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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추격자>, 결핍된 존재들의 우연적 향연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09. 4. 25. 02:32

영화 <추격자>, 결핍된 존재들의 우연적 향연

추격자, 개봉영화 2008년



제목이 '추격자'다. 별다른 기대감을 갖게 하지 않는다. 범인을 잡는 영화겠다. 그럼 스릴 있는 재미를 주면 된다. 기대감의 충족 요건이다. 더구나 유영철의 사례를 다루었다니 실제감과 궁금증을 자극한다.

그러나 너무 실제와 같다면 영화로 만들 이유가 없다. 극적 서사에 다른 상상력의 얼개가 필요하다. 그 가운데 폭력과 성적 욕망의 대리적 충족, 권력에 대한 희롱과 조소, 징악(懲惡)을 통한 충족감, 자연스러운 희극적 상황을 가로지르는 비극적 상황 속 비장미 등을 준다면 금상첨화겠다. 영화 <추격자>는 이 기대하지 않아야 관람 뒤 충만해지기 좋을 범주에 충실하려 한다.

이런 영화에서 핵심은 살인범을 잡을 수 있을까다. 잡는다면 어떻게 잡을까다. 누가 잡는가 어떻게? 영화는 일찍 범인을 알려준다. 궁금증의 연속은 추격 대상자-범인이 누군가인가가 아니라 추격자의 상황이다. 인물과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는가가 관건이다. 즉 상황은 범인이 누구인지 다 아는데 도대체 잡을 수가 없다. 범죄증거 아니 범죄의 공간을 발견해야 하는 절체의 상황이다. 그러나 공간이 어디인지 알아낼 수가 없다. 모두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극 중 인물만이 아니라 보는 관객도 안타깝게 만든다. 하지만 절대악인 살인범을 향한 주인공과 관객의 동일시는 그렇게 완전히 융합적이지도 않다. 주인공들은 절대선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적절한 거리의 유지는 빤한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도에서 관객을 자유롭게 만든다. 찐뜩하게 만들지 않으면서 몰입하고 열정적이게 만든다.

영화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살인범을 추적하는 사람은 없다. 정의를 위해 살인범을 쫓는 경찰도 없다. 그것이 관객을 쿨하게 만든다. 그들을 사랑할 수 없지만 외면할 수도 없다. 그들은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추격자의 중심인 보도방 운영업자 엄중호(김윤석)는 아가씨들에게 들어간 돈 때문에 그녀들-미진을 찾을 뿐이다. 예전에 그와 같이 근무했던 동료 경찰들은 시장 똥물 투척 사건의 파장을 막기 위해 연쇄 살인범 검거에 몰입한다.

추격당하는 자, 살인범 지영민(하정우)은 일찍 자신을 드러내면서 엄중호에게 일방적으로 터지고 수사팀에 얼뜨기로 취급당하는 유약한 존재로 보이지만, 어느새 수사팀과 엄중호를 놀이갯감으로 삼는다.

그들이 놀이갯감이 되는 이유는 그들이 가진 한계 내지 결핍 때문이다. 엄중호는 수사팀과 같이 범인을 추적할 수 있지만, 전직경찰이다. 그것도 비리에 연루되어 파면되었다. 여기에 불법인 보도방 운영업자다. 이 때문에 초기 파출소 경찰은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용의자인 지영민보다 더 의심한다. 엄중호는 수사에 이용되기도 하면서 경찰에 쏟아질 비난을 위해 희생양이 되기도 한다.

경찰은 순순히 자백하는 지영민을 보고 쾌재를 부르지만, 실제로 더욱 쾌재를 부르는 것은 지영민이다. 경찰수사팀은 증거불충분이라는 결핍을 지닌다. 심증이 아니라 물증으로 증명되는 존재들이다.

쾌재를 부른 경찰은 곧 경악을 금치 못한다. 지영민은 이미 다른 경찰서에서 수사팀을 여러 번 농락했다. 곧 자백도 번복한다. 용의자의 말만 믿었다가 지영민의 조롱감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살해당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목표달성을 위해 살인범 잡기에 혈안이 된 경찰을 비웃는다. 그것도 유약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는 지영민이 거대한 공권력과 수많은 사람들을 좌지우지 하고 만다.

환락의 공간은 남성의 공간이다. 여성에게는 불안과 공포의 공간이다. 남성에게 공간을 둘러싼 살인범의 행각은 흥미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영화는 살인범을 살인범으로 규정할 뿐이다. 살인범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은 없다. 사회적 환경이 범죄를 만든다는 얼개는 관습적이 되었다. 성적 불능을 여성 살해로 전환시킨 살인범. 범행 동기도 통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사이코패스는 본래 유전적으로 위험한 이들이라는 인식과 궤를 같이한다.

그런 연쇄살인범은 근본부터 다른 이들일 뿐이다. 그런 범죄자가 기생하는 공간에 여성들-우리는 살고 있다. 그것에 대응하는 공권력은 제도적 결합으로 무능하다. 자기를 지키는 것은 자신들이다. 오히려 공권력은 진범을 오히려 거대한 범죄자로 키워내며 개인의 희생을 방기한다.

그러나 개인은 여전히 무력하며, 최종 종결자는 공권력이다. 하지만 그 공권력은 허점투성이다. 공권력을 이루는 이들은 다른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임중호와 같은 결핍 많은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운명을 관장하는 신의 대리공간인 복음의 교회와 목회자는 무력하다. 그들은 살인범이 만든 예수 석조상을 교회에서는 설치하고 그 솜씨를 칭찬한다. 형제들이 죽어나가는데도 모른다. 그들도 여전히 결핍의 존재들이다. 신은 결핍되었다. 정작 살인범은 착실한 신자다. 죽음과 삶을 좌우하니 사람의 운명을 관장하는 신이다. 더구나 가난하고 오갈 데 없는 약자들만을 앗아간다. 살인범이 운명의 관장자일 수 없다.

결핍된 개인은 운명적 삶이 아닌 우연적 삶을 살아간다. 엄중호가 소중하게 지켜야 할,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미진(서영희)의 딸 은지(김유정)이 이를 단적으로 상징한다. 삶의 목적과 당위가 없다면, 살아있을 이유가 없는 것 아닌가. 이런 지식인적인 회의와 냉소에 따른 삶에 대한 허무, 그것은 지영민이 살아있을 이유를 말하라 지껄이는 것은 작자와 일치하는 것이다. 결국 지영민은 어느새 지식인이고, 작가의 의식을 관통해 도사리고 있었다. 그렇게 살리고자 했던 그녀는 허무하게 죽고 만다.

하지만 결국 사건을 해결한 것, 믿을 것은 제도나 기계도 아닌 결핍된 인간이었다. 과학적 수사는 애초에 믿을 것이 못된다. 최종 범인 검거의 추격자는 엄중호, 가장 결핍된 인물이었다. 개별적인 그들은 결핍되어 있지만, 사람 하나 하나의 기억과 손길과, 육성, 그리고 필적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의도하지 않았어도 생명을 파괴하는 범죄자를 잡아내는데 기여를 한다.

하지만 연쇄살인범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살아 있다는 것 자체를 다시금 소중하게 여기게 만드는 심리 효과다. 삶의 목적은 살아있다는 것 자체다. 지식인의 관념적인 삶의 목적 탐구가 아니라 살고 싶다는 그 자체에 의미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것을 파괴하는 살인범은 결국 잡아 격리해야 할 추격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결과에 아쉬움을 내비치기도 한다. 하지만 평범함과 식상함은 삶의 대부분이고, 그 속에 새삼 재발견이 삶을 밀고 간다.


<추격자>는 왜 충무로 감독을 떨게 하나 

나는 얼마 전 어느 방송 토론 프로에 한국영화 관련 토론 패널로 참여한 적이 있다. '한국영화 위기인가 부활인가' 정도 되는 제목을 내세운 상태였다. 왜 이 시점에서 이런 주제인가. 설을 앞두고 극장 예매에서 한국영화가 1위를 차지했기 때문에 이런 컨셉트를 잡은 듯싶었다.

그런데 당시 많은 매체들도 그랬거니와 같이 참여했던 패널들도 이제 한국 영화가 다양한 장르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에 이전 영화와 다르다고 말했다. 부활의 신호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견해에 반대했다. 겉으로는 다양한 영화가 만들어진 듯 보이지만 여전히 그 내용은 말할 계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최근 영화 <추격자>가 호평 속에 연일 승승장구하고 있다. 이 때문에 충무로의 감독이 떨고 있다고 한다. 감독들이 떠는 이유는 한국영화의 고질병과 연결된다. 한국의 감독 지망생들은 '입봉'하는데 우선 기를 쓴다. 어떻게든 데뷔는 하고 그다음에 작품 경력을 내세워 좋은 작품을 만들려 한다.

속되게 말하면, 첫 영화는 아무 영화나 대략 만들고, 그다음 영화에 신경을 쓰는 행태가 있다. 그러나 첫 영화를 벗어나기는 힘들다. 이러한 가운데 다양한 영화들이 제작되는 모양새를 보이지만 실속은 없다. 특히 지식인 먹물이 들어간 감독들은 예술영화에서 대중영화로 완전히 넘어가지 못하고 방황을 하다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영화를 만들어내기 일쑤다. 이리저리 평가에서 눈치를 본다.

영화 <추격자>는 빤한 스릴러를 표방한 대중 상업영화다. 그래서 기대감을 갖지 않게 만든다. 유영철이라는 이름을 넣으며 연쇄살인 실화를 바탕에 둔 어설픈 팩션을 흉내 낸 그저 그런 영화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예술영화에서 줄 수 없는 색다른 메시지와 영화의 맛을 제공한다.

단번에 만든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스릴러 영화에 충실하며, 밀도 있는 고민을 한 흔적이 보인다. 이러한 면은 배우들 외에 감독과 시나리오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일게 한다. 감독은 신인 감독 같지 않으며 시나리오 작가도 그렇다. 물론 감독도 나홍진이고, 시나리오도 그가 썼다. 그는 이 첫 작품을 3년 동안 썼으며, 기획을 6년 동안 했다. 그리고 스릴러에 맞게 잘 만들었다.

처음에 투자를 받지 못해 어려움에 처했다. <추격자>와 같이 투자를 신청했다가 일찍 투자를 받았던 다른 투자 경쟁 작품은 망했다. 그 투자회사는 후회했다. 투자 때문에 고생한 영화 <식객>의 사례와 비슷하다.

신인감독이 이 정도 영화를 만드니 영화감독으로 데뷔하려 하거나 이미 데뷔한 감독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대충주의에 대한 일갈이다. 더구나 누구는 별 내용 없이 투자자를 잘 만나거나 집안에 돈이 많아 쉽게 입봉하는 데 말이다. 또한 이미 중견 감독들도 이 무서운 신인 감독의 등장에 떨고 있다. 스타 개런티 상승 등 여러 상황과 조건의 핑계를 댈 수 없게 만든다.

올해는 투기자본이 많이 정리되고, 영화 투자환경에서 안정기를 구가할 것이라는 분석이 많았다. 이는 필요한 과정이다. 하지만 여전히 될만한 작품을 중심으로 흥행코드만을 염두에 두는 작품 제작 행태는 여전하다. 이렇게 될 때 창작자의 정신은 보장을 받지 못하며, 새로운 시도와 여기에 맞는 충실도는 보장받기 힘들다. <우생순>과 <추격자>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대충 우선 부랴부랴 데뷔하는 데만 신경 쓰는 행태도 바뀌어야 한다. 너무나 많은 감독들이 한 작품을 끝으로 사라지고 만다. 영화는 많지만 실속은 없다. 장르는 다양해지지만 그것을 채우지 못하고 마는 행태는 결국 치열한 고민과 웰 메이드 정신의 결핍에서 비롯된다. 그것이 기존의 시각으로 폄하되는 싸구려 오락 영화라도 말이다. 개인에게만 모두 전가할 수는 없다. 이를 방조하는 영화 자본의 탓도 크니 이 점도 무시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도 투기 자본은 2008년에 정리되어야 할 대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