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장기하와 얼굴들'은 루저문화 왜곡한다.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09. 3. 17. 14:41

-´장기하와 얼굴들´ 루저 문화의 허구성

루저라는 단어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루저 문화의 핵심

‘장기하와 얼굴들’이 한국 대중음악상에서 3관왕을 차지했다. 이 상을 받지 않았어도 이미 장기하의 노래들은 대중적으로 많은 호응을 받고 있다. 단지 마니아층의 호응이 아니고, 실제 많은 음반판매량을 보이고 있다. 장기하의 노래들은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등과 같이 루저 문화의 대표 아이콘이라는 평가가 있다. 일상성 속에서 문화적 사회적 의미들을 이끌어 낼만한 요소가 있다.

다만,´장기하...´등의 노래들과 루저 관련소설들이 꽤 나오는 것을 따라 최근에 루저 담론들이 형성되고 있는데, 과연 그 담론이 맞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루저 문화는 당당한 자기 정체성을 밝히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정체성은 바로 루저라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는 자신이 루저라는 것을 밝히지 않는다고 말한다. 계몽의 기운이 느껴진다.

확실하게 인식하고 정정정당당하게 밝히라는 것이다. 그리고 루저들끼리 연대하라고 한다. 루저라는 것을 당당하게 밝히는 문화라고 한다면 모순적이 된다. 승자와 패자라는 이분법적인 도식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 도식을 용인한다고 해도 루저 문화를 주도하는 사람들은 정말 승자와 패자의 도식에서 패자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루저 담론에는 한시적인 시간과 나그네의 시선이 많다. 예컨대, 반지하방의 축축한 이불과 쩍쩍 달라붙은 방바닥의 기운은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편안한 공간에서 살던 이들이 한 번 그 공간에 들어가 보았을 때 확실하게 인지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부잣집 도련님이 가난한 집에 와서 가난에 대해서 새삼 느끼고 낭만화하거나 자신의 작품으로 만들어 이름을 높이는 행위와 같다. 이를 오늘날 우리는 ‘가난의 상품화’라고 한다. 루저문화는 가난의 상품화가 될 여지가 많다. 진정 가난한 자들은 가난이 무엇인지 모르며, 그것이 상품화가 되는지 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것을 계급의식이 없기 때문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어떻게 보면 현재의 루저 문화 담론을 주도하는 이들은 진정한 루저들이 아니라 나그네들이다. 언제인가 그 판을 벗어날 수 있는 이들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 판을 벗어날 수 없는 이들은 현실 자체가 끔찍할 수 있다. 그 끔찍한 현실에서 무기력하다면, 결국에는 루저가 될지 모르겠다. 루저 문화의 핵심은 단순히 지금 현재의 묘사에 있지 않다.

문제는 단순히 루저를 범주화 하고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꿈과 희망을 가지고 어떤 삶을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가이다. 많은 루저 담론들은 생물학적인 본성도 거스르면서 영원히 유아의 유토피아에 정신을 가두어 버린다. 육체를 혹사시키고 욕망 자체를 거세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 결과는 자아분열이다.

루저 문화의 핵심은 당당하게 루저의 정체성을 밝히고 그 현실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현실을 위한 연대도 아니다. 루저와 위너라는 이분법적 도식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열패감을 만들어내는 이들과 구조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과 그것을 위한 소통이다. 즉 루저라는 단어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루저 문화의 핵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루저라고 자임하는 것이 승자의 도식에 갇혀버리는 것이다. 톰과 제리의 구도처럼 강자와 약자, 승자와 패자는 역설적이고 상대적이다. 이는 행태경제학에서 유행하는 ´승자의 저주´라는 개념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기계적인 승자와 패자의 담론은 자본주의 상품구조나 신자유주의적인 양극화의 사회탓만은 아니다.

승자에 대한 안티적인 루저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성은 승자에 대한 선망을 내포해 버린다. 루저는 자랑거리가 될 수 없듯이 당당할 수는 없다. 루저 문화를 상품화 하는 이들은 루저를 규정하고 계몽하며 승자가 되려는 역설적 권력자에 위치한다.

즉, 왜 사람들이 루저를 자임하지 않는가를 계몽하는 것이 아니라 루저라는 딱지 자체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알파걸이나 여초현상이라는 말이 없어야 평등한 세상이듯, 루저 문화라는 역설적인 단어가 없어져야 승자의 도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루저 문화는 자칫 승자의 도식에 굴복하는 문화적 담론이 되고 마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헌식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