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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스타일>에서 엣지녀 박 기자는 하고 싶은 대로 회사건 남자건 내키는 대로 주무른다. 그럼에도 멋있는 남자는 그를 좋아한다.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도 부잣집 도련님은 자기 멋대로인 당당녀 삼순을 좋아하게 된다. <아가씨를 부탁해>의 윤은혜처럼 돈이 없어도 말이다.
사회 반영 탓일까. 엣지녀, 건어물녀, 철벽녀, 우엉남, 고충남, 초식남은 모두 자기애의 범주에 있다. 최근 남성을 향한 부정적 용어가 많아졌다. 완소남, 훈남을 밀어낸 2PM(투피엠)의 짐승남(한국판 육식남)은 전통적이다. 결혼 기피 대상인 초식남을 넘어 김밥우엉처럼 흐물거리는 우엉남, 말썽덩어리 고충남을 보면 남성 정체성이 모호해진 것만은 사실이다.
이에 맞선 건어물녀가 대수는 아니다. 이상형이 아니면 철벽수비하는 철벽녀에게 우엉남이나 고충남은 완전 혐오 대상이다. 누군가 이미 채간 품절남을 그리며 철벽녀들이 원하는 것은 트로피 남편일지 모르겠다. 외조하면서도 사회적으로 멋있는 남편이니 셔터맨과 달리 백수나 무능력자가 아닌 데다 전문 직업까지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런 남성은 일찍 서두르지 않으면 잡을 수 없다. 건어물녀들이 자기 삶에만 집중했을수록 괜찮은 남자들은 일찍 품절되고, 고충남이나 우엉남·초식남이 우글거린다. 철벽녀가 되면 더 심해진다. 일본의 곤카쓰(婚活)를 보면 어느새 결혼은 아무렇게나가 아니라 취업처럼 일찍부터 공부와 전략 수립이 필요하다. 자기 성(城)에 갇힌 초식남, 건어물녀, 철벽녀에서 뒤늦게 벗어나려면 쉽지 않기 때문에 혼활은 더 필사적이다. 나르시시즘의 대중문화 콘텐츠로 도피해도 시간은 절대불변으로 흐른다.
처음부터 소통과 배려에 길이 있다. 성에 들어앉는 게 아니라 일찍부터 길들이기와 훈련이 필요하다. 중증 엣지녀 같은 소통 거부자에게 불꽃 같은 사랑은 하이틴 로맨스나 나르시시즘의 칙릿 드라마에서만 가능하다. ‘나는 나일 뿐’이라는 과잉 자기애에 빠진 이들을 좋아할 이성은 없다. 영화 <작은 신의 아이들>에서 사라와 제임스가 다시 결합한 것은 자기 성(城)에서 나와 서로에 대한 길들이기와 소통, 배려의지 때문이었다.
김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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