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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린’ 정조 신화화 지나치다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4. 5. 10. 08:52

[김헌식 칼럼] 개봉 9일만에 300만 돌파… ‘역린’ 정조 신화화 지나치다



▲ 개봉 9일만에 관객 300만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는 영화 ‘역린’의 현빈과 한지민(사진 = ‘역린’ 스틸컷)


영화 ‘역린’에서 정조(현빈)는 역시 멋지게 그려진다. 다른 영화나 드라마 소설에 익히 볼 수 있었던 정조의 개혁 군주 이미지는 여전하다. 여기에 개혁군주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암살 위험에 시달리는 인간적 제왕 관점의 고통과 번민이 투영돼있다.

영화 ‘역린’에서는 활쏘기의 달인이라는 점이 강력한 액션신으로 부각돼 정조의 이미지를 더 좋게 강화하고 있다. 과거 남인 계열을 통해 전해지고 소설 ‘영원한 제국’을 통해 크게 부각된 정조 독살설은 그의 긍정적 이미지를 강화하고 그를 선왕(善王)의 대표적인 캐릭터로서 대중문화의 블루칩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근래에 심환지와 오고 간 어찰이 공개되면서 그동안 숨죽여왔던 정조 독살설에 대한 반론이 폭발했다. 많은 전문학자들이 독살이 아니라 병환을 사망원인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극적인 스토리를 위한 한 방향의 역사 해석에 대한 경고를 의미한다.

오랫동안 극적인 스토리를 위해 정조의 이미지는 너무 긍정적으로만 다뤄져왔다. 정조의 다른 면도 살펴야 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788년 정조는 기존의 5군영에서 수어청과 총융청의 폐지하고 장용영의 설치했다. 처음에는 30여명이었는데 후기에는 1만8000명으로 늘어났다. 이 군대는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왕의 호위를 위한 것이었다. 이로써 정조의 왕권은 무소불위의 힘을 갖게 됐다. 따라서 조선 안에서 그를 위해할 세력은 없었다.

‘무예도보통지’는 이런 와중에 간행됐다. 왕권의 강화를 염원하는 군주는 별다를 게 아니다. 항상 왕은 신권을 견제해 스스로 강화책을 사용하는 것이 당연한 본능이기 때문이며, 이는 역대 왕들에게서 얼마든지 확인될 수 있다. 민생과 국방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과연 왕을 위한 호위군사들에게 위해 막대한 인력과 비용이 투입돼야 하는지 일 것이다.

정조는 3년 가까이 수원에 화성을 지었는데, 공사경비로는 돈 87만3520냥과 곡식 1만3300석을 썼다. 공사 경비는 금위영과 어영청의 정번군에 10년 동안 들어갈 돈에서 나왔다. 조선의 국방력은 갈수록 약화됐고, 북방에 대한 방비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화성에서 성(城)의 이름이 화족(華族) 즉 한족(漢族)에서 연원한 화성(華城)이었다. 이는 소중화를 표방한 조선 정치세력의 기조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다.

정조가 인위적으로 시장을 조성한 화성의 상업계획은 실패했다. 자생적 시장질서가 아니라 국가계획시장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다. 화성은 많은 군사적 방어 요충지를 자임했지만, 한 번도 외적의 침입에 사용되지 않았다. 화성 축조과정에서 정약용이 발명했다는 거중기는 물건을 옮기는 기능이 없고, 위아래로 들기만 했기 때문에 공사에 제대로 쓰이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심지어 정치적 쇼였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더구나 왕실에서 단 한 대만 제작 보급했다.

홍국영 기용도 객관적인 면에서 보았을 때, 합리적, 이성적인 사례는 아니었다. 1777년(정조 1년) 7월의 괴한의 경희궁 침입, 8월의 정조 암살 모반을 방어하고 처리한 홍국영을 정조는 특별히 발탁해 동부승지, 도승지로 올렸고, 숙위대장에 임명했다. 이는 큰 공에 상응하는 정책적 조치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무리한 권력 강화를 사적으로 시도했다. 정조도 이 때문에 “그가 권병이 너무 중하고 지위가 너무 높은 것을 조심 두려워하며 스스로 삼가지 않고 오로지 총애만 믿고 위복(威福)을 멋대로 이용해 끝내 극죄(極罪)를 저질렀다”고 밝힌 바 있다. 정조의 정책 탕평은 제한적인 효과를 냈고 정치적 견제는 오히려 정치적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정조는 정순왕후를 견제할 목적으로 안동김씨의 소생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택했지만, 이것이 조선을 매우 약화시킨 세도정치의 씨앗이 되었다. 사도세자 사건을 계기로 시파와 벽파로 나뉘었고, 정조는 즉위 후 자신을 반대한 벽파 대신 시파를 관직에 기용했다. 정순왕후 이후 벽파가 시파의 반격으로 궤멸되고, 안동김씨 중심의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정치적 세력의 등극은 옳고 그름 이전에 각 세력의 이익에 따른 점을 생각할 때 정조를 무조건 옹호할 수 없게 된다.

정조 재위 25년간은 문화의 황금기라고 불린다. 과연 그럴까.

규장각에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정약용, 박지원 등을 신진 관료를 참여시켰다. 규장각은 역대 국왕의 글과 책을 수집, 보관하기 위한 곳인데 이곳에서 다른 책들을 간행했다. 정조는 이를 매개로 ‘대전통편’, ‘동문휘고’, ‘국조보감’, ‘탁지지’ 등을 편찬했다.

그런데 정조가 무엇보다 관심을 가진 것은 성리학의 시조 주희의 책들을 원전에 맞게 정리하고, 증보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방대한 양의 ‘홍재전서’를 간행했다. 이 책은 자신의 문집이다. 그 내용도 성리학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규장각에는 북학파나 남인 실학자들이 검서관이나 초계문신으로 참여했지만, 그들의 사상이나 문체에 동의하지 않았다. 정조는 새로운 문체의 글들이 잡스럽다며 그들에게 자송문을 쓰라고 했다. 이에 박제가는 이렇게 말했다.

“학식이 높지 않은 것은 분명 제 잘못입니다. 하지만 남과 다른 것이 제 잘못이 아닙니다. 음식에 비유하면 이렇습니다. 소금과 매실에게 왜 너희는 기장과 좁쌀과 같지 않느냐고 꾸짖는 것과 같습니다. 어떻게 같겠습니까. 만약 같게 된다면 세상의 맛있는 음식은 모두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박지원도 이에 대해서 반대하며 자송문을 쓰지 않았다.

정조 시기에 활자 80만 자를 새롭게 만들었다. ‘한구자’, ‘정리자’, ‘생생자’가 이에 해당한다. 그런데 모두 한자(漢字) 활자다. 한글 활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정조는 성리학자이며 예학자 우암 송시열을 존경해 그를 송자(宋子), 송부자(宋夫子)로 성인의 반열에 올리고 국가의 스승으로 선포했다.

북학파의 주장은 여전히 소수에 머물렀다. 청나라는 여전히 배척의 대상이었다. 서양사상의 도입에서도 그렇게 큰 관심이 없었다. 1791년 신해박해로 권상연과 윤치중을 사형시켰다. 천주학은 위축됐다. 1795년(정조 19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 밀입국 사건 이후 정약용이 외직으로 쫓겨났고, 남인 영수 채체공은 급속히 위축됐다.

조선은 대외문호를 개방하지 않았고, 여전히 무역에서 폐쇄적인 국가였다. 세계의 문물이 마음대로 들고 나갈 수 없으며 국가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공업적 산업과 무역이 없는 문화 군주는 허무했다. 더구나 성리학의 나라, 소중화를 꿈꾼 이념적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민생을 어렵게 했다.

정조의 호는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다. 만개의 개천에 미치는 달과 같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 개인이 뛰어난 점은 충분히 인정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나라의 리더였기 때문에 그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평가돼야 한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과 살해 위협은 개인적으로는 비극적인 일이지만 국가나 민생의 관점에서는 다른 문제일 수 있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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