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랑을 오락화한 프로그램들이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다. KBS ‘장미의 전쟁’부터 MBC ‘강호동의 천생연분’ ‘러브 서바이벌 두근두근’, 그리고 SBS ‘X맨’ ‘연애편지’까지 방송 3사가 선보여 왔던 연예인 짝짓기 프로그램은 시청률을 보장해 주는 오락상품이다.
‘구애 프로그램’은 연예인 입장에서도 적지 않은 홍보효과를 얻을 수 있다. ‘강호동의 천생연분’을 통해 유민 빈 세븐 이영은 등은 시청자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대중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강은비는 ‘X맨’ 출연으로 인지도를 크게 높였고 신인인 장영란도 ‘연애편지’에서 뭇남자에게 추파를 던지는 컨셉트로 금세 이름을 알렸다.(둘 다 ‘안티’가 동반됐지만)
만 2년이 돼가는 ‘X맨’이 탄생시킨 김종국-윤은혜 커플을 실제 연인이 되게 해주자는 카페가 생겼을 정도다. 회원만도 1만4000명이다. ‘가짜 커플’의 힘이 이렇게 요란할지는 제작진조차도 예측하지 못했다. 짝짓기 프로그램을 표방하지 않는 오락 프로그램들도 대화나 게임 중 특정 커플을 만들기 위해 분위기를 유도하기도 한다. KBS ‘여걸식스’ 코너는 6명의 여걸이 펼치는 재담 외에도 남자 연예인과 어떻게 해서라도 엮어보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왜 이렇게 방송에서 남녀 커플을 맺어주지 못해 안달이 난 것일까? 이는 오락프로그램의 경향을 들여다 보면 조금씩 드러난다. 요즘 오락 프로그램들은 지극히 사적인 경험담을 극적으로 털어놓는 게 관건이다.
얼마 전 한 시상식에서 사회자가 다니엘 헤니에게 추파를 던지는 박경림과 박희진에게 “TV를 사적인 목적으로 사용하지 맙시다”며 경고했지만 오락프로그램에서는 입담이 뒷받침돼 ‘TV를 사적인 목적으로 잘 사용하는’ 연예인이 자리를 잡은 지 오래다.
이효리나 노홍철 김제동 등은 사생활을 솔직하게 털어 놓아 인기를 끈 게스트나 MC다. 시청자들은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스타의 사적인 공간에 초대된 듯한 착각에 빠져 그 착각을 즐기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 지점에서 스타 커플 맺기의 매력이 발산된다. 공과 사의 경계가 이미 무너진 TV 오락프로그램에서 연예인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지극히 사적인 얘기’는 최고의 소재다. 구애 프로그램은 이를 즐기기 위해 고안된 놀이다.
시청자들은 ‘설정’인 줄 알면서도 누가 커플로 맺어질까 조마조마하며 시청한다. 자신이 선호하는 커플을 맺어달라고 적극 지지하지만 그 커플에 끼어 들어 삼각 또는 사각관계를 만드는 여자 연예인에게는 입에 담기 힘든 욕이나 비방을 시청자 게시판에 올리기도 한다.
사실 짝짓기 프로그램의 제작 방식을 보면 100% 허구는 아니다. 출연자들의 대사는 대본에 의한 것이 아니다. 어느 정도 설정은 있지만 대사 대부분은 애드립이다. 강은비에게 김종국-윤은혜 커플을 갈라 놓아라는 지령을 내리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얘기다.
‘X맨’의 경우 16명의 출연자가 1시간 방송을 위해 무려 12시간동안 녹화에 임한다. ENG 카메라 8대, 6㎜ 카메라 10대가 동원돼 샅샅이 훑기 때문에 웬만한 상황은 모두 포착된다. ‘X맨’ 곽승영PD는 “시청자에게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출연자의 감정도 소홀히 다루지 않는다. 실제상황은 아니지만 실제처럼 보일 수 있을 정도로 가식 없고, 솔직한 상황에서 연출되는 커플맺기는 사랑을 체험하기 힘든 시청자에게 대리만족을 준다”고 말한다.
![]() |
하지만 최근 ‘구애 프로그램’들은 몇 가지 개선점을 안고 있다. ‘강호동의 천생연분’ 때만 해도 쑥스러움이라 게 있었다. 비록 연출이지만 남녀의 사랑을 맺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명랑운동회’ 같은 게임을 통해 서먹함을 없앴고 공개 구애도 신선했다. 그러나 요즘 짝짓기 프로그램은 마치 구애 경연장이나 다름없다. 구애에 실패하면 다른 여자연예인에게 더욱 노골적으로 접근하는 게 ‘당연하다’.
이미 맺어진 커플의 신선도가 떨어진다고 판단되면 삼각관계를 조성해 ‘재미’를 만들어 낸다. ‘짝짓기 프로 전문 MC’ 강호동은 출연자에게 ‘완전 사랑합니까?’ ‘매일 사랑합니까?’라는 질문을 던지고는 ‘예’나 ‘아니오’로만 대답하기를 강요한다. ‘눈빛 교환’의 시간도 3초다. 커플이 이뤄지면 바로 뽀뽀한다.
문제는 짝짓기 프로그램의 주 시청층이 10대라는 사실이다. 첫눈에 ‘심장이 멎었다’라고 말하는 ‘즉흥성’과 구애에 실패하면 바로 다른 상대에게 더 노골적으로 대시하는 ‘일회성’ 등 TV의 사랑법이 가뜩이나 웬만한 사랑에는 감동하기 힘든 이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곽승영PD는 “10대가 주 시청자여서 자막으로 파트너와 게임을 하기 위해 짝을 고르는 단계에 불과하다는 말을 꼭 넣게 하고 노골적인 표현은 가급적이면 편집에서 뺀다”고 밝힌다.
요즘 젊은이들은 어쩌면 ‘사랑의 스튜디오’ 같은 진짜 커플 맺기 프로그램을 촌스럽게 여길 것이다. 대신 극적으로 구성된 연예인들의 ‘가짜 커플’이 만들어 내는 ‘가짜 감동’과 ‘가짜환상’을 더 재밌게 즐긴다.(구애프로그램은 스탠딩 파티 같은 신세대 문화와 닮았다)
그러나 그 ‘가짜감동’을 그대로 둘것인가는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짝짓기 프로그램에는 연예인들이 음반이나 영화, 드라마를 홍보해야 하는 시점에 출연해 ‘가짜구애’를 하게된다. 이런 프로그램에서 주목을 끄는 요인이 외모와 이성을 유혹할만한 춤실력에 약간의 스포츠 실력밖에 없다는 점도 프로그램을 좀 더 다양하게 제작할 여지를 남기고 있다.
문화평론가 김헌식씨는 “단순한 재미를 만들어 내는 짝짓기 프로그램은 신데렐라 드라마처럼 욕을 하면서도 보게 되는 메카니즘을 갖고 있다”며 “어린이에게 사랑에 대한 잘못된 환상을 심어주면서 시청률을 높이는 방식은 재고돼야 한다”고 말했다. 내편과 네편을 만들고, 내편은 밀어주고 네편은 괴롭히는 청소년 심리를 짝짓기 프로그램이 부추길 수 있다는 얘기다.
‘시뮬라시옹’(모의실험)을 확대 재생산해 실재로 보이게 하는 것은 탈근대 사회의 전략이기도 하다. 따라서 ‘가짜사랑’ ‘가짜 커플’을 만드는 것은 하나의 유행일 수 있다. 그러나 소모적인 연출이냐, 여운을 남기는 연출이냐는 제작자의 몫으로 남는다.
서병기 대중문화전문기자(wp@herald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