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면 남성들은 여성을 구하고 죽어버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여성들은 죽고 남성들만 존립하는 경우는 없다. 간혹 말도 안되는 가부장제 영화 007 시리즈에나 등장할 뿐이다. 영화 '최종 병기 활'(2011)에서 오빠 남이(박해일)는 여동생 자인(문채원)을 청군의 공격에서 구하고 죽는다. 문채원을 욕보이려던 청나라 왕자는 불에 태워 죽이고, 만주족 장군 쥬신타(류승룡)도 결국 제거된다. 하지만 남이는 여동생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사라진다.
영화 '그레비티'(Gravity, 2013)에서 우주 공간에서 활동하던 라이언 스톤 박사(산드라 블록)은 딸이 기다리고 있는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원하는 대고는 쉽지가 않다. 최고의 베테랑 우주비행사인 맷 코왈스키(조지 클루니)가 없었다면 그 탈출은 불가능했다. 그는 라이언 스톤 박사를 구하고 웃으면서 우주 공간으로 사라져 간다. 여기에서 우주 공간으로 사라져 가는 것은 죽음을 뜻한다. 결국 라이언 스톤 박사는 지구에 무사히 귀환하고 딸을 만나러 간다.
최근 개봉한 영화 '부산행'도 남자들이 사라지기는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좀비 바이러스가 대한민국을 전부 점령하는 상황에서 필사의 탈출을 위해 사력을 다하는 모습들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하지만 결국 그 사력을 다하던 남자들은 다 사라진다. 그것도 무엇이 급했는지 연이어 말이다. 어느새 임산부와 딸이 생존하는 모습은 자연스럽게만 받아들여진다. 이 영화만의 현상은 아니다. 어린 여성과 성인 여성이 손을 잡고 미래로 가는 모습은 최근 다른 개봉 영화에서도 흔히 관찰되었다. 이러한 점은 많이 참고한 '월그 워 Z'과도 다른 점이며 특히 근래에 한국 영화에서 흔히 관찰되는 점이다.
영화 '아가씨'에서는 귀족 아가씨(김민희)와 하녀(김태리)가 변태적인 가학성의 남자들이 득시글하는 공간에서 벗어나 레즈의 나라로 탈출하는 과정이 펼쳐진다. 그들이 탈출의 수단으로 삼는 것도 배였다. 배라는 것은 묘한 상징체이기도 하다. 그런 상징체가 없을 수도 있지만 박찬욱 영화는 온통 성적인 의미를 배태하고 있으니 말이다. 배 안에서 그들은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며 미래를 기약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 '굿바이 싱글'에서 골드 미스 스타가 연하남에게 배신을 당하고 임신을 매개로 중학생 여성과 같이 대안적 가정을 꾸려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둘은 모두 남성에게서 버림을 받았다는 면에서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 물론 남성과의 결혼은 등장하지 않고, 대리적으로 아이를 키우면서 만족감을 갖는다. 김혜수에게 남자는 그냥 친구만이 있을 뿐이다.
영화 '곡성'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단지 의심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일가족이 모두 죽는 어이없는 결말을 구성해 낸다. 맥락도 없고 여기저기 찢어 갖다가 붙여놓았다. 영화 '박쥐'나 영화 '검은 사제들'에서 나오는 사제들도 아닌데 말이다. 오로지 가장이 난데없이 의심했기 때문에 악마가 가족을 다 죽이는 결과에 이르는 것은 또 하나의 남성의 죽음을 의미한다. 인과관계가 없는 코드가 아무리 시대적 문화를 대변한다지만 취향의 드레싱일 뿐 발효는 되지 않을 듯 싶다. 영화 '매드 맥스'에서는 악당이 제거 되는 것은 물론 그녀들을 각고의 노력 끝에 남자 주인공도 조용히 군중 속으로 사라진다. 다행히 그가 살아남아 있기를 바라고 싶어진다.
그는 욕망이 전혀 없는 존재 같다. 예쁜 여자를 봐도 권력을 접해도 전혀 욕망의 충동을 느끼지 않으며 사라질 뿐이다. 여성들만이 지배하는 세계에 간섭하지 않고서 말이다. 영화 '박쥐'에서 신하균이 맡았던 무성욕자같다. 이런 무욕의 존재가 여성들에게 도움이 될까. 손예진 김주혁 주연의 영화 '비밀은 없다'에서 남편은 아예 제거해야할 후안무치의 패륜적 존재일 뿐이다. 그가 욕망의 존재였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 이런 결말들을 대중들이 원하기만 할까. 드라마 ' 또 오해영'에서 원래 도경(에릭)은 교통사고가 예정되어 있었다. 주인공 남자는 죽고, 주인공 여성은 살아남는 내용인 것이다. 하지만, 결론은 그와 달리 해피엔딩의 코드로 이어졌다. 왜 그렇게 했을까. 그것은 시청자들이 원하는 결말이기 때문이다. 남성만 살아남는 것도 여성만 살아남기 보다는 같이 살아 남기를 원한다. 누가 누구를 희생하는 것은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누구에게도 좋은 현실을 갖다주지는 않는다.
시청자들에게 일상은 비극이기 때문에 오히려 문화 미디어 콘텐츠에서는 아름다운 결말을 원하게 되는 것이다. 어려운 내용은 아니다. 2010년 MBC TV 시트콤 '지붕하이킥'이 세경과 지훈의 죽음으로 비극적 결말을 맺는 바람에 엄청난 비난에 직면했던 사실을 상기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한쪽에게만 해당하는 누군가의 헌신이나 희생을 넘어서서 궁극적인 지향은 양성평등일 수밖에 없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이 글을 읽고 불편해 할 것이다. 당연한 노릇이다. 비판하시고 욕을 할 수밖에 없다.
글/김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