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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플 운동은 악플에서 벤치마킹 해야 성공한다.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09. 3. 17. 14:45

선플이 악플을 이기려면 ´재밌어야한다´

악플러들의 사회적 특성과 심리적 요인 분석 선행되어야

최근 악플에 대응한 선플 운동이 일어나 사회적으로 호응을 얻고 있다. 선플 운동이 더 성공하기 위해서는 리플 문화와 악플을 다는 이들의 심리를 같이 볼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 세계적으로 유례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리플(댓글)문화가 발달한 것은 사회문화적 구조와 밀접하다. 한국사회의 폐쇄성, 의사소통의 부재 때문이다.

원론적으로 댓글은 직접 의사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의사소통하는 것이다. 이렇게 간접적인 의사소통의 수단인 인터넷 댓글 문화가 활발한 것은 거꾸로 한국 사회가 대화와 소통이 원활한 사회는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직접 소통이 적을 뿐만 아니라 진실의 교감에도 장애가 적지 않다. 직접적으로 실명을 밝힐 수 없는, 익명성 뒤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닫힌 사회’라는 특성이 있다.

예컨대, 내부 고발자를 부정적으로 여기거나 그들이 정당한 발언을 했음에도 보호받지 못하는 사회적인 풍토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댓글은 쌍방향 의사소통의 긍정적인 점이 있어서 ‘댓글 민주주의’, ‘댓글 저널리즘’이라는 말도 나오게 되었다. 또 댓글은 창작을 북돋운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말이 있다. 미움이나 비판도 결국 상대방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댓글 자체가 표현은 물론 창작에 큰 힘이 된다. 즉 댓글은 표현의 자유를 더욱 증진 시키는 것은 물론 문화콘텐츠의 다양성과 질을 더 높일 수 있다.

문제는 악플이다. 악플은 악의적인 비방이나 욕이 가득한 댓글을 말한다. 이러한 악플을 다는 이들을 악플러라고 하고, 집요하게 많은 양의 악플을 양산하는 이들을 ‘울트라 악플러’라고 부르기도 한다. 텔레비전에 출연한 여고생이 악플 때문에 자살하거나 연예인들의 자살에도 악플이 큰 영향을 미친 사례 같은 악영향은 이미 널리 알려졌다. 이미 인격적 가치를 떨어뜨리는 댓글은 모욕죄에 해당한다는 대법원 판결도 있다.

이 때문에 악플 보다는 선플을 달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사전적인 의미로 선플은 ´꼬리말을 달 수 있는 게시물에 꼬리말을 좋게 올리는 것´ 또한 ´게시판에 올려진 내용이 칭찬받아 마땅해서 좋게 평가하여 게시판 아래 꼬리말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선플´이라는 게 반드시 칭찬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지적도 좀 따뜻하게 하고, 받을 사람의 입장에 서서 지적을 해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결과는 긍정적이다.

제주의 한 중학교에서는 악플이 극성을 부렸는데, 학생들에게 선플을 다는 숙제를 내주자 그것이 일상화되어 한 달 만에 학교 홈페이지에 악플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 또한 시중 유명한 한 은행에서는 골칫거리 사원들에게 칭찬과 격려의 댓글을 보내자 문제의 직원이 영업왕에 오르는 긍정적인 결과로 나타났다고 한다.

이 은행에서는 약 2년간 6만 6000여개의 칭찬 선플이 직원들 간에 오갔다고 한다. 포장재를 생산하는 한 회사에서는 선플 달기를 실시한지 1년 동안 10%의 생산성 효과를 가져왔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학교와 기업, 시민단체가 이러한 선플 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고, 차츰 더욱 호응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마치 칭찬운동이 사회적으로 큰 흐름을 탔던 것과 마찬가지다.

다만, 1회성 이벤트가 되지 않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더 나은 선플을 위해서는 악플러의 심리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악플러는 아무 곳에나 달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기사나 내용물에 악플을 단다. 예컨대, 대형 신문사의 사이트에 악플을 달기보다는 수 백 만 명이 보는 포털에 주목받고 있는 내용들에 악플을 단다. 선플은 이곳에 이루어져야 한다.

나아가 악플의 심리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놀이성이고, 다른 하나는 정의감이다. 악플(악성 댓글) 달기는 하나의 놀이가 될 때, 그 내용이 아무리 심각하거나 폭력적이라고 해도 즐김의 대상이 된다. 악플 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전적인 즐거움이 된다. 이 즐거움에는 가학성 쾌감과 함께 권력적 우월 욕구의 심리가 있다. 악플을 다는 자신이 마치 우월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여긴다.

놀이성보다도 치명적인 것이 정의감 심리다. 공공의 적 같이 규정된 이에게 공격이 가해져야 하고, 그들의 사생활이나 인격은 부차적이다. 특히, 연예인들에게 악플이 많이 쏟아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악플러들은, 연예인들은 별다른 노력 없이 부와 명예를 누리고, 세상의 주목을 받는 존재, 실체와 관계없이 절대적인 권력자처럼 본다. 이런 인식에 따른다면 연예인 악플은 ´공공의 적´에 대한 공격쯤이 된다. 악플러는 정의의 사자가 되지만, 연예인들이 무고하게 고통 받고 자살 충동에 이른다.

다만, 악플러가 꼭 고정적으로 따로 정해져 있다고만 볼 수는 없다. 누구라도 인터넷 심리에 휘말리면 쏠림에 따라 악플러가 될 수 있다. 일종의 ´악플 지름신´이 존재한다. 순간적인 흥분 상태에서 지름신이 강림하고, 이때 악플을 질러버린다. 순간적인 흥분을 제어하지 못하면 그것이 ´악플 중독증´으로 이어진다. 악플 중독증은 악플에 스스로 무감각해지는 현상이다.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은 그것이 욕인지 모르는 것과 같다. 그것은 스스로 순간순간 받는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비대면의 익명성의 공간에서 그것은 칼이 되고 총이 된다. 개인적인 분풀이나 감정 표현은 댓글 저널리즘도, 여론 형성도 아니며, 정의를 지키는 행동은 분명 더욱 아니다.

선플이 더 활성화되려면 악플러의 심리를 분석하고 그것에 토대를 두어 대응을 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선플을 다는 행위 자체가 재미있어야 한다. 스트레스를 악플이 아니라 선플로 해소하도록 해야 한다. 악플보다 선플이 긍정적인 결과를 낳으며, 결국 상대방도 악플이 아니라 선플일수록 더 설득된다는 점을 인식시켜야 한다.

또한 악플을 다는 것보다 선플을 다는 행위자가 더 우월하고 의미 있는 존재라는 점을 지속적으로 환기시켜야 한다. 악플을 통해 자신의 존재적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선플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어떤 명분이라도 악플은 정의가 될 수 없다. 아울러 독선적인 정의감을 합리화하지 않도록 선플의 포용성도 가져야 한다. 무엇보다 닫힌 사회에서 무조건적인 선플 달기 보다는 대화와 소통의 새로운 선순환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