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에 군림아닌 소통 중시
기득권 관료와 싸우는 영웅
대중욕망 리더십과 교차
매력·소통 지도자상 부각
…
왕 배역 젊은 스타 기용
군주아닌 개인캐릭터 발산
박근혜 비키니·문재인 복근
안철수 신사 엘리트 이미지
정치인 팬덤·스타덤 반영
왕은 ‘전제 군주’가 아니라 사랑에 빠진 젊고 매혹적인 ‘스타’다. 군림하고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기득권층인 관료들과 싸우는 시련 속 영웅이며 백성과 직접적인 소통을 추구하는 지도자다. 대선과 총선의 해, ‘해를 품은 달’이 일으킨 김수현 신드롬과 국내 대중문화 ‘왕의 전성시대’는 때론 노골적으로, 때론 우회하며 국민들이 바라는 정치지도자상과 대중들이 욕망하는 우리 시대의 리더십을 드러낸다. 매력과 소통의 리더십, 매혹의 정치심리학과 쌍방향 소통의 통치철학이다. 다가오는 선거에서 민심의 지지를 얻고 싶은 자, 김수현 신드롬에서 배울 일이다.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이하 ‘해품달’)이 뜨거운 화제 속에 15일 종영했다. 성ㆍ연령별 비중이 가장 높았던 30~40대 여성 시청자를 비롯한 팬들은 김수현이 연기한 젊고 매력적인 왕 ‘이훤’에 열광했다. 세종의 한글 창제를 소재로 한 SBS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 이후 ‘해품달’을 비롯해 국내 대중문화계에선 ‘왕의 전성시대’라고 할 만큼 왕을 주인공으로 한 새로운 이야기와 스타일의 궁중사극이 붐을 맞았다. 당장 오는 21일 MBC ‘더 킹 투하츠’와 SBS ‘옥탑방 왕세자’가 나란히 첫 방송을 시작한다. 영화로는 15일 개봉한 ‘가비’에 이어 ‘조선의 왕’ ‘후궁: 제왕의 첩’ ‘나는 왕이로소이다’ 등이 잇따른다. 총선과 대선이 치러지는 올해 이 같은 유행은 의미심장하다. 왜 왕인가.
일단 이들 콘텐츠 중 과거의 궁중사극과 가장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은 역사ㆍ정치보다는 로맨스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것과, 젊고 매력적인 왕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청춘스타를 기용한 왕의 연령층이 확 내려갔다. 김수현에 이어 이승기(‘더 킹 투하츠’), 유천(‘옥탑방 왕세자’), 김동욱(‘후궁’), 주지훈(‘나는 왕이로소이다’) 등이 대표적이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도 송중기가 세종의 젊은 시절을 연기했다.
문화평론가 김헌식 씨는 “‘해품달’은 기존의 퓨전사극에서 맹아만 있었던 현대적 요소들을 극대화시켜 보여줬다”며 “과거와 같이 역사적 사실과 정치적 이슈를 중심에 놓고 로맨스를 양념처럼 끼워넣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왕의 러브 스토리에 초점을 맞춰 여성 팬들을 열광시킨다”고 분석했다. “이에 따라 최근 사극 속 왕은 ‘군주’가 아니라 당대 여성들이 흠모하는 스타로서 존재를 드러낸다”고도 덧붙였다. 이는 정치적 경력이나 이념, 정책뿐 아니라 성적 요소를 포함하는 개인적 매력이 대중의 선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최근 흐름을 반영한다. 이른바 정치인의 스타화와 정치인을 향한 팬덤 현상이다.
2000년대 이후 두드러진 추세로 인터넷과 SNS의 발달은 이 같은 경향을 더욱 부채질했다. 최근 여야의 공천과정을 보면 후보자들의 직위나 공직 경험, 정치인으로서의 경력뿐 아니라 개인적 매력을 지닌 ‘스타’로서의 자질이나 인지도가 중요한 기준으로 부각됐다. 정치지도자에게서 개인적 매력, 특히 ‘섹스 어필’이 중요해지는 것은 전 세계적인 흐름이기도 하다. 선거나 취임 이후에도 때때로 군살 없는 근육질 몸매를 드러낸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나 미모의 부인이 늘 화제를 일으키는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강한 남성성을 과시하는 푸틴 러시아 총리 등이 대표적이다. 캐머런 영국 총리나 메르켈 독일 총리도 마찬가지다. 국내에선 ‘박근혜의 비키니’ ‘문재인의 복근’을 같은 맥락으로 읽을 수 있다. 정치적 경험이 전무함에도 강력한 대권주자로 꼽히는 안철수의 경우 귀족ㆍ엘리트적인 면모나 부드럽고 신사적인 이미지가 유권자들의 지지를 끌어내고 있는, 넓은 의미에서의 ‘남성적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김헌식 씨는 “정치인들의 이념과 정책이 아니라 매력적인 ‘캐릭터’로서의 특성이 유권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당대의 가장 강력한 기득권 집단인 신권(臣權)에 위협받고 탄압받으면서도 이를 혁파하고 백성과 소통하고 애민정책을 펼치는 왕의 모습도 ‘뿌리 깊은 나무’의 세종이나 ‘해품달’의 이훤뿐만 아니라 최근 거의 모든 사극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부정적으로는 ‘포퓰리즘’이고 긍정적으로는 ‘민주주의적 소통’을 추구하는 존재로서의 왕이다. ‘가비’에선 친일, 친러 세력에 둘러싸여 완전한 고독과 고립 속에 처해 있으면서도 대한제국의 야심을 이루려는 고종의 애국ㆍ애민적인 풍모가 드려진다. 왕권을 넘는 무소불위의 통치권은 물론이고 당대의 상업과 경제를 장악한 ‘신권’은 현대의 기득권층이나 부패한 관료집단, 재벌과 밀착된 권력을 표상한다. 신권을 혁파하고 백성과 직접 소통하려는 존재에 대한 갈망은 급기야 ‘왕이 된 천민’이나 ‘거지로 위장한 왕’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내기도 한다. ‘조선의 왕’에서 이병헌은 외모가 닮았다는 이유로 광해군의 대리 역할을 하는 천출의 인물로 등장한다. ‘조선의 왕’ 제작관계자는 “최하층 신분으로서 고통과 설움을 잘 알기 때문에 주인공은 백성의 존재 하나 하나를 보듬으려는 왕의 역할에 눈떠 간다”고 설명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왕위에 오르기 전 세종이 백성들을 살피기 위해 거지로 신분을 위장해 궁 밖으로 나서 겪는 이야기를 담게 된다.
2012년, 왕은 민심과 여심을 품었다.
이형석 기자/suk@herald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