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노동의 신화를 부추기는 이들은 누구인가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09. 4. 25. 03:37

노동의 신화를 부추기는 이들은 누구인가

-비비안 포레스터의 '경제적 공포-노동의 소멸과 잉여존재'를 읽고

김헌식 (codess)

ⓒ 김헌식

노동의 소멸이란 더 이상 인간의 노동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노동의 주체인 인간은 과거와 같이 고귀한 존재가 아니라 잉여존재이고 더 이상 필요 없는 귀찮은 대상일 뿐이다. 그런데도 노동이 소멸하지 않고 중심가치라고 생각한다면 이를 이용하는 허구적인 담론들이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 이는 상황에 따른 적절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노동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하면서 표나 긁어가는 정치인들만 활개를 치게 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노동 불안에 시달리게 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과거의 직업들을 그리워하면서 그것을 찾아줄 수 있다고 하는 이들에게 희망 아닌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이다.(130쪽)

이렇게 잉여존재로 만든 것은 바로 소수자들이다. 이들은 수에서 소수일 뿐이고 사실상 모든 부와 수단을 가진 다수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이러한 부와 수단을 가지고서 이를 자신들의 부를 재생산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테크놀로지라는 놀라운 수단의 유용성을 깊게 인식한다. 이윤을 창출하는데 인간의노동력보다 이 테크놀로지가 필요하다. 사람은 인간다운 삶, 복지를 요구하지만 기계는 오로지 이윤만을 낳기 때문이다.

결국 빈자들은 소수에게 끊임없이 뜯기면서 혼란 속에서 소외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노동 아직도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제도란 무엇인가.

노동 제도는 오로지 이용가치에서 의미를 찾는다. 이익을 중심으로 사람을 판단한다. (30쪽) 노동의 존재가 아니라 이익을 창출하는가만 판단하는 최악의 상황이다.(255-256쪽)그런데 그 이익은 소수의 전유물임을 잊게 한다.(30쪽)

이 노동이 위기에 처해있고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이 위기를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반드시 있다. 이들이 정치인들이다. 정치인들에게 위기라는 것이 있어야만 한다. 자신들이 그것을 해결할만한 능력이 있다고 큰 소리 칠 수 있기 때문이다.(50쪽)

그럼에도 끊임없이 산다는 것, 삶을 위협하는 빈곤과 불안은 사람들을 괴롭힌다.

원칙적으로 산다는 것은 권리가 아니라든가, 살아 있는 자들의 수가 남아돌아간다는 식의 발언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말들이다.(50쪽)

그러나 이러한 말들은 어디에서나 듣게 되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노동은 사라졌고 넉넉한 자리는 없고 얼마 안 되는 자리는 줄어들고 있다. 경제에는 소명과 직업적 의무 그리고 윤리적 감각 뜨거운 열정은 없고 오로지 사익을 위한 경제 네트워크만 있다. 이것의 대표적인 조직체는 IMF, IBRD, OECD등등의 조직이다. 보이지 않는 그들은 정부나 국가의 장애를 뛰어넘어 마음대로 영향력을 향사한다. 오로지 경쟁자만 신경을 쓰면 된다.(52쪽) 그리고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금융게임이다. 투자활동, 공개되지 않는 거래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각 국가는 이러한 사경제 네트워크의 종속 국가이다. 이들은 구속이 없는 초권력이다.(52쪽) 이들은 끊임없이 위기의 담론을 만들어내어 개입의 논리를 정당화한다. 이들은 위기의 극복방안으로 경제적 효율성, 경쟁력, 노동유연성이다.

이러한 논리는 오로지 가진 자들을 위한 것일 뿐 빈자들과는 관련이 없다. 오히려 이들은 팽창하는 사경제 네트워크의 장애물 일뿐이다. 이런 체제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자본주의 상품이라는 경제적 효율성 기준에서 함량 미달되어 소외된다.

필요 없는 잉여의 존재가 된다.

잉여의 존재는 사회심리의 팽창을 낳게 한다. 항상 쫓기는 존재, 불필요한 존재, 결합이 존재라는 강박관념을 대량으로 확산, 심화시킨다.(66쪽) 결국 사회에 남아도는 아무런 쓸모 존재, 즉 해로운 자라는 심리는 결국 무기력에 빠지게 한다.

인간 존재 자체의 존엄성과 고귀성은 없다.(66쪽) 이반일리치의 말대로(간디의 물레, 김종철 옮김, 녹색평론사) 사람은 죽어도 쓰레기 같은 취급을 받는 것과 같이.

이러한 소외된 잉여의 존재들은 무주택자, 정부보조금 수혜자, 최저 임금노동자라는 딱지를 얻게 된다.(68쪽) 각개인의 개성은 없고 타자화 된 분류표만 있을 뿐이다. 이는 마르쿠제가 1차원적 인간에서 지적하는 인간이 없는 추상적 기호화에 해당한다. 수많은 이들을 각 고통과 죽음은 드러나지 않는다.

이러한 딱지 붙이기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또 하나의 강박관념을 가진다. 등록 취소되지 않을까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이 그것이다. 등록 취소당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이 된다.(69쪽)

이러한 빈자들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자유시장 경제는 이러한 다수 빈자들의 위에 있는 소수만을 위한 존재이며 국가의 부라는 것은 결국 이들의 것이다.(73쪽)

그런데 이러한 고통의 현실에 대하여 가장 치명적인 것은 ‘무관심’이다.(75쪽)

한 개의 제도를 만드는 데 국민들로부터 무관심을 얻어냈다는 것은 부분적인 동의를 얻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을 뜻한다. 사실 어떤 체계가 대중적인 동의를 얻기 위해서는 동의를 얻게 되는 것은 이 같은 무관심이다.(75쪽)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한제도가 아무런 동요를 일으키지 않고 아무런 논평도 비난도 받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하나의 학설을 강요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78쪽) 이러한 무관심은 새로운 제도의 반역성, 결점을 속이고 위장할 수 있다. 무관심은 언제나 다수파가 표명하며 제지를 당하는 법이 없다. 사경제는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81쪽)

오로지 사경제는 남을 밀쳐내는 선동과 유혹을 할 뿐이다. 교역지배, 노하우, 지식, 전문, 우월성이라는 수단들을 절대화, 수단화 한다.(82쪽)

이러한 점들을 구비하는 사람이면 당신도 잘 살 수 있다는 선망을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주입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부유한 지도급 계층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어떠한 부를 누리든 간에 그들을 책하는 법이 없다. 그러나 그들보다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당한 불이익의 정도가 우리가 당하는 것보다 약하다는 이유로 그들을 호되게 질책한다. 자신들보다 덜 학대당했다는 점에서 분노를 느끼기 때문이다.

하급 공무원들의 임금 인상에 대해서는 분노를 하지만 이들의 월급이라고 해봤자 부유층의 재산에 비하여 아무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89쪽)

또한 문제는 다음에도 있다. 노동 시장은 소멸해가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노동이 소멸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106쪽)

이렇게 소수가 다수의 부를 가지고 있는 사회에서 노동은 종말을 고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치인들은 끊임없이 노동을 해결할 수 있다는 식의 사기를 친다.(99쪽)그러한 해결은 불가능하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노동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는 박탈되었다. 그들의 미래는 텅 비어 있다. 오로지 가난-비행-범죄-혼돈의 연속이다. 기회박탈과 가난은 이들의 탓이 아님에도 이들의 거친 행동과 불안한 행동을 공격적이거나 사회질서에 반한다는 이유만으로 비난한다. 그러나 거칠고 폭력적인 행동만이 그들의 고통과 심정을 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117쪽)

혹은 끊임없이 사기업체에서 요구하는 기준에 맞게 젊은이들을 교육시켜야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현실적인 것이고 새로운 흐름에 따라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150쪽) 그러한 강박 관념 속에서 꿈을 꾸고 있다.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허구적인 해결책이 없어졌을 때 그때야 비로소 우리들을 헛갈리게 하는 많은 것들이 제거된다고, 진정한 인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라고, 적어도 문제가 무엇인지 인식할 수 있다.

지금 두 개의 키워드를 가지고 노동이 소멸하고 잉여의 존재가 되어버린 빈자의 모순이 확산되고 있다. 하나는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금융자본의 팽창이다.

실질 가치와는 상관없는 생산투자와는 관계없는 상상의 계약만이 부를 가질 수 있다는 상상만을 부추긴다. 증권, 부채, 이윤, 환율 등등의 추상화된 기호들은 부채의 사고 팜 속에 부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162쪽) 이를 비집고 놀아나는 것이 금융 자본이다.

다른 하나는 고용유연화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생산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산성의 끊임없는 강조는 사람들을 불안 속에 가두어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한다.(175쪽) 이 생산성을 위해 단골로 사용되는 단어가 고용유연화이다.

고용 유연화는 국가의 자산은 늘어나지만 여전히 다수의 사람들을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고용될 수 있는 능력을 지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언제나 시장에서 교환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222쪽) 이러한 고용될 수 있는 능력을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익혀야 한다. 그곳에는 각자의 삶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고용 가능성이라는 상품성만 있을 뿐이다.

이렇게 각자가 고용될 수 있는 능력만을 기르게 되면 잘 살 수 있다는 관념은 언제든지 직장을 떠나서 부를 쌓겠다는 인식을 강화한다. 따라서 이는 각 노조를 무력화 시킨다.

끊임없이 고용불안을 부추기는 것은 그것을 이용하여 노동존재의 가치를 격하시키고 값싼 원가 확보 의도에 있다. 이 덕분에 항상 사람들은 불안과 모욕감, 박탈감속에 있게 된다.(182쪽)

이러한 고용불안은 이제 단지 한 국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더 넓어진 시장에서 빈곤한 국가들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고용불안이라는 심리를 확장시켜 다양한 노동력을 확보하고 있다. 이것이 다국적 기업이다. 외국의 궁핍한 빈민들을 채용하면 자국의 부유한 중산층들이 다시 빈민이 되어 다시 빈민층은 늘어나게 된다.(190쪽) 이로써 다시 자본은 더 많은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런데도 번영된 국가를 만들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자장가를 들으며 기분 좋게 졸고 있는 셈이다.

후쿠야마가 이야기했던 역사의 종말은 결국 이익을 중심으로(204쪽) 역사가 종말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다.

요약하면 노동의 소멸의 상황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이유는 1)경제 권력과 정치권력의 술수 때문이다. 노동의 시대가 잠시 중단된 것이고 다시 계속되리라는 환상을 가지게 한다. 2) 혼돈과 혼란의 책임이 당사자들에게 있다는 것은 수동성과 무관심만을 부추겨 문제를 악화시킨다.

이렇게 삶의 의미를 파괴하고 사람들을 빈곤에서 허덕이게 하는 현실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가려진 문제들을 끊임없이 드러낼 것, 피해진 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다시 거론하는 것이 필요하고(101쪽) 적어도 문제가 무엇인지 피해야하는 문제들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밝혀낼 수 있어야 한다.(112쪽)

그러나 반드시 이러한 문제들은 소수의 가진 자들의 행태와 인식의 문제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다음의 글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들은 모두가 잠들어 있는 중에도 홀로 깨어 있는 놀라운 매력을 지닌 자들이다. 또한 빈곤을 만들어내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도 조금은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부러운 지혜와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자신들만의 논리에 따라 자신들만의 이익을 합리적으로 추구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보는 빈곤에도 언제나 민감하게 반응한다. 소설을 일고 영화를 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질 때면 이 빈곤의 상황에 둔감하게 반응하는 일반인들의 태도에 분노를 터트리며 자신들의 섬세함을 과시하기도 한다. 그 정도로 현명한 자들이다. 빈곤이나 불공평은 이들의 삶에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 것이기에 오락의 차원에서 만날 때만 빈곤이나 불공평한 상황이 참기 어려운 고통일 것이라고 잠깐 인정하며 그 순간만 진지하게 생각에 잠길 뿐이다. 그리고는 영화와 소설속의 빈곤과 불공평을 마치 자신이 당하고 있는 것처럼 여기면서 잘 조절된 쾌감을 느낀다.(9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