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논평

[문화불평]‘태왕사신기’ 그리고 백제 왜곡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1. 2. 13. 17:47

[문화불평]‘태왕사신기’의 심각한 역사왜곡

한국인을 곤혹스럽게 하는 영웅론 가운데 하나가 패배적 영웅론이다. 한국의 영웅들은 하나같이 실패했다는 것이다. 민중 영웅을 생각하면 확연해진다. 패배적 영웅론은 성공한 영웅을 바라는 한국인들을 절망시키고 무력하게 만든다. 시대 탓인지 대중문화 작품들은 더 이상 패배적 영웅을 다루지 않는다. 그 대신 선택한 것은 고대의 영웅들로, 좌절한 영웅이 아닌 승리한 영웅이다.

그런데 그 영웅들은 하나같이 이미 씨가 정해져 있다. 드라마 ‘주몽’에서 주몽-추모(송일국)는 삼족오의 기운을 받은 새로운 나라의 제왕으로 점지받는다. 심상치 않은 기운은 드라마 ‘대조영’에도 있다. 대조영(최수종)이 출생할 당시 안시성에 유성이 떨어진다. 제왕지운이라며 연개소문을 비롯한 일파들이 제왕의 씨인 대조영을 없애려 한다. ‘태왕사신기’에서 담덕(배용준)은 애초부터 쥬신의 제왕인데, 담덕이 출생할 때 쥬신의 별이 떴기 때문이다. 애초에 천족인 환웅은 땅에 내려와 쥬신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실패하고 하늘로 돌아간다. 돌아가면서 환웅은 후대에 다시 쥬신의 제왕을 보내겠다고 약속한다. 그 쥬신의 제왕이 담덕-호태왕(광개토대왕)이다. 그 징표가 ‘쥬신의 별’이다.

이러한 예정된 영웅 출생의 설정은 역사적 맥락의 왜곡으로 이어진다. 환웅은 웅족의 수지니(이지아) 사이의 아기를 버리고 간다. 버려진 아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단군왕검이다. 일반적으로 쥬신은 (고)조선(朝鮮)을 가리킨다. 그러나 ‘태왕사신기’는 이 조선을 거세하고, 광개토대왕을 쥬신(조선)의 제왕으로 삼는다. 이는 수많은 동이족의 모체인 고조선을 부정하는 셈이 된다. 이렇게 설정한 이유는 한민족 중심의 사관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이런 사관은 동북공정 대응에도 도움이 안 된다. 예컨대 고조선에서 갈라져 나간 요·금·청을 배제시킨다. 아울러 해양과 대륙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던 백제를 다시 한 번 더 소외시킨다. 이렇게 말하면 ‘태왕사신기’는 역사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드라마라고 항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애초에 실제 역사 인물과 그들의 호칭을 사용하지 말았어야 한다.

요컨대 호태왕을 쥬신의 제왕으로 삼은 것은 중화사대주의의 변종이다. 다른 동이족은 오랑캐라는 인식 때문이다. 또 고구려 드라마들이 한족(漢族)보다 우월한 면을 강조하지만, 오히려 열패감만 드러낸다. 진정한 강자라면 우월성을 강조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씨는 따로 있으니 아무리 노력해도 제왕이 될 수 없다. 그것이 연호개(윤태영)의 운명이다. 앨빈 토플러의 말과는 달리 한국은 갈수록 계급이 고착화되고 있다. 개천에서 용 나는 일은 더 불가능해지고 양극화 심화에 계층 이동이 어려워지고 있다. 다시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있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지만, 분노하기는커녕 그러한 상황을 미화하는 드라마만 쏟아진다. 주인공들이 민족의 영웅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합리화할 수만은 없다.

김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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