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선덕여왕이 태양...을 삼켰다? 왜...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09. 8. 24. 15:03
 

   덕만은 오르고 정우는 왜 떨어지나
-개인주의적 이기주의 vs 이타주의적  개인주의

월화 드라마 ‘미실’과 수목 드라마 ‘태양을 삼켜라’는 묘하게도 ‘태양’이라는 상징과 연결되어 있다. 미실은 사다함의 매화 즉 책력으로 월식을 예언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공고하게 만든다. 천명공주의 죽음으로 빚어진 위기 상황을 다시 월식의 예측으로 돌파하려고 한다. 여기에서 월식은 지구 그림자가 달을 가리는 현상이다. 왕실과 백성은 미실의 예언력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 이로써 미실의 힘은 책력에서 나온다는 사실이 덕만 쪽에 알려진다.


이번에는 책력의 힘을 빌려 일식을 예언하여 위기를 돌파하려 한다. 일식은 태양을 달이 가리는 현상이다. 하지만 덕만이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일식의 정확한 일자를 계산할 수 있는 월천대사를 미실 쪽에서 자신의 편으로 끌어오려 한다. 결국 태양을 두고 덕만과 미실이 한판 승부를 걸게 되었다.


태양은 대체적으로 동서양에서 남성의 상징으로 일컬어져왔다. 일식은 여성이 남성을 삼켜버리는 것이다. 미실은 결국 무수한 남성들을 삼켜버렸고, 이를 일식이 상징하고 있는지 모른다. 어쨌든 그 주인공이 미실이든 선덕이든 남성 리더십은 지고 여성리더십은 떠오른다는 당시대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태양을 삼켜라’라는 이름을 보면 고대인들에게 태양이 경외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면 현대인들에게 태양은 정복의 대상으로 보인다. 드라마 ‘태양을 삼켜라’에서 뜨거운 태양은 인간의 꿈과 욕망을 투영하는 대상이다. 그것은 꿈을 이루려는 인간들의 고군분투를 그린 것이다.


결국 미실(고현정)이나 김정우(지성)는 태양을 통해 개인의 욕망을 성취하는 상징적 캐릭터가 된다. 하지만 덕만은 적어도 자신의 욕망 충족을 위해서 고군분투하지는 않았다. 명분과 정의, 공동체적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미실이 왜 몰락하는가와 연결된다. 드라마 ‘태양을 삼켜라’의 정우는 이러한 점에서 드라마 ‘올인’의 인하와 대비된다.


드라마 ‘올인’에서 인하(이병헌)는 자신보다는 남을 위해 의리를 지키면서 산다. 남을 위해 살다보니 그것이 덫이 되어 감옥에도 가고 해외 밀항 생활을 하는 것은 물론 사랑하는 사람과도 이별하게 된다. ‘태양을 삼켜라’에서 정우(지성)는 장민호에게 매달리는 것은 자신의 입신출세를 위해서였다.


물론 정우는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터에 장민호를 통해 인생 역전을 꿈꾼다. 이점이 인하와는 다른 점이다. 인하가 밑바닥 하류에서 주변사람들과 돈독하게 살려했던 것과는 반대다. 그 이후에 정우는 자신의 개인사적인 복수 때문에 잭슨 등에게 배신을 저지른다.


이는 한국사회의 변화를 말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는 사회적 격동에 휩쓸리는 인간 군상이 과거의 한국인들이 자화상이었다면, 지금은 개인들의 적극적인 선택에 따라 운명이 달라지고 있는지 모른다.


다르게 말하면 자신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표출하고 그것을 성취하는 것에 대해서 거리낌이 없는 것이다. ‘올인’의 인하는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지 않는다. 수동적인 성격유형을 보인다. 하지만 새옹지마와 같이 위기가 기회가 되어 인하의 인생이 바뀌고 그때서야 적극적인 행동을 보인다.


기회가 올 때 행동을 하는 타입이 인하라면, 자신이 스스로 기회를 만들고 적극적으로 길을 만들어가는 것이 ‘태양을 삼켜라’의 정우다. 정우의 불행은 상호성의 원리에 어긋나게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장민호에게서 비롯된다.


즉 일정한 행동에 대한 대가를 주지 않은 장민호는 배신자이며 이는 명분이 아니라 경제적 관점에서 인간관계를 파악하는 경제적, 자본주의적 인간관에 가깝게 되었다. 이는 ‘올인’의 인하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정우와 같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꿈을 이루어가는 모습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맞는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 일반 대중들은 인하에 더 몰입과 동일시감을 갖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고통과 비극의 구조 속에서 허우적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많기 때문이다. ‘태양을 삼켜라’에서 아쉬운 부분은 이것에 함축되어 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도와주다가 결국 고통을 받고 더 좋지 않은 범죄를 저지르는 주인공에 대중들은 더 몰입하고 동일시를 갖게 된다.


정우처럼 자신의 욕망과 꿈을 더 중요시하면서 폭력과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형은 덜 각광받는 것이 대중심리이다. 그것은 선악의 이분법에 더 친숙한 문화적 정체성을 갖고 있는 한국인들에게는 더욱 강할 것이다. 더구나 어차피 그들은 범죄를 저지르는 구조 속에 빠져있음으로 해피엔딩으로만 끝난다면 공영방송에 맞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보았을 때 차츰 ´태양을 삼켜라´가 시청률을 확보하지 못하고, 계속 떨어지는 것이며, '선덕여왕'의 시청률이 올라가는 것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무조건 이타적이고 공동체주의를 지향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들의 적절한 결합이 필요하다. ‘선덕여왕’도 미실의 개인의 욕망 추구보다는 덕만의 공동체적 이타주의적 개인주의가 더 흥미롭게 때문이다.


덕만은 '말도 안 되는 이 신라를 먹겠다'고 했다. 이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 때문에 온 덕만이 신라 계림에 왔지만 현실 정치의 문제점을 느끼고, 명분을 개인의 동기와 결합시킨 것이다. 결합에도 우선 순위는 있다. 종국에는 개인주의나 욕망의 추구보다는 공동체적 가치가 중요하겠다. '태양을 삼켜라'는 결국 아버지에 대한 복수가 되니 이래도 저래도 사적인 영역에 함몰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