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겨울왕국' '그레비티' 뒤에 '노예12년' 봐야 치유된다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4. 3. 4. 16:26



 

'노예 12'(원제 12 years a slave)은 자유인으로 살던 흑인 솔로몬 노섭(Solomon Northup)이 인신매매범들에게 납치되어 노예로 산 12년간 이야기를 담은 자전적 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 해리엇 비처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과 함께 노예 해방의 단초가 된 작품으로 평가받아왔다. 그런데 그 책이 1853년에 출간되었으니 제대로된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 참으로 오랜 세월이 걸렸다.

 

여기에 아카데미 영화제 89년만에 흑인 감독에게 첫 작품상 수상의 영광을 주었다. 흑인노예제의 잔혹함을 다룬 영화를 직접 흑인 감독이 제작했으니, 오바마 대통령의 집권 분위기 속에서 충분히 세간의 주목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잘 읽은 브레드 피트의 전략이 그대로 맞아 떨어진 셈이다. 그렇다고 흑인들에게 자유가 완벽하게 주어진 것은 여전히 아니다. 그것은 '겨울왕국'과 같은 애니메이션만 보아도 여전히 알 수 있다.

 

솔로몬 노섭은 인신매매꾼애 납치되어 절망적인 상황에 이르렀어도 노예로 살기를 거부했다. 꼭 자유인으로 돌아가는 날을 염원한다. 그 염원의 실현에 관객은 몰입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솔로몬 노섭은 책에서만 노예해방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그가 직접 실천을 했다는 점에서 평가를 받을 만했다. 그는 직접 지옥의 경험을 했기 때문에 자유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있었다. 원래 자유가 없는 사람과 자유를 박탈당한 사람이 느끼는 고통의 정도는 분명 다를 수 밖에 없다.

 

'노예 12'은 지옥같은 노예의 삶에서 부자유의 고통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겨울왕국(원제 Frozen)'은 엘사가 스스로 남을 해칠 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 억제해야 하는 개인의 부자유를 다루고 있다. 남들이 없는 능력때문에 스스로 억제하는 부자유와 외부적으로 노예의 삶은 모두 자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외적 자유의 시대에서 이제 우리는 내적 부자유의 시대에 살고 있다. 두 작품은 모두 혼자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에 대한 한계를 말한다. 그런데 결론을 맞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솔로몬 노섭은 노예해방을 위해 헌신했지만, 그가 어떻게 언제 왜 죽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겨울왕국'은 자유와 부자유의 적절한 해피엔딩이다. 그런 점에서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은 여전히 유아적인 환타지 안에 있음을 인식하게 만든다.

 

엘사 공주가 렛잇고를 부르며 자신만의 자유 공간을 구축하지만, 그로인해 다른 이들의 자유가 박탈된다. 그것이 겨울을 의미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할 때 누군가에게 그것이 해를 끼친다는 점을 담고 있는데 부자유의 겨울을 물리치는 수단이 자매애였다. 남과의 사랑, 이성 간의 사랑도 남과의 사랑이다. 오히려 사랑의 범위가 좁아진 셈이다. '겨울왕국'은 사랑의 범위가 좁아 졌음에도 가족애가 역설적으로 세상의 자유와 행복을 보장한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우정이 더 세상을 자유롭게 하지 않을까. 물론 엘사와 안나는 평범한 가족이 아니라 왕족이었다. 자유를 원한다는 그들은 누군가를 희생하지도, 자신이 희생을 닫하지도 않고 해피엔딩으로 끝이 났다. 꼭 흑인이 등장할 필요는 없겠지만 왕국에는 철저한 신분제도가 유지 된다는 점도 은폐된다. 왕국은 아름답고 평온하며, 노예의 삶이 아니라 모두 공주와 왕자가 된듯싶다. 다시 겨울에서 봄으로 이동했어도 많은 이들에게 자유는 없을텐데 말이다.

 

아카데미에서 흑인이 수상을 했다고 해서 흑인에 대한 차별이 자유롭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바마 대통령이 흑인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앞으로 흑인 대통령이 계속 선출된다는 보장은 어렵다. 솔로몬 노섭처럼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 헌신하는 이들이 목숨을 잃는 등 위험에 처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미국 흑인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여전히 미국은 그러한 위협 속에 있기도 하다. 문화적 콘텐츠나 그 콘텐츠를 지배하는 무의식에는 여전히 흑인이 배제되어 있다.

 

'겨울왕국'에서도 흑인은 등장하지 않으며 어쨌든 눈이 크고 피부색이 하얀 백인들만이 있다. 왕이나 여왕은 말할 것도 없이 흑인 왕자와 공주는 존재할 수 없다. 하나같이 흑인을 노예로 부리던 농장주 부인이나 자녀들같은 백인은 상류층이나 왕족으로 등장한다. 다른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도 백인이다. 아니 그들이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엘사나 안나가 흑인의 자유를 위해 분투하지는 않는다. 겨울왕국만 보고 있으면, 신분제적 질서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직도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속적 차별과 계층적 편견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

 

이번 아카데미에서 감독상을 비롯해 7개의 부문에 걸쳐 수상한 '그래비티(Gravity)'는 자유의 또다른 의미를 전달해준다. 우주공간은 자유스러운 공간이고 지구는 제한된 공간이라는 인식을 단번에 깨워준다. 먹고살기 위해 발버둥 쳐야하는 제한된 지구공간이 오히려 자유가 존재하는 공간임을 드러낸다.

 

중력으로 끌어당기는 땅을 밟고 있어야 자유가 보장된다는 점이 역설적이다. 우주는 아무것도 없는 무장애의 공간인 것같지만 자유를 억압하는 자유박탈의 공간이었다. 그런 점에서 무제한의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일정한 구속이 자유를 보장한다. 그것은 책임과 의무속에 자유가 보장된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엘사 공주가 자신에게 제한과 억제를 가할 때 자유가 보장되는 것과 같다.

 

라이언 스톤(산드라 블록)은 우주라는 공간을 벗어나야 했다. 노예제가 존재하는 환경은 공기와 중력에서 벗어난 우주 환경이 부자유로 죽음을 주는 것과 같다. 그 환경을 벗어날 수 없다면 개인들의 분투는 무용지물이다. 벗어나거나 아니면 바꾸어야 한다. 엘사가 왜 마법의 능력을 사용하는지 그것을 탐구하고 벗어날 노력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이들의 부자유는 시작되었다. 부자유의 책임이 개인에게 있다는 생각은 여전히 디즈니의 한계인 것이다.


김헌식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