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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기피 조장하는 영화 <평양성>?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1. 2. 9. 20:02

<김헌식 칼럼>병역기피 조장하는 영화 평양성?

 2011.02.01 13:53

 




[김헌식 문화평론가]거시기(이문식)는 전쟁에 대해 전장에 참여해서도 내내 회의적이다. 심지어 당나라 이세적과 신라의 김유신-김법민이 대치하는 사이로 거시기는 전쟁은 윗대가리들의 이익을 위한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준익 감독의 전작인 < 황산벌 > 에서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단 한사람은 거시기라는 점이 강조되었다. 일반 병사들은 사랑하는 가족들을 두고 억지로 끌려와서 죽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맥락은 < 황산벌 > 의 연작이라고 할 수 있는 < 평양성 > 에서도 이어지는 것이다. 다만, < 평양성 > 에서는 거시기가 주체적으로 전면에 나서게 된다. < 황산벌 > 에서 은유적으로 표현되었던 주제의식이 평양성에서는 노골적으로 부각이 되고 있는 것이다. < 황산벌 > 에 대해서 우호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은 이러한 거시기가 가지고 있는 민중성을 중요한 평가기준으로 삼았다. 

민중성의 요체는 전쟁은 결국 지배자들의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고, 일반 서민, 백성들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지배계급의 전쟁에 민중들이 이용되고, 결국 죽어갈 뿐이라는 점이 강조된다. 

이러한 메시지가 영화 < 평양성 > 은 전면에 등장하는 것이고 결론도 이에 모아진다. 전작에서는 백제군으로 참여했던 거시기가 이제 신라군에 징집, 편입되어 전장에 참여 한다. 당나라군대의 지휘를 받는 연합군에 배속된 것이다. 역시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 

그런데 거시기는 아내까지 얻어도 다시 전쟁에서 살아남는다. 여기에서 감독의 재치스런 주제형상력이 돋보이기도 한다. 거시기는 일상의 전쟁으로 돌아온다. 일상의 전쟁은 무엇인가. 예컨대,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의 전쟁과 같은 일상의 전쟁을 말한다. 이 대목에서 관객은 웃음을 지으면서도 감독이 말하려는 메시지를 충분히 인식할 수 있다. 

감독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대중적 심리와 욕망이라는 측면에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통상 군대에 가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대개 전쟁은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은 곧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전쟁은 기회이기도 하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전쟁에 자발적으로 나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전쟁에 적극적으로 유인하는 책략이 필요하다. 이 유인책이 바로 전쟁 공적에 따른 상훈을 내리는 것이다. < 평양성 > 에서 이러한 점은 전작 < 황산벌 > 과 달리 보여지는데 바로 문디(이광수)라는 인물을 통해서이다. 문디는 자신의 전쟁과부인 누이들을 먹여살리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군입대했다. 반드시 공적을 세워야하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면 안된다. 

하지만 거시기는 전투기피의 선봉에 선다. 혼자만이 아니라 다른 병사들까지도 전투기피를 부추긴다. 여기에서 문디와 가시기의 갈등과 대립을 통해서 전쟁의 의미를 드러내려 한다. 이러한 측면은 전쟁의 두 측면을 말하는 것이겠다. 하지만 이 두 명의 인물은 정말 서로 대립과 갈등을 일으킨다고 볼 수가 없다. 

두 사람이 결국 전쟁에 진정으로 참여하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알고보면 전쟁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문디도 공적에 따른 상훈이 없다면, 즉 토지를 주지 않으면 참여를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문디가 특공대 선발조건에서 토지를 올려주지 않으면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두 사람은 공통점은 철저하게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자라는 것이다. 거시기와 문디에게 나라와 사회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그들의 머리에 그러한 개념은 없다. 이 때문인지 거시기는 전작에서는 논농사를 짓는 남부평야 지대의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아내를 얻자 < 평양성 > 에서는 이마저도 포기한다. 평야 지대는 그나마 공동체적인 마을 문화가 존재하는 곳이다. 거시기는 아내는 물론 어머니까지 블러모아 삼수갑산으로 데리고 간다. 

거시기는 오지로 데리고 가는 아들에게 불평을 연이어 터트리는데 거시기느 그 이유를 산수갑산에는 전쟁이 없고 징집될 일이 없다고 말한다. 결국 병역, 징집을 피하기 위해서 산골로 들어간 것이다. 징집을 피하기 위해서 산수갑산 척박한 땅을 찾아가는 남편을 따라가는 아내가 과연 있을까 싶다. 이 영화는 남성 환타지, 도피적 영화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군대에 가기 싫은 대중심리에 기반한 군대 영화가 된다. 

한편으로는 이 영화가 연이은 전쟁에 시달린 민초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겠다. 김유신은 고구려가 망하면 전쟁은 없다고 말하면서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려 한다. 하지만 전쟁은 당나라와 계속 되었다. 당나라와 전쟁을 벌인 뒤 다시 말갈이나 거란, 발해와 싸웠다. 그렇지만 거시기는 현실도피했다. 

단지 현실도피이기 때문에 비판을 받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거시기의 행동으로 병역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다른 이에게 전가한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도망을 가면 그 빈 자리를 다른 사람이 채워야 하는데, 역사적으로 볼 때 징집 연령이 낮아지기도 했다. 즉, 어린 소년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거시기가 도망하면 다른 누군가가 그자리를 채워야 하고, 그 사람은 소년일 수도 있고 노인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전쟁은 그들만을 위한 것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에 가서 거시기는 아내를 얻었고 아내는 산골오지로 끌려(?)가게 되었다. 전쟁은 단순히 지배계급의 이익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공훈을 통해 자신의 식읍을 차지하기 위한 기회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논리라면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나야하고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 문디의 논리는 침략자 당의 논리와 같다. 거시기의 행동은 오히려 민중과 서민을 노예의 나락으로 빠지게 한다. 

무엇보다 사회는 개인주의적 자유주의만으로 움직이지만은 않다. 전쟁도 마찬가지다. 자발적 영웅은 개인적 자유주의자들이 아니다. 개인적 자유주의자들은 진정한 리더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많은 경우, 사익을 벗어난 정신으로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헌신, 산화해간 이들은 많다. 그것이 무고한 희생을 요구하는 전쟁의 와중에도 다른 희생들을 의미있게 만들었다. 자신만을 위한 거시기의 행동을 이해는 되지만 존경하지는 않는다. 위기상황에서 자신보다 남을 위해 살신성인하는 이들이 역사를 움직인다. 그것에 대한 감복이 어떠한 유인책보다 힘을 발휘한다. 

다만, 영화 < 평양성 > 도 전쟁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하나일 뿐이라면 용인할 수밖에 없다. 그간 허황된 명분의 전쟁 영상콘텐츠가 많았기 때문이겠다. 무엇보다 앞의 사안들은 전쟁 프레임 안에서만 가능하다. 개인과 집단의 생존은 불가분이며 애초에는 물론, 중간과정, 결말에 전쟁을 막는 평화적인 방안추구에 거시기가 나서는 게 낫다. 

글/김헌식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