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신모계 사회 법칙-영화 차이나타운 등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5. 5. 11. 23:54



쉽게 연상할 수 있듯, 영화 '차이나타운'에는 말그대로 차이나타운이라는 공간이 등장한다. 은둔의 삶을 선택한 차태식(원빈)이 차이나타운에서 꼬인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영화 '아저씨'에 등장했던 그 공간이다. 통나무 장사라 칭해졌던 신체장기밀매와 채무고리대금업이 난무하는 공간이다. 한국에서는 차이나타운이 다른 국가보다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지만, 이런 영화들을 보면 한국의 차이나타운이 그래도 제법 뿌리는 내리고 있는 듯 싶다. 그것도 범죄온상으로 말이다. 범죄온상인데도 버티는 것은 거래관계의 설정이다. 

이를 위해 영화에서는 부패공무원들과 맺은 카르텔이 그들을 보호하는 유일하면서도 효과적인 방어막으로 노출된다. 그들의 존재적 모호함은 그들의 주식같이 등장하는 짜장면에 담겨있다. 만약 그들이 진정 차이나 출신이라면, 짜장면 같은 것은 별로 먹지 않을 것이다. 짜장면은 한국화 된 음식에 불과한 것이니 말이다. 짜장면은 중국에 없는 음식이기 때문에 차이나타운에 있는 이들이 과연 대륙의 음식을 먹는가는 그 구성원이 새롭게 교체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들인지, 그들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지가 아닐 것이다. 주목할 부분은 차이나 타운이라는 공간을 설정한 이유다. 생존의 본질을 드러내기 위해 디아스포라의 상황을 가정했기 때문에 차이나타운을 주목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일영(김고은)은 항상 배고프다고 말한다. 절박한 생존을 암시한다. 일영은 스스로 밥을 만들어 먹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존한다. 그 밥을 주는 엄마(김혜수)는 무슨 일을 할 때면, 밥을 먹고 시작하자고 한다. 하지만 그 밥은 본인이 만든 것이 아니다. 

그들의 주거 공간은 중국집 간판을 달고 있음에도 다른 중국집에서 항상 배달을 시켜먹는다. 그것은 음식조리에서 해방된 여성을 상징한다. 그런데 음식에서 해방된 엄마는 식구라는 말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혈연을 나누지 않은 사이라도 같이 밥을 먹는 사이라면 가족일 수 있다는 생각을 배제한다. 사먹는 밥을 먹는 사이는 가족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들이 먹는 밥은 집밥이나 웰빙 밥상이라기보다는 기름기 많은 비만에 제대로 기여하는 느끼한 음식들일 뿐이다. 이로써 음식은 진정한 가족과 그렇지 않은 가족을 좌우하는 기준이 되는 듯 싶다.

하지만 엄마는 자신의 후계자로 일영을 지목한다. 자신이 그녀의 엄마를 죽였듯이 일영도 엄마(김혜수)를 죽이도록 놔둔다. 오로지 죽을 때까지 자신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라는 말만 남기고 말이다. 이를 통해 이뤄진 것은 모계의 상속이다. 남성을 사랑한 일영은 죽음의 위협에 처했고, 엄마의 시스템은 여기에서 붕괴되기 시작했다. 엄마에게 남성은 없었고, 사랑 따윈 필요 없었다. 그것이 엄마가 입양시킨 딸에게 남긴 교훈이었을 지 모른다. 사랑에 울지 말고 치열한 생존의 현실을 보라는 것이겠다. 가난한 남성, 집에 쪼들리는 착한 남성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하지만 결국 일영도 그 시스템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그것은 처음 부터 자신의 밥을 스스로 생산하거나 벌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의 신체장기를 팔아 먹고 살아야 한다. 그런 시스템에 발을 들여놓은 엄마의 운명도 그러했듯이 일영의 운명도 같이 따라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시스템 안에서 판단이라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판단은 곧 수명을 다하기 쉽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선택과 판단은 이들과 그렇게 많이 다르지 않아보인다. 

이미 시스템은 고정되어 있고 자율의지가 얼마나 있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생존과 밥을 다른 이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신모계 사회의 특징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범죄 집단이나 공권력을 움직이는 핵심축은 엄마였다. 그 엄마에게 남성들은 주변인이나 엑스트라에 불과했다. 이런 점은 드라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드라마 '착하지 않은 여자들'에서는 3대에 걸친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남녀의 로맨스 이야기가 중심이 아니기 때문에 상당히 이채롭게 받아들여졌다. 강순옥(김혜자)는 유명 요리사이며 두 딸을 잘 키워낸다. 첫째는 앵커, 둘째는 최연소 박사 딸을 둔 엄마로 키운다. 물론 세상은 호락하지 않다. 본인은 남편의 외도로 평생 고통을 받아야 했다. 사랑과 전쟁 같은 그악스러운 극단적인 서사의 전개는 배제한다. 남성에게 의존하는 삶도 찾아볼수 없다. 

남편의 외도 대상이었던 장모란(장미희)은 강순옥의 일상으로 깊숙하게 들어와 있다. 또한 둘째 딸 현숙(채시라)의 삶이 그렇다. 교사 나현숙(서이숙)과 사이가 좋지 않은 현숙은 고등학교에서 쫓겨날 뿐만 아니라 그 뒤에도 악연이 이어지고 이 때문에 고통을 받기도 한다. 현숙의 딸 정마리(이하나)는 최연소 대학교수의 꿈을 키워 가지만 우연치 않은 일로 바닥으로 처박히는 난감한 상황에 이른다. 이 가운데 어머니와의 갈등관계가 깊어지기도 한다. 

이 드라마에서는 주로 딸을 통해서 자신의 꿈과 욕망을 투영하는 여성의 모습들이 적극적으로 보여진다. 무엇보다 여성들의 삶과 대물림에 대해서 세밀하게 그려내어 공감을 얻어냈다. 물론 배우들의 연기력이 극중 캐릭터를 잘 소화해냈기 때문에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대를 이어가면서 여성들이 자신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승계하고 적응 혹은 변화 시키는 과정이 잘 담겨 있기 때문에 주목을 받았다. 

무엇보다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신모계 사회의 양상이 드라마에 반영되고 있는 점이다. 남편을 통해서 아니 아버지를 통해서 성공을 이끌어내거나 가부장적인 전통이나 재산 상속의 문제를 다뤄내지 않는 것이 신모계적인 특징이 된다. 여성들이 우선이며, 그들이 대물림하는 무엇인가를 담아낸다. 그것은 재산일 수도 있지만 일정한 입지일 수 있다. 여기에서 남자들은 부차적이다. 그들의 운명을 반드시 좌지우지 하는 인물들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남성들이 여성들의 승계에 의존하는 삶의 양태를 보여준다. 이는 사회적인 흐름을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더 이상 남성을 중심으로한 승계는 절대적일 수 없다. 남아선호사상은 허물어져 버렸고, 사회의 중심축은 여성에게로 이동했다. 처가살이하는 남편도 급증하고 있다. 곧 남성중심의 가부장제의 중심축은 모계적인 차원에 밀리고 말 것이다. 그에 따른 장단점을 잘 살펴야할 시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