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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는 왜 블랙 통속극이 되었나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1. 2. 9. 18:09

<김헌식 칼럼>´하녀´는 왜 블랙 통속극이 되었나

 2010.05.15 12:12

 




[김헌식 문화평론가]원작은 컸고, 리메이커는 너무 작았다. 리메이커의 작은 그릇은 원작을 감내하기에 버거웠다. 영화 < 하녀 > 는 그렇게 원작의 그늘에서 허우적 거려야 했다. 그러다보니 진지한 상황과 대사는 관객의 웃음을 자아냈다. 그 결과 애초에 강조했던 스릴러는 블랙 통속극이 되었다. 결말의 메타포를 통해 예술가적 장식을 덧붙이려 했지만, 그것은 화룡점정이 아니라 통속극같은 결말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친 것에 그쳤다. 

리메이크는 아니었다. 원작과 닮은 점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기괴하게도 남은 것은 시대와 어긋난 과거의 감수성이었다. 그것은 결국 어이없는 웃음으로 집단적 일체감을 형성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영화 < 하녀 > 의 커다란 공헌 가운데 하나다. 영화 < 하녀 > 는 가족주의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고, 그것이 영화의 탄생과 종말, 그리고 의미를 해석하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그것이 바로 어긋나고 지체된 연출의 감수성이었고, 은이와 같이 스스로 자신의 몸을 태워버렸다. 

영화의 내적 동기는 모두 '아이'에 응축되어 있다. 대저택의 안주인인 해라(서우)는 쌍둥이를 임신하고 그 무거운 몸을 보살펴 줄 하녀를 한 명 구하게 된다. 그 하녀가 은이(전도연)다. 해라가 임신했기 때문에 훈(이정재)은 은이와 육체적 관계를 맺게 된다. 임신한 아내와의 성적 관계가 원활하지 않았던 탓이다. 

그 관계에서 훈에게 은이를 향한 사랑은 없었지만, 은이가 임신한 아이에 대해서만은 큰 집착을 보인다. 그는 가부장적 나르시스트의 욕망을 보이는듯 자신의 아이들을 끊임없이 생산하려 한다. 가부장적 훈의 아내와 어머니는 은이의 아이를 없애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아이를 잃은 은이는 뒤늦게 복수를 다짐하며 심기일전한다. 

은이가 그들에게 '복수'라도 강하게 질렀다면 막장 드라마의 통쾌함이라도 선사했으리라. 하지만 영화는 갑자기 '자기 산화'했다. 은이를 잘 따랐던 첫째 아이를 통한 복수를 꿈꾸었지 모른다. 그렇다면 은이는 더이상 착하고 순수하지 않다. 과연 은이의 복수는 아이의 외상을 통한 행복의 파괴였을까. 그 아이는 자신이 매우 따랐던 은이의 산화적 죽음을 바라보았고 외상을 입었을 그 아이가 그 집안에서 부모에게 어떤 감정을 갖게 되는가가 은이의 마지막 행동을 풀어줄 열쇠가 될 것이다. 

그것을 암시하는 것은 마지막 장면의 생밀축하 파티겠다. 그 아이는 많은 유산과 선물에 관심이 없다. 표정은 굳었고, 우울하다. 화려해 보이는 대저택의 행복함은 추운 겨울날 한데에 존재하며 그 저택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첫째 아이의 표정과 감성은 아주 메말랐고 차갑다. 자신들의 많은 아이를 통해 행복한 삶을 구가할 것으로 여기고 있는 해라와 훈의 행복은 그 첫째 아이의 상처와 그로인한 앞으로의 행동에 달려 있을 듯 싶다. 

어쨌든 은이는 대저택 주인의 아이를 임신했기 때문에 영화의 첫장면에서 투신 자살한 여인과 같이 되었다. 영화의 의도 대로라면 우리 일상은 타인에게 무심하듯 자신의 삶만을 꾸리지만 결국 타인의 삶들은 우리와 다르지 않으며 그들의 운명은 우리의 운명과 별개가 아니다. 

하지만 최종선택은 은이에게 있었고, 그 선택이 반드시 자기 파괴에 이를 필요는 없다. 아이 때문에 빚어진 자신의 상처를 아이에게 전이시키는 것은 잔인한 일이고 장담할 수 없다. 그것은 마지막 여운으로 남기에는 갑작스럽다. 오랜 서사구조의 전개가 갑자기 지루하고도 어이없게 느껴지고 만다. 

중요한 것은 변화된 여성성과 앞으로의 전망이다. 예컨대, 영화 < 하녀 > 는 다산을 강조하고, 그 속에서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음모에 맞서 싸우는 적극적인 여성상을 제시하지 못하고 자기 산화적 대응이라는 수동적인 선택을 통해 영화적 결말을 내려버리는 연출력은 어긋난 웃음을 터트려 버리기에 충분하다. 특히 은이라는 캐릭터은 전도연의 연기와 관련 없이 변해버린 현실 즉 골드미스와 싱글족, 그리고 포미족의 번성 속에서 수동적으로만 존재할 때 조소의 대상이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