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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위기 앞에 승자도 패자도 없다?-이준익 감독의 <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1. 2. 9. 17:57

<김헌식 칼럼>나라의 위기 앞에 승자도 패자도 없다?

 2010.05.01 11:59

 




[김헌식 문화평론가]이준익 감독의 <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 은 루저들의 이야기다. 그의 영화들이 대체적으로 견지해온 특징이 그대로 드러나는 영화이다. 그러나 영화 속의 주요인물들이 위너가 아니라서 해서 불행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신균의 서자 견자(백성현 분)는 아버지에게서 평소 '꿈이 없는 놈'이라는 질책을 받는다. 견자에게 그런 말을 하는 이는 또 있었다. 

이몽학의 연인인 백지(한지혜 분)에게서도 견자는 같은 말을 듣고야 마는 것이다. "너는 이몽학에게 안돼!", "내가 왜?" "꿈이 없잖아" 이몽학은 꿈이 있었다. 왕족이기는 하지만 이몽학도 좌절된 운명이었지만, 세상을 엎고야 말겠다는 꿈-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견자는 기녀의 아들-서자라는 신분출신에 대한 울분으로 마음에 꿈-아니 야망을 넣지 못했다. 아버지 한신균이 이몽학의 칼에 베어지자 비로소 하나의 목표가 생긴다. 

하지만 복수가 꿈일 수는 없었다. 진정한 꿈이 무엇인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지만, 아버지에 대한 복수가 대의명분상으로는 타당하지만 견자 개인의 삶을 위한 꿈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왠지 결핍된 꿈이다. 한편, 시각장애인 검객 황처사는 좋은 세상을 위해 목숨을 버린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동지인 이몽학에게 충고와 경고를 주려고 목숨을 걸었다. 

이몽학이 한양 도성에 진격했지만 궁궐은 텅 비어 있었다. 승자가 될 수 있는 기회는 박탈되었다. 그렇게 겨루어야할 최종의 대상들이 아예 판을 버리고 떠난 이유는 임진왜란 때문이었다. 한 사회는 다른 사회와의 관계성 속에서 자기 존재를 규정당하고 스스로 확립한다. 그 사이에서 개인도 정체성을 규정당하거나 스스로 확립해 나간다. 

집권자와 개인의 대결 위에는 국가와 국가의 대결이 있었다. 국가와의 대결에서 집권자와 개인의 대결은 유예해야 한다. 상태에서 국외사회와 국내의 개인은 직접적으로 갈등하지 않는다. 하지만 전쟁과 같이 위기와 혼란의 시공간에서는 개인들은 타국가와 직접적으로 맞닿는다. 이 지점에서 개인과 개인 혹은 개인과 국내 사회의 갈등 구도는 무너지거나 그 성립 요건 자체를 잃어버린다. 

위너를 꿈꾼 이몽학이 그 기회를 잃고 버둥거릴 때 그를 벤 것은 서자 견자였다. 하지만 견자도 역시 왜군에게 당하고 만다. 이는 단순히 좁은 범위 안에서 승자와 패자 혹은 집권과 반란은 매우 협소한 프레임만을 갖추게 됨을 의미한다. 무능한 정치로 백성과 도성을 버리고 도주하는 군주와 관리들은 역사적인 루저였다. 

역사적인 루저들 앞에서 최종적으로 미처 겨루지도 못한 이몽학도 루저였다. 비록 아버지의 복수를 이룬 견자의 경우에는 개인적인 복수를 이루었지만, 자신의 옥죄인 신분사회의 모순을 투철하게 보지 못하고 말았다. 오히려 이몽학은 그러한 세상을 바꾸려고 행동이나 했다. 비록 견자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었지만 목적을 이루지 못한 것이 되었다. 그런 면에서 역시 꿈을 꾸지 못한 자였다. 아버지에 대한 복수는 한국인들에게 매우 중대한 명분이지만, 개인주의 문화권에서는 정신병일수도 있다. 꿈과 야망, 개인적인 성취가 혼재되었다. 

왜군은 견자와 대동계군사들을 몰살시키지만 결국 그들은 임진왜란에서 진다. 조정이 환도하여 아무리 이순신을 인정하지 않으려 해도 그들은 이미 역사적 루저였다. 결국 이 영화에서 아무도 승자도 없으며 그렇다고 루저라고 딱히 규정할만한 것도 없다. 다만, 그들은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자신을 감싸고 있는 질곡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그 구름이 자신이 직접 만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들이 만들어준 것인지 그것이 약간씩 다를 뿐이다. 

흔히 조선반도에서는 성공한 혁명이 없다는 패배적인 영웅론이 강하게 존재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역사적으로 성공한 집권세력(위너)도 없다. 그들은 끊임없이 역사적인 것만이 아니라 도덕적 윤리적인 패배를 상기시킨다. 승자와 패자의 도식에서 벗어나야 할뿐이다. 아무리 질곡 같은 모순의 사회에서도 그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가 실패이든 성공이든 그것은 후세의 몫이다. 승자와 패자가 아니라 삶에 얼마나 충실했는가가 귀감이 될 뿐이겠다. 그것을 평가하는 이도 스스로를 자신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숙제를 푸는 데 열중할 뿐이다. 다만, 그 숙제풀이와 귀감은 명분과 실리의 양 끝단에서 접점을 중간으로 모아오는 그 어디쯤에서 이루어질 때 다만 의미가 있을 것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