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문화예술창작과 향유를 누가 주도해 왔는가, 그리고...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6. 4. 16. 09:29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우리는 흔히 문화 예술을 특정 작가들과 그들의 유명 작품들을 통해 기억한다. 이들을 묶어서 낭만주의, 고전주의라는 일정한 유파의 흐름을 연상하기 마련이다. 이런 기억과 연상에 따른다면, 문화예술을 움직이는 것은 작가와 그들의 작품에 따른다고 여길 수 있다. 그들이 주도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특정한 작품들이 유행을 했고 그것이 역사의 기록에 남았다고 말이다. 현대도 그렇지만 이런 작가들과 작품이 선호되려면 그것을 가치가 있게 여기고 공유하는 이들이 존재해야 한다. 작가와 작품은 홀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사회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적어도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려면 말이다.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잘 살펴볼 수 있는 책이 바로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사회사라고 말한 이유는 바로 문화예술이 어떻게 사회 속에서 탄생하고 공유될 수 있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문화예술사()가 아니라 사회사(社會史)이기 때문에 사회 속에서 문화예술이 어떻게 존립해왔는지 보여준다. 여기에서 사회라는 것은 사람들(주체) 간의 관계성이다. 관계성은 결국 사회의 구조와도 밀접하다. 그것이 문화예술의 누구에게 선호되고 그 작품들을 만든 사람들은 사회 구조 속에서 어떤 관계성 속에 있었는지 이 책이 살피는 이유다. 그는 구석기 시대의 동굴벽화부터 20세기의 영화예술까지 이런 관점으로 분석하고 있다. 사회적 제 주체와 사회경제적 양식 토대의 변화에 따라 문화예술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은 선사시대부터 중세시대를 다루고 있다. 우선 선사 시대의 특징은 자연주의인데 재기 넘치고 인상주의 기법을 보인다. 그들은 신성한 힘이나 초월적인 존재 나아가 종교적인 믿음도 없었다. 그들은 사냥을 위해 유랑을 다녔고, 그 사냥 대상인 동물을 소유하려는 뜻에서 그림을 동굴에 그려 넣었다. 그러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그러한 마술 같은 일은 실용적인 목적 그 자체였다. 똑같이 특정 모습을 그려내면 마술효과처럼 얻는다고 믿었다. 이런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 넘어가면서 문화예술은 전환점을 맞이한다. 자연주의에서 기하학 문화예술의 시대가 된다. 농경문화의 신석기 시대가 되면서 농사가 잘되고 못되고는 일정한 법칙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로써 특정한 법칙을 움직이는 대상에 눈을 뜨게 된다. 이와 아울러 종교가 탄생한다. 특히 모든 사물에는 정령이 있다는 애니미즘이 부각된다. 우상, 부적, 신성의 상징, 헌납품, 부장품 등이 심화 된다. 문화 예술작품은 일상 생활과 초월적 세계라는 이중적인 세상에 대한 접근이 이뤄진다. 합법칙적인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질서를 중요시하는 전통주의와 보수주의 그리고 기법 상에서는 추상화, 양식화되기에 이른다. 이런 가운데 기하학 주의는 통일적인 조직과 질서를 만들고 피안의 세계를 지향한다. 구석기 사냥꾼과 달리 신석기에는 예술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전문적으로 분리되었다.


그런데 신석기 다음과 공업과 상업이 결합하여 발달하는 도시 문화에서 사회학적 분석은 복합적이 된다. 그만큼 단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특징들을 잡아낼 수 있다. 그 첫 번째 공간은 고대 오리엔트였다. 오리엔트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말한다. 상업과 수공업의 발달로 부의 증대로 문화예술작품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며 도시 생활에서 각가지 사회세력들 간의 경쟁이 확대되었다. 사원과 왕궁, 도시의 문화공간에서 풍부한 경험과 식견을 가진 전문가 집단이 육성되었고 예술가들도 전문적인 직업군으로 자리를 잡았다. 당연히 그들이 만드는 작품들을 완벽성을 갖추게 되었다. 무엇보다 시장을 갖게 되었고, 다른 국가와 교류를 활발하게 하면서 기하학 주의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개성적이게 되었다. 형식과 전형의 틀에서 벗어난 양식을 낳게 했다. 이집트의 경우 장기간 예술가들에게 일거리를 준 유일한 고용주들은 사제와 제후들이었다. 사원과 궁정은 예술가들이 작품을 전시하는 곳인 셈이었다. 물론 예술가들은 작품 앞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궁정은 한 나라의 정신을 총괄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일정한 방향과 틀에 있어야 했다. 표준화, 조직화, 통합의 모습을 보였고 이는 중세기와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신에게 바치는 제물, 우상 등 언제나 같은 유형의 작품이 주문되었다. 어쨌든 시장 제도의 발달로 자유노동을 하는 작업장이 많이 생겨나고 전문적으로 분화되었다. 말기에 갈수록 왕들에 관한 작품들이 많아졌다. 다양한 시도들이 모색되었는데, 감상자에게 직접 호소해 왕을 칭송하는 궁정예술은 여전했고, 그 가운데 정면성의 원리는 일상을 다루는 자연주의와 함께 끝까지 고수되었다. 그런데 아메노피스 4세 때에는 개인주의적인 특징이 나타났다. 진리에 대한 새로운 애정, 새로운 감각, 새로운 예민함을 통해 작품을 만들도록 했다. 새로운 제제, 표상을 탐구하고 구도를 새롭게 시도했다. 개인 정신생활의 깊은 속, 심리 등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인간적이고 친근한 모습들이 등장했지만 여전히 궁정적이고 인습적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민중예술은 생각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아시리아나 바빌로니아가 있던 메소포타미아는 상업과 수공업은 물론 화폐와 신용제도가 더 확립되어 있어 엄격한 규율에 있어 신선함이 적었다. 왕과 사제 이외에는 예술에 영향력이 없어 개인주의 또는 자연주의는 잘려버렸다. 추상화 합리화가 이집트보다 강했다. 다만 크리티 같은 경우는 독창적이고 자유분방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종교적 영향력이 적었고 상인 계급 스스로가 상업을 주도했기 때문에 자신의 부를 통해 직접 문화예술에 영향을 주었다. 엄숙한 이집트 예술과 달리 크리티 예술은 생기발랄한 모티브를 사용해, 자유롭게 늘어놓는 구도를 좋아했다.


원시 그리스 시대는 원시시대와 같이 주문이나 신탁, 축복 기원에 맞춰 문학을 했다. 조형물도 마찬가지였다. 제사에 쓰이는 주물이나 돌멩이 나뭇조각이었다. 하지만 영웅시대가 되면서 달라지게 된다. 씨족 시대는 사라지고 봉건왕제가 시작된다. 힘을 가진 이들이 지배하는 시대에 신하 또는 국민은 그 왕들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 개인적인 서사시가 아니라 묵직하고 역사적인 내용을 다루는 서사시가 많아진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예술은 명예욕, 칭송받고 싶은 욕망에 따른다. 영웅시대에는 시인이 사제 층에서 분리되고 개인적인 성격이 증대되었다. 노래를 부르는 이들은 개인이었다. 궁정 가창시인은 왕후와 귀족 앞에 노래를 부르고 유랑 음유 시인은 귀족과 영주의 저택이나 민중 축제, 장날에 서민들의 공간에서 서사시를 불렀다. 하지만 서사시는 개별 시인의 작품이 아니라 하나의 시적 유파 전체의 산물이었다. 따라서 시인집단의 작품이었다. 그러한 서사시들은 장에서 불려도 궁정적인 성격이 강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도 결국에는 궁정문학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귀족적인 성격이 강했다. 헤시오도스의 작품에 이르러서야 농민 생활을 통한 대중적인 작품을 담는다. 지주 귀족들에게 억압을 받는 농민들, 민중들의 삶이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적인 생활양식과 상업이 발달하면서 경쟁적인 사고방식이 지배하게 되면서 개인적인 세계관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정신적인 것에 대해서도 개인 재산권의 개념이 등장하고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기원전 700년을 전후하여 조형 예술에서도 아리스토노토스와 같이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개성을 강조하는 예술가들이 등장했다. 이 때 예술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그리스 아케이즘 시대까지 모두 실용예술이었고 아케이즘 시대에는 예술 작품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이때 시인들과 철학자들이 공감한 이들은 돈 많고 적은 시민 층이 아니라 귀족이었다.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엠페도클레스,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등은 귀족이었고 서민 출신의 소포클레스와 플라톤도 귀족적이었다. 고전주의 예술을 이상적 인간상의 묘사라고 본 것이 귀족주의의 표현이었다. 일반대중에게 비극이 공연되었지만, 그 내용은 영웅전설과 영웅적 비극적 생활 감정이라는 점에서 귀족적이었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진정한 의미의 민중연극은 미무스였다. 이는 실생활에 바탕하여 모사와 춤으로 하는 광대극이었다. 축제극장은 도시국가의 선전시설이었는데 국가가 공연되는 작품에 돈을 지불했고 그렇기 때문에 국가 정책과 지배계급의 이해에 합치되는 작품의 공연만 허용했다. 생활양식은 구석기 이후 볼 수 없을 정도로 유동적이고 분방해졌다. 고루한 전통과 편견에서 해방된 것이다. 기원전 5세기가 끝나가면서 예술에서 자연주의적, 개인주의적 요소, 주관적 감정적인 요소들이 점점 범위와 비중을 더해갔다. 소피스트들은 무한한 교육 가능성이 인간에게 있다고 보았다. 자기 인식, 자제력, 비판력, 비판력을 근간으로 하는 서양 문화 이념은 바로 이들에게서 비롯했다. 그들의 사상운동은 시인과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국가를 대신하여 개인이 예술가들의 보호자로 등장하게 되면서 소규모 조각, 사적 성격의 조각, 움직이기 쉬운 조각을 만드는 일이 점점 더 빈번해졌다.




대신전을 만드는 일들은 헬레니즘 시대에 이르렀다. 헬레니즘은 역사상 최초로 국제적인 혼종문화를 창출하고 개별 민족문화의 평준화를 낳았으며 이런 점이 헬레니즘 문화의 근대성을 보여준다. 당시에는 로꼬꼬풍 양식만이 아니라 다양한 양식이 공존하면서 장엄한 것과 섬세하게 아름다운 것이 모두 사랑받았다. 뒤이어 로마시대는 제국 예술을 만들어냈다. 제국의 가치에 맞는 문화예술이 구축되었다. 예컨대 로마에서는 무엇보다 초상조각이 많아졌다. 민중적 정신이 고전주의 이상을 대신하면서 초상조각은 개인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이 소탈하고 자연주의적이 방식이 가미된 이유이다. 시간적 순서에 따라 일어나는 갖가지 단계를 하나의 무대에 보이는 방식인 연속적 묘사법이 확립되었다. 오늘날의 영상과 마찬가지로 시각적 이미지에 대한 욕구를 반영한 것이다. 인상주의 방식도 있어서 중량감과 입체감이 느껴지지 않은 채 일체의 현세적인 것을 단념한 기독교도의 대표적 예술 양식이 되었다. 조형 예술가에 대해서는 그리스 로마 시대에 사회적으로 경시하는 소리가 끝내 없어지지 않았다. 힘든 육체노동을 하는 그들은 결국에는 무시되었다.


중세조차 하나의 통일적인 시기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각각 독자적인 시기로 나누어지는데 자연 경제에 바탕을 둔 봉건제도 시기초기, 궁정기사 시대인 중세 전성기, 도시 서민 계급 문화가 중심이 된 말기이다. 국가의 왕이 주도하는 문화예술에 기사문학이 발달하고 점차 도시서민 문화들이 말기에 갈수록 발달한다. 공로에 따라 기사계급이 될 수 있고, 봉건적 자연경제에서 도시적 화폐경제 발달, 서정적 감수성의 탄생과 고딕주의의 발달, 시민계급의 해방과 근세 자본주의 맹아의 탄생은 르네상스 시기보다 더 큰 업적이었다. 중세 초기에는 단순화와 양식화, 공간적 깊이와 원근법의 포기, 인체의 비례와 기능의 무시 등이 나타났다. 무엇보다 형이상학적인 세계관을 유지했는데, 종교적이고 정신적인 예술로 교회중심으로 조직되고 기독교 일변도의 감정을 지닌 사회표현이었다. 각종 이단과 분파의 발생에도 불구하고 성직자 집단이 정신세계를 독점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구원의 공간인 교회가 사회적 권위를 굳건히 지켰다. 프랑크 왕국처럼 국가의 왕이 정치권력을 행사했지만 국가의 시스템은 교회나 수도원이 중심축을 이루었다. 이 때문에 예술도 수도원이나 교회에서 좌우했다. 도시에서 지방으로 문화적 중심이 이동했다. 이에 따라 음유시인의 경우에는 이런 지방적인 문화의 중심축 이동에 맞게 활동하기에 이른다.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사같은 책을 대할 때는 각 개별적인 사실의 확인이나 암기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개별적으로 언급되는 사례들은 많고 그것을 잘 꿰어낼 수 있는 그 관점이 중요하겠다. 특히 사회적 관계의 변동에 따라서 문학을 포함한 예술들이 어떻게 창작 전달 향유되는가가 달라진다는 점을 중심에 두면 된다. 사회적 관계라는 것은 정치적 권력의 변동이나 경제적 생산 구조의 변화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주체들의 관계들을 말한다. 이러한 점은 과거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문화예술의 흐름을 바라보도 전망 분석하는 데도 유용할 수 있다. 지금도 누가 문화예술을 주도하고 있는 지 생각하면 어떤 작품들이 탄생하고 각광 받을 수 있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속에서 되도록 우리가 주체가 되면 좋을 수밖에 없다. 문화예술사도 우리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주체에 따라서 얼마든지 문화예술사는 달라질 수 있으니 말이다

/김헌식(동아방송예술대학교, 사회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