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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린' 정조도 스파이더맨도...왜 아버지를 부여잡을까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4. 5. 7. 11:55

'역린' 정조도 스파이더맨도...왜 아버지를 부여잡을까

최근 개봉돼 화제를 모으고 있는 영화 '역린' 스틸컷. ⓒ초이스컷 픽쳐스
현빈 컴백작 영화 '역린'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정조이야기를 다뤘고, 이때문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정조 이야기와 어떻게 차별화를 이룰지 궁금증이 일게 했다. 영화 '역린'은 불행하게 세상을 떠난 정조 이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여전히 등장시켰다. 불행한 죽음, 그리고 그 때문에 생긴 상처를 극복해 가는 과정을 중심에 두고 있다. 아버지 사도 세자는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 긍정의 계승적 대상이 된다.

영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의 피터에게도 아버지는 참으로 갈등과 고민의 대상이다. 하지만 피터는 아버지가 불행하게 죽음을 당한 사실을 인식하고, 아버지의 뜻에 부합하게 다시 스파이더맨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다. 그에게도 아버지는 상처의 원인이기도 했지만 그를 계승해야할 존재로 그려진다.

슈퍼맨의 리부트 '맨 오브 스틸'에서도 슈퍼맨의 아버지를 적극적으로 부활 시켜내고 있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고, 그의 뜻이 어땠는지 살피는 것은 물론 마침내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부응한다. 물론 이런 영화에 등장하는 아버지들은 모두 훌륭하다. 왕족이거나 과학자, 최고 지도자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이들을 모두 응징한다. 즉 사적 복수 코드에 충실히 부합한다.

영화 '배트맨' 시리즈에서도 배트맨은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고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오랜 동안 방황하고, 외상을 극복하기 위해 평생 고군분투한다. 만약 아버지의 죽음이 없었다면 그가 배트맨과 브루스 웨인이라는 이중적 신분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물론 이들 영웅들은 모두 아버지의 죽음과 그로인한 외상에서 벗어나고 독자적인 자신의 삶과 세계를 열어간다. 이렇게 아버지를 영웅들이 부여잡는 행위들은 리부트의 신기원이 된 배트맨 시리즈 덕분이다.

물론 이들 영화들은 모두 액션 영웅들을 앞에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장르적 속성상 이런 캐릭터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기 힘든 점이 있다. 어쨌든 이들 영화에서 영웅이 일단 모두 남자들이다. 남성 영웅들은 그 자신의 행위와 정체성을 아버지에게서 찾는다.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유업이나 유산이 있었기에 영웅들의 행보가 가능했다. 영화 ‘아이언맨’의 토니 스타크는 아버지의 기업이 있었기 때문에 영웅의 입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물론 그는 무기생산업체의 본질에 대한 통렬한 성찰과 깨달음을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 얻었다. 목숨을 담보로 통찰력을 얻었기 때문에 아이언맨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이는 근본 없는 사람은 없으며 연원이 없는 사물이나 현상이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겠다. 세계경제의 환경은 이제 혼자 자수성가하는 유형이 없다는 점을 드러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계층의 변화는 없고, 계층의 대물림이 존재하는 상황을 영웅을 통해 투영하고 있는 것이겠다.

아버지가 존재해도 자식에게 물려줄 게 있어야 아버지로 존립할 수 있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배트맨, 아이언맨)이었든, 지적 자산(어메이징 스파이더맨2)이었든 말이다. 그러니 보통 사람들은 여전히 영웅이 되지 못하고 그저 그렇게 영웅들을 바라보면 대리만족할 뿐인가.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지는 안았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영웅을 좋아할일만은 아닌 거 같다. 영웅들은 좋은 아버지가 될 생각은 안한다. 그들은 영원히 아들이다. 예컨대, 드라마와 영화 속 정조를 보라. 여전히 그는 사도세자의 아들만을 강조할 뿐. 누구의 아버지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영웅 그들이 아이를 낳고 잘 길렀는지 아직도 그들은 대부분 아이가 없다. 여전히 그들은 외상 때문에 아버지가 되는 것은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러나 이 시대의 아버지들은 정체성의 위기에 봉착해 있다. 이른바 파더 쇼크이다.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도 아버지의 고민은 알겠는데 현실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역할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그만큼 쉬운 문제는 아니라는 점을 내포한다.

글/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