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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식 칼럼>아이티 주도권 논란과 영화 <더 로드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1. 2. 9. 17:23

<김헌식 칼럼>아이티 주도권 논란과 영화 <더 로드

입력 2010.01.20 15:15

 




[데일리안 김헌식 문화평론가]아이티 참사와 관련해서 국제적 공조가 매우 중요해지고 있다. 그런 가운데 프랑스와 미국간에 설전이 벌어지고 있다. 참사에 대한 국제적인 구호의 손길이 미치고 있는 이면에 주도권 싸움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게 한다. 그러한 현상을 볼 때 인류평화를 위해 새로운 하나의 길-로드를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이티 참사와 영화 < 더 로드 > (The Road)가 겹쳐지는 지점은 '자연 재앙'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그 자연재앙은 인간의 행위가 만들어낸 결과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사전 원인과 사후 결과 모두 해당된다. 아이티 사태가 더욱 심각했던 것은 가난한 빈국으로 전락시킨 세계 시스템 때문이었고, 영화 < 더 로드 > 에서 재앙을 불러 온 것은 인류의 문명 시스템 때문이었다. 이는 이전 원인에 해당한다. 사태를 만들어낸 사전 원인이 그러했다면, 사태가 발생한 이후에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아이티 사태나 영화 < 더 로드 > 의 내용은 우울한 이야기이지만, 사람의 행동이 그 이후를 결정한다는 면에서 역시 공통적일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아이티 사태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우리 모두에게 닥칠 수 있는 사태이다. 이는 이상 기후 현상을 통해 어느 때보다 현실감 있는 문제로 다가왔다. 

우선, 영화 < 더 로드 > 를 통해 함의점을 이끌어 보자. 영화 < 더 로드 > 에서 주인공들은 절망적인 상황에 봉착한다. 지진과 화산 폭발로 인류는 멸망의 위기에 몰렸기 때문이다. 전기는 들어오지 않고 곧 식량은 떨어졌다. 잿빛 하늘은 한 줄기 햇살조차 볼 수가 없으며, 화산재는 계속 떨어졌다. 어디에도 길은 없어 보였다. 영화의 주인공은 처음부터 이중의 딜레마에 처한다. 

남편(비고 모텐슨)은 아내(샤를리즈 테론)에게 출산을 권하지만, 아내는 아기를 낳지 않겠다고 한다. 아이는 결국 절망적인 상황에서 삶을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비록 남편의 요구에 따라 아이를 낳았지만, 아내는 아이를 양육하는데 회의감을 갖는다. 그래서 틈만 나면 남편에게 아이의 생명을 고통 없이 거두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하지만 남편은 지금이 어렵더라도 항상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남편도 그 희망에 대해서 아내에게 장담줄 수 없으므로 눈물만 흘린다.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결국 아내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편과 아내를 버리고 어디론가 자살의 길에 오른다. 하지만 엄마와 아내를 잃은 슬픔을 딛고 남편과 아이는 남쪽으로 가는 길에 오른다. 사람이 사람을 먹는 잔인한 상황이 엄습하는 여정 속에서 둘은 항상 죽음을 생각하지만, 남으로 가는 길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포기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길을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 길을 가는 과정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이들에게 맞서 싸워야 했다. 그들이 하는 것의 제일 순위는 식량을 구하는 것이었고 그 다음은 그것을 지키는 것이었다. 아빠와 아들의 다툼은 식량을 구하고 그것을 지키는 데서 벌어졌다. 아빠와 아들의 위치는 절대적이지도 상대적이지도 않았다. 

아들은 아빠의 길잡이와 독려에 의존해야 했지만 한편으로 아들은 천사이고 아빠는 인간이었다. 인간은 현실을 더 강조했고, 천사는 도덕적 윤리적 가치를 중요하게 강조했다. 천사는 무도한 현실에 절망하고 포기하려 했지만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이 영화는 잃어버린 부성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그 부성성은 살아남아 자신의 영화를 얻는 것도 아니다. 부성성의 희생이라는 신화를 다시금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가족안의 부성성이 아니었다.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희망을 버리지 않은 그의 태도는 결국 아들을 살렸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희망을 현실로 이루어줄 이들에게 인도했다. 

고독한 아빠의 고군분투는 다른 이들에게 또 하나의 길이 되었고, 마침내 그들의 목숨도 살려냈으며, 그들은 다시 아빠를 대신해 아들을 자신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다시 길을 떠난다. 어쩌면 인류는 그렇게 원시시대부터 궤적을 만들어 왔을 것이다.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을 찾는 모습은 개리 마커스 교수의 클루지(Kluge)개념과 닮아 있다. 클루지는 어떤 문제에 대한 서툴거나 세련되지 않은 해결책을 뜻한다. 대충의 임시방편이지만, 결국 인간에게 그만큼의 효과적인 것도 없는 것을 가리킨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본래 그러한 클루지를 통해 삶을 영위하고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었다. 진화생물학의 관점에서 인간의 진화는 처음부터 정확한 해법과 최적의 대안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 < 더 로드 > 는 인간의 진화와 인류 문명의 또 다른 본질을 나타내고 있다. 당장에는 확연하게 보이는 해법이 없어도 끊임없이 시도하고 노력하는 가운데 알음알음 헤쳐 나가며 인류를 이루어왔다. 영화 < 더 로드 > 에서도 주인공은 길이 없었지만 더듬더듬 조금씩 서투르게나마 흔적을 남기다 보니 마침내 길이 된다. 결국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길을 만들어 가는 것이었다. 

노신은 '길은 본래 없다. 사람이 많이 걸어가면 그것이 길이 된다´고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처음 그 길을 가는 사람이고 그 길을 가는 사람을 다시 보면서 따라가는 사람이다. 김구 선생이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서산대사의 경구도 마찬가지다. "넓은 눈밭을 갈 때 함부로 밟아 가지 마라, 뒷날 나의 흔적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蹟 遂作後人程). 

영화 < 더 로드 > 의 아버지가 함부로 하지 않은 것은 악행이었다. 그는 최대한 선한 사람이 되려 했고 아들에게 그것을 가르치려 했다. 다른 사람의 것은 뺐지 않으며, 다른 사람의 목숨을 살상하지 않는 것. 어려운 사람은 도와주는 것. 하지만 그러한 원칙을 지키기는 쉽지 않았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에게 먹을거리를 덜 주어야 했고, 다른 이들의 공격을 받을 때면 그의 목숨을 빼앗아야 했다. 물론 그러한 일련의 행동은 그들을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모두 보여졌고, 큰 이정표가 되었다. 처음부터 아빠는 이정표가 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온전한 삶에 충실하고자 했다. 그것이 아이에게 남기는 아빠의 교육이자, 삶의 진리였다. 

아이티 사태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지만, 이를 도와주려는 세계 각국의 움직임은 또 다른 이정표가 될 것이다. 그들을 재난에서 구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다시 부국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세계의 아빠라고 자처하는 이들이 수행해야할 롤 모델일 것이다. 전적으로 한번에 해결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알음알음의 모색이 바로 같이 살아가는 공존의 클루지다. 

만약 아이티 사태에 관해서 선진국들이 올바른 태도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또 다른 재앙을 낳는 결과가 될 것이다. 기후변화를 염두할 때 영화 < 2012 > 나 < 로드 > 가 그려내는 상황은 무시 할 수만은 없다. 물론 아이티 국민 스스로는 영화 < 로드 > 의 주인공 같은 자세를 견지하고 있겠다. 

무엇보다 더 이상 남의 일도 아니다. 작년 한반도에서 60여회의 지진이 감지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비하는 로드맵을 마련할 때기이도 하다. 다른 국가의 사례를 무조건 따르기보다는 주체적인 길찾기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