다고 우리와 같은 인격체로 대접하지 않는 일들이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다. 국제결혼 중개에 관한 엄격한 법 기준을 마련해야 하는 일도 시급하지만 먼저 우리들 마음속에 자리한 레이시즘을 쫓아내야 할 때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서울 유치와 김연아 선수의 밴쿠버 겨울올림픽 제패로 대한민국의 국격(國格)이 높아졌다고 기뻐하던 게 바로 엊그제다. 진정한 국격은 국민의 성숙된 인격(人格)이 모일 때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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