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화 시위에서 문화 시위로 진화하는 이유.
글./김헌식 (중원대학교 특임교수, 문화정보콘텐츠학 박사, 평론가)
2024년 12월, 비상계엄 관련 시위는 문화 시위의 진일보를 보였다. 외신에서는 댄스파티 같은 시위라고 했고, K팝 공연장 같은 분위기를 언급했다. 분명 이런 점을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이 맞다. 다만, 이러한 분석이나 규정은 본질적이지 않고 개별적인 현상에 머무는 것이다. 일단 개념 정의가 필요하다. 이제 시위는 물화 시위가 아니라 문화 시위다. 문화 시위는 물리적 과시를 통해 자신들의 의사나 주장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방법이나 수단을 통해 이상적으로 여기는 가치와 의제를 공감을 시킨다.
이전의 시위 현장에서는 그야말로 물화의 공간이었다. 물리적인 위세를 보이기 위해서 많은 군중을 모아 규모를 통해 의사 표현을 강제하려 했다. 그것도 모자라면 과격한 집단행동을 통해 이목을 집중시키려는 사이에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문화 예술적인 측면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서 짧은 연극이나 간단한 퍼포먼스, 노래 공연이 이뤄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문화 공연은 일방통행식이 많았고 공감도 어려운 고착된 콘텐츠를 담고 있었다. 문화예술이 수단이나 도구가 된 듯싶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콘텐츠가 필요했고, 표현 수단이 있어야 했다.
이번에는 좀 더 달랐다. 예컨대, 자유 발언대에서도 젊은 세대의 참여가 적극적인데 수시로 케이 팝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주장과 의사를 밝힌다. 시위 현장 자체에 케이 팝 노래가 등장한 것은 이러한 면에서 공감의 폭이 클 수 있게 했다. 케이 팝의 전면적 등장은 반대로 시위 현장에 젊은 세대가 많이 참여한 것을 알 수가 있다. 케이 팝의 인식 변화가 전제였다. 케이 팝은 젊은 세대의 고통과 갈등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의지와 희망을 내포하고 있기에 시위 현장에서도 통용될 수 있었다. 케이 팝의 중심은 여성이며, 시위 현장에 나온 젊은 세대는 10~20대 중심의 여성들이 차지하고 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빠순이라는 조롱에도 키워낸 케이 팝 문화가 나라를 구하는 현장에 당당히 등장했던 점을 생각하면 감개무량이었다. 거꾸로 광우병 쇠고기 사태 때 촛불 소녀들이 있었듯이 계엄 상황에 대해서 누가 가장 공포와 분노를 느끼는지 알 수 있었다. 폭력에 대해서 가장 민감한 것이 여성이고 더 나아가 젊은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한강 작가의 노벨상 문학상 수상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딱딱한 구호와 메시지 중심의 연설이 아니라 노래를 통해 의사 표현을 하고 응원봉이 힘찬 팔 동작을 대신하며 부드러운 빛으로 어둠을 가른다. 촛불을 켜는 것보다 더 안전한 그 응원봉은 케이 팝 팬덤의 도구이지만, 결국 더 나은 삶을 미래에 염원하여 주는 케이 팝의 문화 정신과 맞닿아 있다. 이는 일반 시민들의 소박한 미래의 꿈을 비상계엄이라는 폭력성이 해칠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자연스럽게 동기 부여된 문화 행동이다.
시민들이 소박한 꿈을 향한 보호 본능은 높이 솟아 올린 깃발들에서도 알 수가 있었다. 이전에는 주로 시민, 노동, 사회단체의 깃발이 주로 붉은색으로 점철되어 일반 시민들의 참여를 꺼리게 했고 심지어 적극적인 참여도 막았다. 참여해도 일반 시민의 정체성이 투영되지 않아서 지속성을 어렵게 했다. 하지만, 이제 자체 제작한 깃발을 통해 시민 개개인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조직이나 단체 속하지 않아도 민주주의를 위한 시위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 실업자나 취업 준비생을 내세우는 것도 사회적이며 건강이나 취미, 성격은 물론 반려동물을 내세우니 지위나 계층에 관계없이 일상 생활인들의 의사를 더 중요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를 통해. 시위 현장은 꼭 노동자 나 정치 세력만 참여해야 할 것 같은 보이지 않은 기류가 문화적으로 해체되고 있다. 그냥 존재 자체, 대한민국에 사는 국민이면 된다는 점을 강화했다.
물론 젊은 세대가 시위에 참여하게 된 것은 문화 선진국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는데 난데없이 과거 군사독재 시대의 물화인 비상계엄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천만 영화 ‘서울의 봄’을 통해 비상계엄과 독재가 얼마나 공정하지 않으며, 개개인의 삶을 파괴하는지 인식하기도 했다. 4.19 당시 교과서에서 배운 것과 실제 선거가 다른 데 분노한 청춘들의 움직임과 비슷하다. 이제 젊은 세대는 문화 콘텐츠로 세계관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들을 시위에 도구화하는 것은 물화 정치다. 그들의 참여는 정치에 대한 실망과 그에 대한 분노가 도를 넘었기 때문이다. 응원봉과 깃발을 올리는 것은 그래도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에 희망을 걸고 있어야 해서다. 상호 구원 서사의 힘을 믿고 싶기 때문이다. 이런 문화 시위의 진화를 위해 중요한 것은 공동의 목적에 바탕을 둔 자발성, 자율성 나아가 소통과 연대다. 플레이리스트 신청을 받는 것 같이 ‘떼창’할 수 있는 노래, 추위를 떨칠 수 있는 노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노래는 받는 것은 이에 부합할 수 있다. 정치가 오랜만에 돌아온 젊은 세대가 지속할 수 있게 하려면 이점을 잊지 않아야 한다. 이런 점은 거꾸로 정치가 긴장을 하여야 한다는 점을 일깨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