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스스로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는 것, 인공지능 이길 것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6. 8. 9. 17:03

스스로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는 것, 인공지능 이길 것

-<미움받을 용기 2>, 리뷰

 



이 책은 <미움 받을 용기>의 후속편으로 철학자와 청년의 대화체로 여전히 이뤄져 있다. 아들러 의 심리학 개념을 배우고 실천했던 청년이 3년 만에 찾아와 아들러 이론의 허구성과 문제점을 질타하면서 철학자와 대화를 나눈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청년이 사서에서 교사가 되었기 때문에 교육에 관한 이야기가 실제적이다. 현장에서 돌아온 청년은 현실과 이론의 차이를 집중 비판한다. 이에 대해 철학자가 어떻게 이야기할지 궁금하게 만드는 것이 이 책의 기본 형식인 셈이다. 분노하는 청년의 성토에 대해 철학자는 아들러 이론을 안다고 해서 당장에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을 다시금 말한다. 그것은 하나의 관점, 안경 렌즈와 같기 때문이다. 그는 당장에 아들러의 이론을 안다고 삶이 모두 달라지거나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끊임없는 용기와 실천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는 것. 철학자는 무엇보다 사랑을 말한다. 물론 청년은 너무 빤한 이야기라고 코웃음을 친다. 철학자는 것이 빤할 수 없으며, 힘들기 때문에 끊임없는 행보가 뒷받침될 때 가능하며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이 가야할 존재적 이유라고 말한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철학자는 서로 간의 행복을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청년이 교사가 되었으니 교육도 이러한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것은 자립인데, 그것도 있는 그대로 학생들을 바라보고 그것을 존중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교육자는 스스로 그러한 존중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럴 때 다른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따를 수가 있다. 교육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의 출발이라고 말한다. ‘존중이라는 것은 타인의 관심사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아무리 그것이 저속하고, 삿된 일이라도 말이다. 타인의 눈으로 보고, 타인의 귀로 듣고, 타인의 마음으로 느끼는 것, 이른바 공동체 감각이 아들러 심리학의 중심 개념임을 강조한다. 이를 위해 공감이라는 기술이 필요함을 다시 강조한다. 불쌍한 나, 고통스러운 나라는 자아상에서 탈피하고, 그런 과거에서 벗어나 오로지 앞으로 어떻게 진전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그대로 대하는 것, 존중 혹은 존경에 대해서 본격적인 논의를 펼친다. 과연 그것이 실현될 수 있을까 싶은 청년의 질문에 따른다. 철학자는 상벌을 금지하는 것은 물론이고 칭찬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당연하게도 청년 교사는 이해하지 못하고 만다. 철학자는 문제 행동에 대해서 벌을 주려고만 하지 말고, 그것의 목적을 파악하여 원인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문제 행동 5단계-칭찬요구, 주목 끌기, 권력투쟁, 복수, 무능의 증명 단계를 그대로 파악해도 일방적으로 혼내는 교육보다는 나을 수 있음을 말한다. 결국, 사람들이 왜 그러한 행동을 하는 지, 그 까닭을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며, 그것은 상대방을 그대로 대하는 것이며, 그것에 맞게 대응 방법을 모색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 등은 청년과 같이 벌을 주지 않으면 질서가 무너지기 쉽다고 생각한다. 철학자는 아이들의 목적이 무엇이고, 그것에 맞게 앞으로 아이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초점을 맞추라고 한다. 당연히 철학자는 폭력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미봉책이라고 한다. 당연히 폭력을 행사하는 이를 존경할 사람은 없다. 당연히 앞으로 어떻게 무엇을 할 것인가는 학생들의 자립에 있는 것이지, 질서 유지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교육자는 그것을 돕기 위해 옆에 있는 사람일뿐 개입자는 아닌 것이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 아들러가 개인심리학, 자아 심리학자임에도 경쟁이 아니라 협력의 원리를 강조한다는 점을 부각한다. 그런데 칭찬하지 말라는 논리에 대해서 청년은 처음부터 강한 부정을 했다. 왜 철학자는 칭찬을 하지 말라는 것일까. 철학자는 칭찬은 상대방을 조종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지만, 청년은 그동안 많은 학생들에게 칭찬을 했고 그들이 좋은 결과를 낳아 뿌듯했다고 항의한다. 철학자의 주장은 칭찬 받는 것이 목적인 사람들이 모이면, 그 공동체는 경쟁에 빠진다고 말한다. 칭찬을 받기 위해 경쟁을 벌이고 독점하려한다는 것. 달리기를 예로 들면 코스를 완주하는 것이 목적이어야 하는데 상대방을 이겨서 칭찬을 들어야 한다는 마음이 더 강해진다는 것이다. 이는 칭찬의 그릇된 방향과 부작용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다. 개인들에 대한 상벌보다는 공동체주의에 입각한 협력의 원리를 강조한다. 아들러 이론이 수평적인 민주주의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것의 전제는 인간이 나약한 부족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서로 협력을 하는 공동체에 기반을 해야 살수가 있다. 그러려면 나, 내가 아니라 공동체 감각과 공감기술에 주목하고 그것을 갈고 닦아야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고는 살수 없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소속감을 원한다. 하지만 그 소속감은 남의 인정이 아니라 스스로 부여한 가치에 따른다. 뛰어나야 한다는 것은 열등감이며 다른 사람의 평가에 의존하는 반()자립 태도이다. 타인을 돕거나 그것을 통해 인정을 받으려는 것도 결국에는 열등감의 현상이며 나아가 메시아 콤플렉스의 일종이라고 본다. 자기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종속적 태도인 것이다. 무엇보다 본격적으로 일, 교우, 사랑이라고 하는 세 가지 인생의 중요한 과제를 언급한다.

 

네 번째 이야기에서는 본격적으로 일의 관계, 교우(交友)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한다. 고통이 그러하듯이 모든 기쁨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문제가 있다고 해서 인간관계를 끊는다면 해결될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강조한다. 아들러는 우리는 교우의 관계를 통해서 타인의 눈으로 보고 타인의 귀로 듣고 타인의 마음으로 느낀다.”고 했다. 거꾸로 교우에 뛰어들지 못하는 사람은 공동체에서 설 자리가 없다고 한다. 아이들이 교우를 배우고 공동체 감각을 발굴하는 곳은 학교라고 새삼 강조한다. 일의 관계는 신용의 관계이고, 교우의 관계는 신뢰의 관계이다. 부연하자면, 신용은 상대가 가진 조건을 믿는 것이고 신뢰는 아무 조건이 없이 상대방을 믿는 것이다. 당연히 외적 요건이 개입된 상황에서는 교우관계를 맺을 수가 없다. 그럼 일의 관계는 신뢰와 관계가 없는 것일까. 이를 위해 왜 인간이 일을 해야 하는지 묻게 된다. 여기에서 인류가 사회를 만든 이유가 나온다. 철학자는 인간이 일을 하는 이유는 생존을 하기 위해서라고 하면서 인간은 나약하기에 같이 협력을 해야 했고, 더 나은 성과를 위해서 분업체계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타인과 분업을 하려면 그 사람을 믿어야 한다. 그것은 신용에 해당한다. 그런데, 분업에서는 좋거나 나쁘다라는 선악 판단이 없다.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각자의 기능적인 분업적 역할이 필요하다. 장관, 기술자, 청소부, 배달원 등등 모두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각자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면 된다. 그렇게 존중하는 것, 그 사람 자체를 존경하는 것은 신뢰에 해당하는 것이다. 교우관계가 되려면 이것에서 좀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 다른 사람은 그냥 그대로 믿는 것이 중요하다. 먼저 손을 내밀어야 손을 잡아주는 법과 같다. 손을 내었는데, 그가 손을 내밀지 않는 것은 상대방이 판단 선택할 과제이다. 무엇보다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불안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고 손을 내밀지 못한다. 진정한 교유를 위해서는 자신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여야 한다. 받지 않으면 주지 않는다는 것은 구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아들러는 왜 이런 고민을 한 것일까. 그것은 철저한 현실 경험 때문이었다. 프로이트는 죽음의 충동(토데스트리프)이나 공격본능(타나토스)을 연구했지만, 아들러가 공동체 감각에 주목한 것은 1차 세계대전 참전 이후에 그의 고민이 어떻게 하면 전쟁을 막을 것인가에 모아졌기 때문이다.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 있을수록 결과는 너와 나, 모두에게 파괴적이 될 것임을 강조한다.

 

다섯 번째 이야기는 이 책의 모든 논의들이 사랑에 모아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철학자가

강조하는 것은 빠지는 사랑이 아니라 하는 사랑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청년은 누구나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철학자는 의지력을 가지고 쌓아올려야 하기 때문에 사랑의 과제가 어렵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려움에도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그러한 사랑의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니라 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아들러는 신데렐라 이야기에서 왕자와 신데렐라가 결혼한 상황 이후에 주목한다고 말했다. 과연 그들이 결혼생활이 행복할까에 관심이 가기 때문이다. 이는 결혼은 시작에 불과한데 그 이후에 두 사람 사이의 결혼 생활이 잘되었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흔히 철학이나 물리학, 수학, 화학 등의 학문은 대개 혼자서 수행하지만 사랑은 교우와 마찬가지로 함께 수행하는 것이다. 특히 사랑은 두 사람이 수행하는 과제라는 점을 간과하고 운명적인 사랑만 기다리기 쉽다는 것이다.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이런 것을 묘사하는 것은 바로 현실에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별다른 노력 없이 평생 빠질 수 있는 사랑이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서 운명 같은 사랑을 노래하는 문화콘텐츠가 많다. 더구나 이것은 사랑에는 기술이 필요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에리히 프롬이 강조했듯이 사랑은 기술과 이를 위한 훈련이 필요하다. 아들러는 사랑은 진정한 자립이라고 한다. 어린 아이들은 자신의 나약함을 통해 부모를 지배하려 하지만 그렇게 영원히 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랑은 계속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인 아이의 상태를 벗어나 상대에게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는 두 사람의 관계성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은 자립 상태이어야 가능하다. 하지만 많은 경우 일방적으로 자신에게 사랑을 주기만을 바란다. 그런 사랑을 요구하거나 그런 사랑을 주는 듯한 배우자를 만나 행복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게 된다. 많은 경우에는 그러한 사랑을 줄 것처럼 위장을 하거나 은폐를 하여 더욱 문제가 커지게 된다. 이러한 점은 결국 타인의 관심사 타인에 대한 느낌을 공감하는 것, 공동체 감각과 다 연결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스스로 존재 자체를 긍정할 때 다른 사람의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고 존중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관계가 형성되고 협력이나 교우, 사랑이 함께 이뤄질 수 있다. 스스로 자신을 학대하고 비하하며 열등감과 불안감에 있을수록 자기중심성이나 외로움과 고립감은 더욱 강화되고 관계는 단절된다. 혼자라고 느낄수록 절대적인 힘을 추구하게 되고 사회적 성공과 지위에 집작하고 그것을 성취할수록 그것에 대한 가치 부여 속에서 상대방을 무시, 강박하면서 자신의 페이스에 담으려 하니 더욱 단절에 빠진다. 그렇게 될수록 일방적이고 지배적이며 독재적인 태도를 갖게 되면서 악순환에 빠진다.

 

프로이트나 융은 과거 혹은 무의식의 상태를 강조한다. 아들러는 그것보다는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태도와 행동을 강조한다. 무의식의 이드나 슈퍼에고 집단성을 벗어나 자아 자체의 현실적인 과제들과 그것의 실천에 따른 행복감을 말한다. 사실 아들러의 이론은 수많은 자아 개발서를 통해서 전파되어 왔다. 하지만 그의 명성은 프로이트나 융에 비해 밀렸기 때문에 인용을 하지 않고 쓰여 왔다. ‘미움 받을 용기의 저자들은 그의 이름을 당당하게 밝히며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는 대담을 감행했다. 그것은 어쩌면 본질에 대한 신념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그것에는 기획력도 한 몫 했음을 잊을 수 없다. 미움 받을 용기가 필요한 이들에게 그 제목 자체가 어필하고 있다는 것은 결국 사랑도 일도 두려움은 벗고 스스로 결단을 내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읽은 이들이 이미 느끼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세상에 가만히 있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그 하는 짓의 배경을 이 책을 통해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알파고 시대에 인간이 다른 존재와 다른 점은 스스로 나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같이 어울려서 살 수밖에 없는 존재적 특성이다. 그것은 변하지 않을 것이며 그것이 인공지능을 이기는 인간의 우월한 점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많은 사람들의 개개인의 존재적 가치를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데서부터 다시금 출발해야 한다. 당연히 우리 스스로부터 말이다.

글/ 김헌식(연구자,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