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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 음습한 곳일수록 약자가 이긴다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1. 2. 9. 18:49

<김헌식 칼럼> ´이끼´ 음습한 곳일수록 약자가 이긴다

데일리안 | 입력 2010.07.27 10:43

 




[ 김헌식 문화평론가]영화 도입부에서 박민욱(유준상) 검사는 주인공 유해국(박해일)에게 이끼처럼 조용하게 살라고 말한다. 하지만 유해국은 이끼처럼 살지 못한다. 영화 이끼는 유해국이 이끼처럼 살지 못한다. 유해국이 아니어도 영화 안에 제목과 같이 이끼처럼 살아낸 인물은 따로 있다. 

미국 아동안전전문가 케네스 우든(Kenneth Wooden)은 '차일드 루어스'(Child Lures)라는 책에서 실험을 통해 어린아이들이 유괴되는데 35초밖에 안걸린다는 사실을 밝혔다. 연구내용에 따르면 짧은 시간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아동들이 자발적으로 따라가는 현상이 벌어졌다. 

자발적으로 따라가니 유괴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아동들은 유괴범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것일까? 먹을거리나 선물의 유혹 때문에 쉽게 따라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그간 영화와 드라마에서 유괴범이 보인 상투적인 대사는 맛있는 음식이나 장난감으로 아동들을 유혹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는 달랐다. 유괴범들은 아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픈 척하거나 힘이 없어 했다. 자신을 부르는 이가 강한 존재가 아니고, 약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성립하면, 아동에게는 마음의 무장해제가 이루어지게 된다. 

영화 < 유주얼 서스펙트 > (The Usual Suspects)에서 가장 무서운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던 이는 가장 약자인 등장인물이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그가 흉악한 일을 저지를수 없는 유약한 존재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영화 < 검은집 > 에서 다섯명의 남자가 죽어나지만 범인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다. 

< 유주얼 서스펙트 > 처럼 장애인데다가 여성이었다. 이 영화에서 신이화 역을 맡았던 유선은 영화 < 이끼 > 에서 다시금 비슷한 맥락의 배역을 맡았다. 바로 이끼의 철학을 보여주며 최후의 승리를 거둔 인물이 된다. 악역으로만 등장했던 영화 < 검은집 > 과는 달리 완벽한 승리였다. 이끼의 철학은 약자의 승리였다. 

이끼는 바위나 자갈, 나무껍질 등에 바짝 붙어 산다. 다만 햇볕이 강하게 비치지 않는 음습한 곳에서 자란다. 유선이 분한 이영지는 어린 나이에 마을청년들에게서 집단 강간을 당한다. 유목형(허준호)은 구약성서 출애굽기 21장 24, 25절 '눈은 눈으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 논리에 충실하다. 유목형은 천용덕(정재영)과 그의 다른 동료형사와 함께 마을 청년들을 집단 폭행하도록 한다. 

천용덕은 스스로 자신이 유목형의 똘마니가 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천용덕이 유목형을 주목하고 선택한 이유는 그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얻기 때문이다. 무욕과 도덕적 고양의식으로 철저한 유목형은 도덕적으로 맑기 때문에 부정적인 행동을 일삼는 천용덕 일파의 본색을 숨겨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물리적인 힘이나 폭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쉽게 사람들의 신임을 얻는 유목형은 사람들에게 불신을 받기만 하는 천용덕에게 매우 중요한 보완제가 된다. 그러한 면에서 보자면, 유목형이 가장 강한 사람으로 보인다. 하지만 도덕적 흠결을 가지고 있는 김덕천(유해진), 전석만(김상호), 하성규(김준배)는 항상 도덕적 속죄를 강조하는 유목형이 불편하기만 하다. 물리적인 힘으로는 강하지만 도덕적 흠결이 그들을 한없이 약자로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유목형을 데리고 있어야 한다. 유목형은 천용덕 일파의 부정을 알고 그들을 출애굽기의 논리대로 해하려 한다. 사전에 그는 무력하게 천용덕 일파에게 저지당한다. 그런데 유목형은 어느새 그들에게 생계를 의지해야 하는 무력한 존재가 되었다. 

부정한 행동을 일삼는 그들의 죄악을 파헤칠 수 없으며 무력하게 존재해야 한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목숨을 거두어 아들을 부르고, 내막을 파헤치게 하는 일이다. 육체적으로는 약하지만 정신적 도덕적으로는 강했던 유목형은 결국 육체적 물리적으로 강하지만 도덕적으로 약한 천용덕 일파에게 무력하게 당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어느 쪽으로도 강하지 못한 영지는 어떨까. 유목형을 따르는 영지는 천용덕 일파에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유린당한다. 하지만 그것을 강하게 떨쳐낼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했다. 도덕적 고양의식을 애써 드러내지도 않는다. 영지는 가장 약한 약자였다. 하지만 결국 가장 약한 영지가 이끼의 철학처럼 조용히 모든 것에서 승리를 거둔다. 

어둠속에서 조용하게 힘을 기르는 도광양회와 같다. 모든 구도는 이끼처럼 붙어 있기만 했던 영지의 손안에 있었다. 영화는 "유해국씨죠? 유목형씨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오셔야겠죠?"라는 영지의 말로 시작하고 "유선생님은 절 구원해 주셨고 당신은 복수해 주셨죠."라는 말로 영화는 끝나는 셈이다. 

결국 강자들은 모두 스러지고, 가장 약한 존재가 이기고야 만 것은 결국 이끼의 정신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만약 영지가 강자의 면모를 인위적으로 부각시켰다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아무도 영지가 가장 강한 타격을 조용하게 가할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이끼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햇볕이 잘 들지 않는 음습한 곳이다. 영지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천용덕 일파가 만들어 놓은 음습한 그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음습함에서 탄생하고 성장한 강자는 그것이 가장 약점이 된다. 그리고 이끼에게 덥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