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왜 동성애 영상 콘텐츠 범람하나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09. 3. 20. 11:57

 

경제 위기와 아울러 한국영화와 드라마도 이미 위기에 빠져 있다. 제작 편수도 줄었고, 흥행작이나 크게 눈에 띄는 드라마도 없다. 풍성한 것은 도발적인 영상들이다. 특히 2008년 부쩍 동성애를 다룬 영화와 드라마가 부쩍 늘었다.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소년 소년을 만나다>, <쌍화점>, <미인도>, <바람의 화원> 등이 손에 꼽히고 있다. 사회적 인식 변화와 안팎의 위기 상황이 이러한 동성애 영상 콘텐츠의 증가를 가져온 요인이 아닌지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선 한국영화의 위기부터 살펴보자. 상황을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한국 영화의 위기는 더 명확하게 이야기 하면 한국 관객들이 한국영화를 보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2008년에는 한국영화가 다양화되었음에도 관객의 외면을 받았다.

무엇을 담아도 주목을 받지 못할 때, 마지막으로 영화가 의존하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섹슈얼리티이고, 다른 하나는 '금기'이다. 섹슈얼리티는 말 그대로 파격적인 정사신이나 노출을 전면에 내세워 흥행을 노리는데 활용된다.

하반기 <미인도>와 <아내가 결혼했다>의 마케팅은 이것에 맞추어져 있었다. '금기'는 대중문화에서 상품성을 갖는 호재다. '설마' 하는 심리를 자극하면 '혹시나' 하는 궁금증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금기 위반 여부는 사회적으로 노이즈를 일으킨다.

이러한 금기 소재에는 도덕적 윤리적 혹은 진리라 믿었던 상식의 붕괴를 가져오는 내용일수록 선호된다. 동성애도 이런 마지막 남은 사회적 금기의 영역이다. 동성애가 사회적으로 강력하게 금기시 될수록 동성애에 대한 영화는 노이즈 마케팅에서 우위를 점한다. 하지만 그 노이즈가 웬만해서는 눈길을 끌지 못하는 한계가 곧잘 있다.

어쨌든 금기의 대상이었던 동성애 영화가 많아진 것은 우리 사회의 변화된 사회의식, 나아가 사회적 진보의 잣대로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정확한 판단은 한국의 동성에 관한 영상 콘텐츠의 성격을 좀 더 살펴본 뒤에 판단을 내리는 것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꽃미남만 동성애할 자격 있나

대부분 동성애 영화들이 꽃미남들의 사랑이야기다. <왕의 남자>가 천만 관객을 동원하고 있을 때 동성애자들이 언론을 통해 이 영화에 대한 반대 의견을 내었다. <그들이 공개적으로반대 의견을 낸 것은 왕의 남자>뿐만 아니라 이런 유형의 영화들이 동성애에 대한 왜곡을 낳기 때문이었다.

동성애는 꽃미남만 나누는 사랑이 아니다. 비판이 무색하게도 꽃미남은 주인공으로 적극 차용되고 있다. 제작자들은 꽃미남이라는 코드가 젊은 여성들의 눈길을 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화의 흥행 판도를 여성 움직이기 때문이며, 여성은 레즈비언에 대해서는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 동성애는 사극 <바람의 화원>이나 <미인도>같이 사극의 남장 속에 숨어버린다.

일부에서는 여성들의 경제적인 독립 증가로 연하의 꽃미남을 선호하는 경향성이 높아졌고, 그것이 영화 속 동성애의 증대로 이어졌다고 한다. 혹은 욕망 표출의 직접성과 금기 위반의 쾌감이 동성애로 결집되고 있다. 꽃미남에 대한 여성의 욕망과 동성애의 일탈쾌감의 심리가 결합된다. 야오이에 대한 대중 문화적 축적이나 인식의 전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으로 보자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 것인지는 따져 볼 점이 있다.

이들 영상 콘텐츠들은 대부분 엄밀하게 동성애 영화나 드라마가 아니다. '동성애 코드' 영화나 드라마다. 동성애를 정면으로 다룬 것이 아니거나 이성애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왕의 남자>에서 공길을 사랑하는 이들은 남성성이 아니라 여성성을 사랑한다. 이런 우회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심하다.

<바람의 화원>에서 신윤복을 사랑하는 기녀 정향은 신윤복의 남장을 사랑한다.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 한결이 사랑한 것은 은찬의 여성성이지, 남성성이 아니다. 인기 요인 중 하나는 '동성애는 아니어야 한다'는 강력한 사회적 금기 때문이었다. 즉, 동성애 코드의 영상콘텐츠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과 금기를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강화하면서 인기를 끄고 만다.

그렇다면 이것이 제작진의 책임일까. 부분적으로는 그렇다. 나머지는 한국사회의 문화적 환경도 한몫 한다. 트랜스젠더 연예인 고 정채원과 커밍아웃 모델 고 김지후가 사망했을 때 일부 미 언론들은 한국사회의 '호모포비아'(동성애 혐오)가 그들을 죽였다고 했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에서 독립영화가 아닌 상업영화로 만들기 위해서는 동성애를 정면에서 다룰 수 없다는 명분이 내세워진다. 우리 사회가 동성애에 대해서 유연하다면 동성애 관련 영상물이 한꺼번에 관객들을 끌어 모으겠다고 쏟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더구나 동성애를 다루었다는 이유만으로 화제가 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동성애 상품화의 그늘

퀴어 영상은 동성애에 대한 편견적 인식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에 저항이다. 그러한 인식을 불식시키기 위한 독립영화들의 부단한 노력들이 있어온 것도 사실이다. 대중성과 사회적 메시지를 함께 추구하거나 더 이상 진지하고 무겁게 그리지 않게 밝고 명랑한 연출을 추구하는 등 외연은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다.

2008년 동성애와 관련한 영화와 드라마가 많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 영상들은 한국 영화의 위기에 금기와 섹슈얼리티에 기대어 마지막 탈출구를 찾는 측면이 있다. 이는 동성애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인식, 그리고 경제적 상황과 한국 영화 위기를 생각해 볼 때, 너무 부담스러운 미션을 부여받는 게 된다. 물론 처음부터 많은 관객을 동원할 생각이 없었다면 그나마 다행일지 모르겠다.

한 번에 갑자기 쏟아지는 동성애 영화는 하나의 문화적 쏠림 현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한 쏠림은 한동안 절대적인 고민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 완전히 외면하고 만다. 두려운 것은 바로 뜨거운 관심 뒤에 외면의 쓸쓸함과 고독이다. 새롭게 소비하기 위한 하나의 소재일 뿐이라면 역효과 발생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대단한 상상력이나 작품성에 기반 한 작품임에도 단순히 동성애만 부각되거나 그것에만 쏠리는 것은 작품을 만든 사람이나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에게 모두 마이너스가 될 것이다. 동성애는 하나의 장르가 아니라 사랑의 한 형태이다.

장애인을 비장애인과 애써 분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성애 영화를 애써 구분하는 것이 차별이자 편견 조장일 수 있다. 무엇보다 꽃미남이 아닌 동성애자들에 대한 편견이나마 덜 강화하면 다행인 상황이 반복될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동성애는 밝고 경쾌하게 넘길 팝콘 타임용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여전이 진지한 사랑이야기일 수도 있다. 다만, 이러한 동성애 코드의 영상들이 동성애 금지에 기반 하지 말고 편견을 불식하는데 일조한다면 긍정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