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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부당거래´의 부당한 감정유발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1. 2. 9. 19:38

<김헌식 칼럼>영화 ´부당거래´의 부당한 감정유발

2010.11.22 08:33

 




[김헌식 문화평론가]검사는 결국 부당한 거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는다. 하지만 경찰은 부당한 거래를 한 결과 자신의 부하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살인자로 만들었으며, 자신도 죽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결론은 고시를 합격해서 검사가 되어야 살아남는다. 그러면 힘 있는 장인도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남자가 그럴수도 있는거지 하며 정치적 권력을 동원할줄 아는 장인 말이다. 

또한 경찰대를 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줄과 빽이 없어서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을 불행하게 만드니 말이다. 현실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분노를 자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우울하다. 영화 < 부당거래 > 의 대충의 얼개는 이러한 점에 맞추어져 있다. 검찰과 경찰이 얼마나 정의롭지 않은 거래를 하는 지 여실히 보여주면서 대중적 공분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의 상태는 희망을 바라는 마음을 담지는 못한다. 

대중문화 콘텐츠 흥행 성공 법칙 가운데 하나는 '감정의 자극'이다. 감정은 대개 이성적 합리적인 추측이나 판단과는 관계가 멀게 보인다. 감정은 과학적인 자극과 반응의 법칙만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아무리 뇌 과학이 감정을 관장하는 영역을 연구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화를 내게 되는 구체적인 상황이나 말, 행동들을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많다. 

넓게는 문화권이나 민족, 국가, 좁게는 지역과 사회, 공동체에서 각각 분노를 자극하는 말이나 행동들은 약간씩 다를 수가 있다. 대개 분노와 같은 감정은 좋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때로는 분노는 그것을 일으켜내어 일종의 감정적 정화를 일으키는 기제가 되기도 한다. 

적대적인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서 분노가 일어나면 그것은 거꾸로 분노를 느끼는 사람들이 도덕적 윤리적인 우월성을 갖게 한다. 도덕적 윤리적인 우월성은 존재적 의미를 더욱 가치 있게 만든다. 즉 적대적인 대상은 의미가 없는 존재이고, 그 적대적인 존재에 분노를 느끼는 이들은 존재적 가치가 있게 된다. 

계층적, 권력적 관계를 비판하는 영화와 드라마들은 대개 좋은 평가를 받는다. 그러한 작품을 만든다는 것도 쉽지 않기도 하다. 그 자체는 즐거운 것은 아니어서 반응이 썩 낫지 않다. 대중의 분노를 일으키는 것은 다를 수 있다. 사실 예술은 강렬한 감수성의 극대화이다. 따라서 현실에서 존재하기 힘든 설정을 극대화하는 경우도 많다. 

상류층에 대한 극단적인 감정과 편견을 극대화시키는 콘텐츠가 끊임없는 이유는 사회적인 모순도 있지만, 시장성 때문이다. 대중적 흥행은 그 감수성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가이다. 가진 자, 상류층, 권력자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은 불붙이면 터지는 뇌관과도 같이 존재한다. 이러한 점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재벌가의 사람들은 매우 부정적으로 그리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자신은 그러한 부도덕한 존재가 아니라는 안위를 받는 콘텐츠야말로 대중적 소비의 대상이 된다. 참여정부 말기 부동산 정책에 많은 사람들이 공분하였던 것은 착실히 재테크를 했다고 생각하는 많은 이들에게 부정당한 방법으로 부동산을 소유한 것처럼 만든 '정책 프레임' 때문이었다. 사람은 자신이 못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으려 하며 상대방을 낮추어 자신의 존재가치를 높이려는 경향이 있다. 책임전가의 원리가 사회심리학의 주요 개념으로 자리잡은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권력의 정점에 있거나 경제적 관계의 중심에 존재하는 것은 부정적인 행동의 결과만은 아니다. 그들은 별나라 존재들이 아니라 우리의 이면의 얼굴들이다. 이는 영화 < 아바타 > 의 오류와 같다. 영화 < 아바타 > 에서는 지구인과 그 기업들은 모두 자연을 파괴하는 존재로 그려, 관람객들을 우울증에 빠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지구인의 모습은 우리의 다른 얼굴이다. 그런데 영화 < 부당거래 > 는 관념적인 캐릭터들의 화려한 감정적 거래이다. 현실권력들의 부정적인 구조를 건드리지만, 그것은 현실적 대안을 모색하는데 추동력을 상실하게 만든다. 모든 것이 결정론적이고 현실의 모순을 해결할 실마리는 없다. 그것을 모르는 관객들이 있을까. 차라리 드라마 < 시티홀 > 이나 < 대물 > 처럼 작은 소신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겠다는 작은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 더 낫겠다. 

하지만 정작 이들 드라마도 자기 반성적 정치가 아니라 이분법적 분노와 격정의 오류안에서 맴돌았다. 영화 < 부당거래 > 의 주인공들이 지나치게 복잡하게 생각하게 생각하다가 결국 치명타를 입었듯이 우리는 대안 모색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대한민국의 모토가 힘을 잃어 각박해질수록 우리는 희망이 더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