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왜 이순신 거북선은 발견되지 않을까?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09. 4. 29. 20:18

-이순신이 눈물을 흘리지 않을까?

최근 이순신의 친필 한 시(詩)가 발견되었다. 이순신이 아는 이의 회갑을 축하하는 수연시다.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할 시(詩)겠지만, 일단 이순신의 칠언율시라니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이순신 관련 소식은 좋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순신 고택(古宅) 터가 경매가 넘어간 데 이어, 유물이 암시장에 나돌고 있다는 소문도 있다. 현재 이순신 가문의 종손은 없다. 여기에서 비롯해 종친회와 종부 사이가 갈등은 여전하다. 고택 경매와 유물에 관한 루머는 그것에서 기인한다.

그들만의 탓이 아니라 문화재 정책은 물론 우리 모두가 이순신의 후광만 쫓고, 실제로는 너무 무심했다는 비판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해마다 이순신 축제는 화려하게 진행되고 김훈의 <칼의 노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드라마도 만들어졌고, 뮤지컬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에 비해 실제 이순신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한 축제가 아니었던 셈이다. 결국 모두 과실만 따먹으려고 한 행위가 된 셈이 아닌지. 뮤지컬은 전쟁에 미쳐가는 이순신을 그렸다니 씁쓸하다. 이순신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이순신 탄생일을 맞아 이순신과 관련해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다시금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 두 가지 예만 들기로 한다.

먼저 녹둔도(鹿屯島)가 그렇다. 선조 20년(1587년) 가을, 이순신이 지키고 있던 함경북도 두만강 가에 있던 녹둔도에 여진족이 침입했다. 이 침입으로 조선군사 11명 사망하고 백성 160명이 잡혀갔다. 이순신은 다시 여진족 진영으로 쳐들어가 군민 50여명을 구출해내었다. 북병사 이일은 이 일로 이순신을 참수하려 했다.

그 뒤에 녹둔도에는 이순신 장군을 모신 사당이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이 부상을 당하고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여진족에게서 지켜냈던 녹둔도는 1860년 청·러의 베이징 조약에서 러시아로 넘어갔다. 북한은 그 뒤에 러시아 땅으로 인정해주었다. 북한은 1990년 구소련과 국경조약을 맺으면서 러시아의 영토로 인정해 준 것이다. 그렇게 이순신의 녹둔도(鹿屯島)는 러시아 땅이 되었다.

두 번째는 거북선 찾기가 이순신 해전법을 생각하고 있는지다. 최근 남해안에서는 이순신 프로젝트 탐사단의 활동이 진행되고 있다. 이 활동의 핵심 사업은 거북선 탐사다. 작년 6월부터 진행되어온 활동이다. 임진왜란 당시 어딘가에 침몰해 있을 거북선을 찾아 그 원형을 복원한다는 것이 그 목표다. 왜 거북선은 고사하고 총통 하나 발견되지 않는 것일까? 물살이 센 곳이라 남아 있지 않는 것일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거북선이나 총통은 해저에 없을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조선 수군의 배는 격침당한 적이 없으니 말이다. 지금 현재 칠천도 앞바다에서 거북선을 찾고 있는데 그 이유는 칠천량 해전의 조선 수군 패배 때문이다. 조선 수군은 분명 1597년 7월 15일,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다. 하지만 이때 거북선이 격침되었을 리가 없을 것이다. 왜군이 거북선을 격침시키는 해전법을 사용했는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총통도 발견되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 왜 그럴까? 그것은 왜군의 해전법과 관련되어 있다.

일단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게는 수군이 따로 없었다. 조선 침략을 앞두고 수군을 급조하는데 그 급조된 수군이 해적 출신들이었다. 해적들의 전투 방법은 등선육박전이었다. 이들은 갈고리를 가지고 다녔는데, 이는 상대의 배에 기어오르기 위한 것이었다. 왜 수군은 상대 배에 근접해서 갈고리를 던져 타고 올라서 상대와 싸우는 육박전에 능숙했다. 이것이 등선육박전이다. 더구나 이들은 칼싸움에 능숙했기 때문에 육박전에서 활에 익숙한 조선군이 불리했다.

이순신의 전법은 육박전이 불가능하도록, 조총 사격거리에서 벗어난 포 사격 전술이었다. 그것이 세계 해전 사상 유례가 없는 함포 사격 전법이었다. 왜군은 무조건 상대 배에 올라 사람을 죽이고 배를 점령하는데 목적이 있었지, 배를 부수는 데 목적이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인명을 살상하고 배를 나포했고, 조선 수군은 왜군의 배를 무조건 부수고, 인명을 직접 살상하는 데는 별로 그 목적을 두지 않았다. 어쨌든 배를 격파해 육지로 향하는 물자를 차단하는 것이 이순신의 목적이었다. 그것은 매우 현실적이었으며, 승리의 비결이 되었다.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패배한 것은 왜와 일정한 거리를 확보하지 못하고, 그들의 등선육박전에 휘말려 버린 때문이었다. 원균 함대는 뒤늦게 도주했지만, 그것은 늦은 것이었다. 왜군은 끝까지 추적을 했고, 왜군은 인명을 살상하는 데 그 목적을 두어 육지까지 쫓아 들었다. 이 때문에 조선 수군은 궤멸의 지경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많은 조선 수군의 배는 왜군의 손에 넘어갔을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그들은 많은 물자를 수송하는데 배가 필요했을 것이다. 반대로 조선 수군은 그들의 배가 필요 없었다.

하나의 유물이라도 전해진다면 그것은 반가운 일이다. 언제나 희망을 갖는 일은 중요하고 탐사를 계속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순신이 이끌었던 조선 수군의 전법을 너무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떠들석한 것 같지만, 군중 속에 고독, 이순신은 외롭게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 모른다. 여하간 최근에 이순신과 관련한 소식들이 유쾌하지 않은 측면은 앞으로 일신하도록 만드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김헌식 (문화평론가)
-위인전이 숨기는 이순신 이야기(평민사, 2004)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