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덕만과 ´가난마케팅´과 재보선 그리고 대통령 직선제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09. 10. 19. 06:00

-국민 속에서 성장한 리더가 필요한 시대, 그리고 그 국민이 원하는 것 잊지 말아야 

서양의 서사 양식 가운데 ‘홈 커밍’ 방식이 있다. 이런 서사 구조에서는 어린 시절 영웅이 집에 있지 않고 집밖에서 어린 연어나 실장어같이 오랜 고생 끝에 성장한다. 야구나 윷놀이의 말판은 모두 이러한 방식을 취한다. 요컨대, 어린 주인공이 갖은 고생 끝에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구조이다. 이러한 방식은 한국 사극에도 영웅과 관련해 빈번하게 등장한다.

드라마 ‘대조영’ 촬영 당시 주인공 대조영 역을 맡았던 최수종이 초기에 7개월 동안 밥을 먹지 않아 화제가 되었다. 이유는 노비 역에 부합하려 했다고 한다. 최수종은 노비가 얼굴에 기름이 흐르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했다. 발해를 세운 대조영이 노비로 등장하는 셈이다. 고구려 대중상 장군의 아들이었고, 제왕의 기운을 타고난 대종영이 노비로 전락했지만 결국 그는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나 마침내 군주가 된다.

드라마 ‘서동요’에서 서동은 본래 왕자의 신분이지만, 궁에 있을 수 없다. 이유는 위덕왕이 백제 궁중의 무희이자 서동의 어머니인 연가모를 품은 날이 나라의 제사기간이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여자와 동침하면 군주의 역할을 다하지 않은 일이 된다. 따라서 서동의 존재는 부정해야 한다. 그러나 서동은 바깥세상에서 성장해서 다시 궁으로 돌아온다. 신라의 공주까지 얻어서 말이다.

드라마 ‘선덕여왕’ 역시 마찬가지다. 덕만도 결국 궁에서 쫓겨났다가 다시 집인 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덕만은 왕실에서만 자란 다른 이들과는 차별화된 무엇을 가지고 오는 존재이어야 했다. 미래에 미실과 대적하여 큰일을 할 덕만이기 때문이다. 덕만은 죽음의 위협을 뚫고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성장한다.

사막은 그야말로 척박한 환경을 의미한다. 덕만의 삶의 철학과 태도를 형성하는 시공간일 수도 있겠다. 이러한 면면은 드라마 초반부에 선을 보였다. 가야계 유민들에게 잡혀 노예로 팔릴 상황에 처한 덕만은 비를 내리게 해주겠다며 가야계 유민의 바람에 기대어 열심히 기우제를 지낸다. 비가 내리면 살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이다. 하지만 비는 오지 않는다. 처음부터 덕만에게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천명(덕만의 언니)이 왜 그런 거짓말을 했느냐고 묻자 덕만은 이렇게 대답한다. "뭐라도 해봐야지. 그냥 앉아서 죽어?" 결국 덕만은 무엇이라도 한 가상함 때문에 풀려나고 천명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갇혀 생명의 위협을 느껴야 했다. 덕만이 이렇게 무엇이라도 하는 행위는 백성이라 불리는 사람들과 어린 시절부터 같이 생활했기 때문이다. 이미 덕만은 4회에서 이런 말을 한다.

“백성들의 말을 들을 시간이 없는 자는 황제가 될 시간도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백성을 살필 마음이 없는 분은 군주가 될 마음도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군사를 키워 군벌이 될지 몰라도 영웅은 안 될 거 같습니다.”

이 말에서 백성은 덕만 자신이다. 이 말도 결국에는 책에서 읽은 것일뿐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러 나온 것은 아니다. 더구나 갈수록 드라마 ‘선덕여왕’은 백성인 덕만을 스스로 잊었다. 덕만이 체험하고 느낀 백성으로서의 경험은 드라마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어떠한 경험에 따라서 백성에 대한 인식구조가 형성되었다는 극적 형상화가 없고, 백성에 대한 좋은 말을 구성하기에 바쁘다. 이렇게 되면 홈 커밍 방식은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미실과 백성에 대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지만, 항상 다른 존재인 것처럼 대상화시켜서 말한다. 과연 백성이란 어떤 존재인가. ‘연속되는 어려움 속에서도 가만있지 않고 무슨 일이라고 해야 하는 존재가 아닐까.’ 아니 선덕여왕에서 위치가 바뀌었다. 평생 미실은 궁에만 있던 사람이다. 그러나 덕만은 어린 시절을 혹독하게 자랐다. 백성사이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현실을 누가 더 잘 알까.

그런데 오히려 미실이 덕만보다 현실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요컨대 덕만이 백성과 같은 존재였다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덕만은 자신의 과거를 잊고 백성에 대한 규정을 미실과 함께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미 덕만 왕족, 성골로 탈바꿈해 개구리 올챙이 때 생각 못하는 형국에 빠졌다. 산전수전 다 겪은 ´처벌은 단호하게 보상은 조금씩´이라는 미실의 원칙을 덕만이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촌주의 목을 베어, 공포를 보여주었으니 이제 희망을 보여줘야 할 차례... 일을 하고자 하는 백성들을 아낌없이 지원하라"는 말도 불필요 했다. 왜 덕만은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과연 덕만은 희망이라는 개념을 중요시하게된 계기가 있었던 것일까. 드라마는 이 부분에 대해서 침묵한다.

그럼 덕만이나 홈 커밍 방식이 현대 민주주의에 주는 함의는 무엇일까. ‘홈 커밍’ 방식의 서사양식은 헌혈과도 같다. 닫힌 궁 안의 왕족들은 세상 물정을 모르고 특히 백성들의 속사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국정 운영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백성들의 속사정을 잘 아는 왕이 필요하다.

이러한 요구와 결핍을 채워주는 것이 궁 밖에서 성장한 영웅 혹은 왕족이다. 대조영이 노비 생활을 해보았고, 서동이 마를 캐는 비루한 신분에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백성을 위한 정치를 잘 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덕만도 마찬가지 맥락에 있어야 한다.

‘홈 커밍’ 방식은 대통령 직선제와 닮은 점이 있다. 대통령 직선제는 귀족이나 왕족을 뽑는 것이 아니다. 온갖 고생을 통해 리더로 성장한 이들을 국민이 판단하고 선택하는 것이다. 다만, 어린 시절에 영웅으로 점지를 받는 것이 아닐 뿐이다.

백성들 사이에서 스스로 고난을 넘으며 성장한 연어들이 시민의 선택을 받는 것이 직선제의 의미다. 결국 그가 국민과 시민의 처지와 입장을 잘 알 것이라는 가정에 따라 뽑는다. 하지만 자신이 가난한 집안의 자제로 온갖 고생을 해보아 국민의 마음을 잘 안다고 할뿐 그 이후가 없다. 이른바 '가난 마케팅'만 있다.

여하간 대통령만이 아니라 다른 정치지도자도 백성 사이에서 스스로 고난을 통해 성장한 사람이 선출되어야 하고 그는 백성의 의중과 마인드를 잘 아는 것은 물론 그것을 정치화시키는 리더여야 한다. 무엇보다 국민, 시민의 실정과 정서를 잊지 않고 그것을 대변하는 정치인, 대통령이 필요하다. 또한 이번 재보선에서도 그러한 사람을 반드시 뽑아야 한다. 다시 드라마 이야기를 하면서 맺을까 한다.

덕만의 타클라마칸 행이 단순히 도피의 차원에서만 다루어지면 그의 리더십의 실체를 가늠하기 힘들고, 설득력 있는 리얼리티를 갖기 어렵다. 일관된 통찰력이 노출된다. 그럴 때 지식인과 정치인의 수사학처럼 말 장난이 넘쳐나고, 에피소드의 추리소설 구조화에만 의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