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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무한도전’에 대한 찬사는 세대 간의 대결구도에서 비롯한다. ‘무한도전’을 이해하지 못하면 새로운 재미코드를 모르는 사람이 된다. 그럼 공포에 휩싸인다.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람쯤 되니 말이다. 하지만 바보 행태의 희화화는 과거 코미디와 같다.
이 프로그램은 출연자들이 보통 이하 남자임을 강조한다. 보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 이상은 즐거워하며 본다. 정작 보통 이하인 사람들은 좌절하게 만드는 프로그램이다. 예컨대 출연자들은 농촌사람들의 옷을 입고 나온다. 농촌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평상복, 외출복인데, 화면에서는 출연자들을 통해 촌스러운 사람들로 낙인 찍는다. 빈번하게 못난이들의 도전이라고 하는데, 정작 그 도전자들은 현실에 존재하며, 그들은 못난이도 보통 이하도 아니다.
‘무한도전’에서 도전은 하나의 옵션, 별미일 뿐 수다와 잡담을 갖고 노는 ‘자막’이 주요하게 작용한다. 자막은 상황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청자를 가르치고 계도하며, 추측과 결론을 주입한다. 시청자는 생각할 여지 없이 제작진의 의도에 압도당한다.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다. 보는 이들을 바보로 만든다. 생각이 복잡한 이들이 보기에 안성맞춤이다. 단순성은 중독성이 강하다. 각본이나 결론이 없다. 생각도 없고 남는 것도 없다. 아무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고, 기억할 수도 없는 디지털 희극이 대세라고 위안 삼아 보면 그뿐일까.
다만,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은 진지한 과제란 없다는 새삼스런 장자(莊子)스러운 진리다. 애초에 도전의 목표는 재미있는 상황과 장면이다. 현실에서는 생존권적 문제인데 그들의 도전은 그것을 가볍게 만든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또 있다. 폐기된 공익, 사회적 오락 프로그램이다. ‘느낌표’의 몰락은 이런 점을 증명한다. 오락에 정보를 감미해 재미를 보던 인포테인먼트도 ‘무한도전’을 복제한다. 요약된 진지한 의미는 모두 ‘지식in’을 검색하면 나오는 시대라지만, 이제 오락프로에 성찰적 의미는 소멸되었다.
차라리 바보가 속편한 세상인지 ‘무한도전’은 보는 이를 바보로 만들며 그들의 도전적 난장 논리를 부드럽게 주입하는데, 어차피 뭘 바라겠는가. 오락 프로그램인데, 오락은 오락일 뿐. 그 외의 것을 말하면 ‘진중권’스럽다는 말을 듣지 않겠나.
김헌식〈대중문화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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