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공포는 자기중심주의와 단절에서 나오는가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09. 4. 25. 02:43

ⓒ 쇼박스

처음에는 닭장 같은 이미지 때문에 거부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여러 가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아파트다. 단지 주거공간에 그치지 않고 부와 투자의 대상이 된지 오래다. 아파트 건설의 활성화는 경제의 순환 혹은 경기의 흐름을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하다. 아파트는 도시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한 면을 드러내기라도 하듯 대부분의 도시인들이 이 아파트에 거주한다. 아파트 한 단지에만 해도 정말 많은 사람이 몰려 산다. 아파트 단지에만 있어도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단지만 이러한 응축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자신의 호실 안이라는 일정한 공간 안에 생활에 필요한 것이 모두 최대한 응축되어 있다.

필요한 것은 다 있기 때문에 애써 옆 공간 아래 공간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다만 소음으로 피해를 주지 않고 피해를 받지 않으면 된다. 형식적인 반상회를 뺀다면 서로의 공간에 함몰되어 버리고 대면하지 않는다. 아파트 공간은 좁기도 하거니와 획일적인 공간이고, 궁극적으로는 외로움과 소외의 공간이기도 하다.

영화 <아파트>에서 죽음을 소재로 삼은 것은 바로 이 아파트의 자기만족 편리성이 내포하고 있는 단절성과 획일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어느새 아파트는 사람이 살만한 데가 못되는 공간이 되어 버린다. 요컨대, 감독은 겉으로 훌륭해 보이는 행복 아파트를 도시인의 고독과 외로움이 소외와 공포, 죽음의 근원이라는 관점에서 풀고자 한다. 물론 아파트를 이러한 공간으로 보는 것은 처음은 아니지만 장애인이 등장하는 것에서 강조점도 있다.

아파트의 선호성과 소외성이라는 이중성을 잘 나타내는 인물인 유연(장희진)은 혼자 사는데 그녀는 다리를 쓰지 못한다. 아파트 주민들이 돌아가면서 돌보러 찾아오지만 대부분 거실의 흔들의자에 앉아 하루 종일 거실 창문 밖을 본다. 세상과의 소통은 그 베란다 밖의 풍경일 터다. 하늘이라도 보이면 그 소통은 일정 정도 성취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밖에는 아파트의 앞 동만 보인다. 하루 종일 볼 수 있는 것은 막막한 벽, 단절뿐이다.

남의 이웃집을 탐내지 않더라도 보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파트의 불문율이다. 비록 앞 동이라도 빤히 보는 것은 침해다. 그래서 끊임없이 커튼이 쳐진다. 그 커튼 뒤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심을 두지 않는 사이 죽음과 공포는 태어난다. 유연이 아파트 폐쇄 공간, 그 커튼 뒤에서 당하는 일들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행복 아파트에서 주민들의 공동체적 정신은 빛이 나지만, 그 빛 이면에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묻힌다. 오세진(고소영)과 같이 사생활 침해 금지라는 금기를 어기지 않는다면, 유연이 당한 고통은 세상에 영원히 드러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아파트의 자기만족적 공간의 분할로 빚어지는 단절성은 약자에 대한 이중성을 철저하게 은폐시킬 수 있다. 처음에 아파트 주민들은 유연의 부모님이 사고를 당하게 되자, 할머니, 또래의 남학생, 그리고 젊은 주부, 중년의 남성은 불쌍하다면서 돌아가면서 도와준다. 그들은 장애인 소녀를 도와주는 착한 마음씨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아름다운 행복 아파트라며 인터넷을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홍보한다. 이렇게 살기 좋은 이미지는 아파트 가격에 긍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점차 이 같은 이미지는 허구적인 것으로 변한다. 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할머니는 가족에게서 외면 받고는 유연에게 자기 방식대로만 강요한다. 유연이 배가 불러 싫다는데도 음식을 계속해서 먹인다든지, 억지로 목욕을 시키고 피가 나도록 때를 민다. 거부하면 자신을 무시한다고 윽박지른다. 또래의 남학생은 따뜻한 친구가 아닌 상습적인 성폭행범이었다. 한 젊은 여성은 남편의 제약회사의 약을 유연에게 실험했다.

겉으로는 장애인을 도와주는 착한 일들만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상호소통성이라는 특징의 인터넷조차 아파트의 커튼과 벽을 넘을 수는 없었다. 아파트 상하 층 사이는 벽이 되고 그 뒤의 방안에서는 고통스러운 일들이 벌어졌던 것이다.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녀에게는 풍요속의 빈곤과 같이 소외의 연속이었다. 이는 아파트뿐만 아니라 도시의 풍경이기도 하다. 유연만이 아니라 오세진과 같이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지나가지만 저마다 다들 외로워한다.

자기의 편안함에 취하면서 발생하는 비대면에서 공포와 죽음은 일어나고 있었다. 이럴 때 심지어 주민들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 살해가 단순한 자살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더구나 그 죽음이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도 인식하지 못한다. 다만, 서로 자신만의 공간에 묻혀 죽음에 대한 공포에 떨어 버린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주로 원한이 서려있는 이들이 혼령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여성 귀신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가장 사회적인 약자이기 때문이다. 이 <아파트>에서도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인 장애인 여성이 등장하고 그녀가 원혼이 된다. 한국 영화의 공포는 이러한 약자의 한을 푸는데 초점이 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약자에 대한 애정과 연민, 휴머니즘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순간에도 시생활의 편리함의 이면에 아파트는 원혼을 만들어내는 공간은 아닌가 싶은 것이다. 원혼은 결핍이다. 이 결핍에는 애정과 배려, 인간미를 바라는 원혼이 포함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