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브릿팝에서 케이 팝의 미래를?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20. 8. 6. 07:42

브릿팝에서 케이 팝의 미래를?

-권범준의 브릿팝 리뷰

 

                                                     글/김헌식(문화정보콘텐츠학 박사, 평론가)

 

대형 서점이든 인터넷 서점에서 음악 관련 신간은 드물지만 드문 신간 가운데 대부분은 클래식 관련 책들이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클래식 애호가들은 발끈할 지도 모른다. 클래식 책 조차 그렇게 많지는 않기 때문이겠다. 어쨌든 클래식 책에 비해 대중음악을 다룬 책들은 거의 없다. 그런데 대중음악에 관한 책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지적을 할 수 있다. 요즘에 대중음악에 관한 책들이 많아졌다는 것은 느낌이 단지 아닐 수도 있다. 예컨대 쏟아지는 방탄소년단에 관한 책들이나 한류 관련 신간들이 빈번하게 나오고 있는 것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좀 외면 받던 대중음악이 주목받는 일은 바람직한 일이다. 어쨌든 한 시대에서 각광받는 음악이고 그 음악을 통해서 위안을 받고 삶의 여력을 얻기에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책들의 대체적인 경향은 경영 마케팅에 가깝다. 경제 효과를 전제로 성공 비결이나 노하우 그리고 콘텐츠 전략차원에서 접근하는 경향이 빈번하다. 대중음악에 관해 클래식 관련 책들처럼 노래 그 자체에 주목하고 당대의 시대적 배경을 살피는 책들은 그렇기 많지 않다. 더구나 스마트 모바일이라 불리는 디지털 시대의 음악의 공유 문화를 볼 떼 책이 과연 필요할까 생각이 들 수고 있겠기 때문이다. 당장에 구글이나 유튜브 그리고 페북, 인스타를 본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음악적 취향을 충족시킬 수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권범준의 브릿팝은 신기한 책이다. 브릿팝의 백과사전 이상의 가치를 갖는다. 1990년대 영국에서 중흥기를 누렸던 브릿팝에 대한 사회문화적인 맥락만이 아니라 각 뮤지션과 음반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묵직한 분량 속에서 간결하면서도 심층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대개 브릿팝이라고 하면 스웨이드, 블러, 오아시스, 엘라스티카, 펄프 등을 꼽는다. 하지만 이 책은 브릿팝이 본격적으로 전성기를 누리기전의 계보를 훑어낸다. 예컨대 라스, 프라이멀 스크림, 세인트 에티엔, 데님 등 본격적인 브릿팝이 주목을 받기 전에 브릿팝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시원들을 브릿팝의 전당에 소환하고 있다. 아울러 스미스, 모리시, 폴 웰러 스톤 로지스 등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브릿 팝의 신들도 잊지 않는다. 물론 중심 내용은 국내에서 잘 언급이 안될 수 있는 브릿팝 뮤지션들을 망라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의 특징이자 장점은 밴드별로 묶어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앨범별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냉정한 판단 기준도 있어서 2000년대 이후에 등장한 영국의 록밴드에 관해서는 무리하게 브릿팝의 범주에 넣는 것을 경계하는 기조에서 라디오헤드, 콜드플레이, 플라시보 등을 다뤄내고도 있다. 이 정도라면 마니아를 위한 가이드북이라고 할만하다. 어떻게 보면 복고 코드에 부합하려는 책일 수도 있다. 한국에도 90년대의 음악과 뮤지션들이 각종 매체만이 아니라 SNS에서 소환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대중음악에 관한 책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클래식 책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 책이 브릿팝의 고전곡들을 집대성하고 있기 때문이겠다. 이 책으로 인해 브릿팝은 이미 클래식이 된 것이다. 하지만 클래식에 대한 평가들이 범하는 것처럼 특정 뮤지션과 앨범을 신화하거나 영웅화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지는 않다. 특히 이 책의 음악사적 생명력은 음악이 어떻게 영향을 주기도하고 상호 경쟁을 하거나 자신만의 정체성을 따로 구분 지으면서 진일보해나가는지 밝히는 점에 있다.

 

브릿팝의 모든 것.

 

사실 브릿팝 하면 못마땅해하는 독자들도 있을 수 있다. 브릿팝은 국가주의적 냄새가 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음악과 다른 영국 음악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장르가 브릿팝이기 때문이다. 음악에 국가를 내세운다는 것이 과연 예술정신에 맞는 것인지 당혹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물론 국가주의를 표방하는 음악이 절대적으로 옳을 수 없다. 이데올로기로 소비하는 음악은 생명력이 강할 수도 없다. 흔히 국가주의는 밑도 끝도 없는 국가우월주의에 확장되기 쉽다. 하지만 브릿팝의 국가주의는 이런 우월주의나 폐쇄주의보다는 음악적 차별성에 대한 고민의 응집에 더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브릿팝은 문화의 변화를 담고 있다. 브릿팝이라는 신조어를 만든 음악 저널리스트 스튜어트 매토니는 브릿팝이라는 말을 젊은 밴드에 대해서만 쓰기를 원했던 것은 우리 팝 문화 속에서 부활시켜야 하는 그들의 영국식 정서, 즉 재치, 풍자, , 절제, 세련된 헤어스타일에 대해서였다.”고 말했다. 그는 브릿팝이 하나의 문화를 생산하기를 소망했고, 그것은 단순한 미국식 문화의 모방을 경계하자는 뜻을 비쳤다. 꼭 그의 말이 아니어도 브릿팝은 새로운 창작의 문화를 음악에 반영하자는 의식이 투영된 문화운동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 책을 꼽은 이유는 정작 다른 맥락에 있다. 바로 브릿팝에 견주어 볼 때 케이 팝의 미래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규탁의 '갈등하는 K, pop한국적인 동시에 세계적인 음악'을 집어 들었는데 최종적으로 권범준의 브릿팝을 선택한 이유다. 지금은 케이 팝 자체보다는 다른 비교사례를 통해서 미래를 가늠하는 작업이 필요해 보이기 때문이다. 케이 팝도 브릿팝처럼 음악 장르는 아니다. 하지만 일종의 브릿팝처럼 문화운동이 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문화적 자극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고 음악적 영감과 이로 인한 창작이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케이 팝 문화운동이전에 비즈니스 브랜드 관점이 강하다는 비판도 가능할 것이다. 그것도 국가라는 브랜드 말이다. 설령 케이 팝이라는 국적이 붙어 있지만 국가 브랜드에 함몰될 수 없다. 우선해야하는 것은 개성과 정체성이면서도 팬들을 위한 열린 소통과 개방성이다. 그것이 그나마 방탄소년단이나 블랙핑크, 세븐틴, 몬스터 엑스, 트와이스, 엑소 등이 주목을 받는 것이겠다. 이런 점은 브릿팝보다는 오히려 케이 팝이 뛰어난 점이다. 더구나 브릿팝과 달리 전세계 숨겨진 팬까지 연결하는 SNS라는 강력한 팬덤의 거멀못이 존재한다. 이에 무엇보다 서로에게 상호적 존재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책에도 인용되었지만 1990년대 중반 블러의 데이먼 알번은 나를 접근하기 어려운 존재나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정말 좋다.”라고 했다. 이제 막 케이 팝은 같은 동시대의 존재로 인지되었다. 즉 케이 팝은 누구나 와서 공유하고 즐길 수 있는 브랜드는 되었는데 이제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문화운동을 예술적 대중성으로 융합하여 하나의 음악 장르가 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브릿팝처럼 10여년 증흥기를 보내고 사라질지 모른다. 살아있는 생명력은 환경의 요구에 끊임없이 적응하여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클래식이 된 브릿의 교훈일 것이다.

 

글/김헌식(문화정보콘텐츠학 박사, 평론가)

 

*기획회의 8월호에 실린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