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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편견 조장하는 ‘은밀하게 위대하게’?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4. 1. 19. 14:05
장애인 편견 조장하는 ‘은밀하게 위대하게’
[김헌식의 문화비빔밥] 김수현이 버린 동구는 어디 갔을까?
[0호] 2013년 06월 16일 (일)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  media@mediatoday.co.kr
6월18일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가 장애인 영화관람데이 행사에서 시청각장애인들을 위해 제작된 한글자막 및 화면해설과 함께 지정 극장에서 상영된다. 이른바 베리어프리 영화의 상영이다. 이 프로그램을 운영해온 CGV는 지난 제17회 전국농아인대회'에서 감사패를 수상했다. 장애인을 위한 무장애 영화 상영을 추진하는 것 자체는 매우 의미 깊은 일이다. 다만 이제는 상영자체를 위한 형식적인 기준보다는 콘텐츠 자체에 대한 평가도 뒤따라야할 것이다. 그런 점은 <은밀하게 위대하게>에서 단적으로 가늠해볼 수 있다. 
 
이 영화를 두고 원작이 있는 작품이 역시 흥행을 한다거나 웹툰이 원 소스 멀티 유즈 차원에서 각광을 받는다는 식의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물론 웹툰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100만 독자가 선호했다. 2011년 대한민국 콘텐츠어워드에서 만화부문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도 받았다. 그리고 웹툰 원작을 바탕으로 제작한 영화는 단기간에 수백만의 관객을 모았다. 스크린을 독과점해서 말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웹툰을 인터넷 상에서 클릭하면 원작의 가치가 높고, 이를 통해 대중적 흥행을 달성하면 모두 끝나는 것일까. 
 
만화도 영화도 배우도 모두 장애인을 허구로 다루다 
 
핵심은 바보라는 말이다. 만화나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에서 주인공 캐릭터는 바보 행세를 하는 원류환(김수현)이다. 우리는 원류환을 아무런 느낌 없이 바보로 칭한다. 미디어는 ‘왕’ 김수현의 ‘바보’ 변신을 주목하고 때로는 찬탄했다. 이유는 격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왕은 아주 뛰어난 것 바보는 아주 그렇지 않은 것이라는 대비가 주목 효과를 낳았다. 꽃미남왕과 지저분한 바보다. 그 자체에서 장애인의 관점은 이미 배제될 심산임을 암시한다. 그렇게 무의식이 도사리고 있다. 과연 김수현이 진짜 지적 장애인으로 등장했다면, 이렇게 많은 이들이 주목했을지 의문이다. 만화와 영화도, 배우도 모두 장애인을 허구로 다루었을 뿐이다.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한 장면.
 
정색하고 말하면 바보는 지적 장애인이다. 지적 장애인들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순수한 이미지를 추구하면서 희생하는 착한 존재로 나오기 일쑤이다. 이의 정점이 바로 <7번방의 선물>이었다. 이 영화에서는 감동을 위해 지적 장애인을 죽여 버렸다. 자기 욕망이 없는 순수의 착한 존재들은 그렇게 자신의 목숨이나 몸을 쉽게 버리는 존재가 된지 오래다. 한때 많은 작품들에서 바보는 실업자로 등장했다. 직업이 없이 가족과 이웃에게 기대어 사는 존재로 등장했다. 
 
강풀의 만화 <바보>에서와 같이 직업이 있는 장애인이 등장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인식은 많이 개선되어 드라마에도 등장한다. 한참 방영 중인 드라마 <원더풀마마>에서 장기남(안내상)은 청각장애에 언어장애를 갖고 있지만, 패션회사를 운영한다.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에서 고무적인 점은 장애인이 동네 슈퍼에서 일을 하고 월급을 적지만 정기적으로 받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존재한다. 동네 아이들은 동구에게 항상 돌을 던진다. 동구는 그 돌에 맞아도 웃는 표정을 짓는다. 아무리 지적인 장애가 있어도 그렇게 돌을 자주 맞는데 웃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것도 머리에 강력하게 타격을 당하는 데도 말이다. 그들도 아픔을 느끼고, 분노한다. 무엇보다 지적 장애인에게 돌을 던지는 행위 자체는 그릇된 것이지만, 영화에서 이를 제지하거나 그 행위가 바르지 않은 것을 지적하지 않는다. 또한 고등학생 윤유란(박은빈)의 고교생 동생 윤유준은 항상 동구의 뒷통수를 때린다. 그리고 막말을 일삼는다. 그의 행동은 끝까지 개선되지 않는다. 사람의 머리를 때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무심히 지나간다. 난데없이 동구를 버리고 원류환으로 돌아간 김수현은 모둔 것을 포용한다. 하지만 지적장애인들은 그런 그들을 포용할 수 없을 것이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희극을 위한 도구화 수단화하는 ‘은밀하게 위대하게’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비 오는날 동구가 대변을 보는 장면이다. 아무리 지적 장애인이라 해도 비오는 날 사람들이 오가는 길에서 대변을 보는 지능 상태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 정도라면 슈퍼에서 일을 할 수도 없을뿐더러 일상에서 많은 이들에게 피해를 줄 것이다. 역설적으로 그러한 우스운 행동들을 할 수는 영화의 등장인물들이나 관객들이 즐거워한다.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 포스터.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는 장애인을 희극을 위한 도구로 수단화하고 있다. 장애인을 골려먹고 자신을 위해 이용하는 이웃들은 어느새 다 용서가 된다. 실제로 그러한 행위들에 당하는 지적 장애인들의 관점은 배제되어 있다. 원류환은 자신이 진짜 장애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더구나 장애인은 단정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지저분하지도 않고 옷차림도 촌스럽지 않다. 영화 <바보>도 똑같은 오류를 저지른 바가 있다.
 
장애는 흔히 드라마나 영화에서 위장이나 눈속임을 위해 사용된다.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에서는 카이저 소제는 연쇄 살인범의 정체성을 숨기기 위해 지체 장애인으로 위장한다. 더구나 그는 지적 장애인을 겸한다. 이 때문에 수사관들은 그가 범인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육체적으로나 지능적으로 비장애인이었다. 다만, 영혼이 장애에 걸려 있었다. 
 
영화 <검은집>에서 신이화(유선)는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남편들을 대상으로 연쇄 살인을 저지른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범인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이유는 지체장애를 가진데다가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점들도 편견이다. 장애인은 약하고 배려해 주어야하는 시혜의 대상이라는 생각은 이런 범죄자들을 위장케 하고 기생하게 만들 수 있다. 
 
만화와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에서 원류환은 결국 위장되었던 바보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생명의 지속성을 가질 수 없는 동구, 그리고 그 캐릭터를 언제든 버릴 수 있었던 원류환을 볼 때 대중문화 속 바보-지적 장애인은 만들어진 이미지임을 확인케 한다. 이는 장애인과 미디어 매개 현상의 특성을 은유적으로 함의하고 있다. 
 
지적장애인도 욕망이 있고 자아가 있다
 
아무리 지적 장애인이라고 해도 욕망이 있으며 자아가 있다. 그들은 남을 웃기게 위해서 혹은 정화시키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장애인들의 시선일 뿐이다. 일례로 심형래의 영구나 이창훈의 맹구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그들은 지능이 낮은 것 같지만, 현명하고 대단히 자아의식이 강할 뿐만 아니라 욕망의 존재들임을 드러내주었다. 비장애인들의 차별적인 행태들을 골려주거나 우회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만화로 백 만 명 이상 그리고 영화로 수백 만 명의 관객에게 장애인 이미지를 각인 시켰다. 물론 그 이미지들은 장애인에 대한 사실이나 은유, 상징적인 차원 어느 모로 보나 부정적이다. 부정적 이미지의 각인은 엎어진 물이다. 엎어진 물이 있어 축축한데도 그 유희성에 둔감해져 있었다. 뭔가 뽕을 맞는 듯. 그런 영화를 한글자막이나 화면해설로 상영 한다고 하여 찬사를 보내는 행태들이 장애인의 현실을 말해주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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