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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는 ‘아이’ 코드, 정치는 ‘원로’ 코드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4. 1. 19. 14:02
대중문화는 ‘아이’ 코드, 정치는 ‘원로’ 코드
[김헌식의 문화비빔밥] ‘올드보이’ 정치는 미래가 없는 정치다
[0호] 2013년 10월 26일 (토)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  media@mediatoday.co.kr
영화 <도가니>보다는 영화 <소원>이 어린이 중심이다. 영화 <소원>은 성폭행을 당한 어린 소원이(이레)가 어떤 생각과 느낌을 갖고 있는지 최대한 드러내어 준다. 영화 <도가니>가 아동 성폭행 범인을 둘러싼 재판과정을 주로 담아낸다면, 영화 <소원>은 재판의 불합리와 별도로 통한 소원이가 일상으로 다시 돌아와 학교생활을 해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보수적인 관점에서는 아이는 항상 문제가 일으키는 비자아의 존재로 대하는 것과는 다른 시선들이 반영된다.
 
영화와 드라마 속 아이들의 맹활약
 
대체적으로 TV 드라마에서는 이제 아역 배우들의 역할이 커졌다. 어린이의 사고와 생각이 많이 반영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의학 드라마에는 아예 어린이 병동이 등장한다. 드라마 <굿닥터>는 성원대학교의 소아외과 병동을 배경으로 한다. 많은 어린들이 등장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처지와 입장을 잘 반영하는 의료 행위와 서비스가 자주 묘사 된다. 드라마 <여왕의 교실>에서는 마 교사(고현정)와 아이들의 대결을 통해 어린 학생들의 생각과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준다. 어른의 생각과 지시를 그대로 수용하는 피동적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이런 유형의 드라마는 예전 같으면 청소년 드라마로 배치되어야 하지만 수목 드라마로 편성되었다. 
 
드라마 <수상한 가정부>에서는 엄마가 없는 네 명의 아이가 있는 집에 미스터리한 가정부(최지우)가 오면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들을 담고 있다. 엄마가 부재한 집에서 가족 사인과 아버지에 대한 적극적인 의견 개진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과거 '전파견문록'의 캠핑 판인 '아빠 어디가'가 어린이를 오락상품으로 만든 측면이 있지만, 어린이의 세계관과 자아 정체성들을 담아내고 있다. 
 
영화 <화이ㅡ괴물을 삼킨 아이>도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아이가 주인공이다. 내용은 바로 영화 <그놈 목소리>나 <세븐 데이즈>와 같은 유아 납치다. 영화 <몽타주>에서는 아이 납치범에게 사적 복수를 가하는 내용이 중심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납치된 아이를 길러준 범죄자들과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주인공 화이의 고군분투가 핵심이다. 화이를 기른 범죄자 아빠들은 보육원에 버려진 고아들이었고, 차별 때문에 스스로 가족을 이루지 못하여 납치한 아이를 길러야 했다. 그들은 이른바 공동육아와 공동 아빠로 역할을 수행한다. 
 
대학생도 너무 큰 것일까. 대학생들의 값이 고교생만 못하다. 최근 대중문화, 특히 드라마에는 고교생 천국이다. 드라마 <학교 2013>이나 <드림하이1,2>, <상속자들>의 주인공은 고교생들이 주인공이다. 과거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내일은 사랑>이나 <우리들의 천국>같은 대학생 주인공의 작품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드라마들은 <반올림>과 같은 청소년 드라마가 아니라 일반 트렌디 드라마지만, 주인공이 고교생들인 것이다. 또한 청소년 교육 문제에만 해당하는 내용도 아니다. 그들의 꿈과 희망을 집단 속에서 겪는 현대인들의 고민과 연결시킨다. 많은 드라마에서 대학생 시절은 순간적으로 스쳐갈 뿐이다. 시트콤의 경우에도 <남자 셋 여자 셋>과 같은 시트콤도 없다. 개그프로에서는 <개그콘서트>의 ‘전설의 레전드’라는 코너와 같이 고교생들의 교실이 개그의 중심을 이룬다. 
 
MBC <대학가요제>도 없어져 버렸다. 대학 조직은 경제적 논리에 깨어져 나가고, 오로지 집단적 행위가 가능한 공간은 고교만이 남아 있는 듯하다. 그렇지만 고교생이 주인공인 드라마 <꽃보다 남자>나 <상속자>와 같이 신분 상승과 신데렐라 로맨스를 자극하는 데 더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유형의 파생 드라마들만이 로맨스 물의 영상화로 각광받는다. 시청률이 나오기 때문이란다. 
 
여러 논란과 이견이 있지만, 전반적이 사회문화적 트렌드가 아이를 중심으로 가족과 사회, 경제가 이동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노령화가 심해지는 것은 바로 아이가 줄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노령화가 심화될수록 역설적이게도 사회 문화, 경제는 아이 중심으로 간다. 출산율 저하와 싱글 인구의 증가도 마찬가지로 아이 중심성과 비례한다. 미래는 더욱 아이에 초점을 맞추는 정책이 맞아 질 수 밖에 없다. 아이의 부각은 젊은 세대 그리고 미래를 근원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점을 상징하고 있다. 즉, 젊은 세대와 미래에 대한 담론이 많아질 수밖에 없음을 말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의 상황은 단기적인 노령 중심의 정책과 퇴행적 과거인사에 경도되는 정책적 오류를 낳을 수 있다. 제도와 정책의 조율타인 정책 담당자들의 구성과 배치가 오류를 일으킨다.
 
세대 갈등과 불안한 미래
 
근래 세대 갈등론이 부각되었다. 주로 경제적인 측면이 부각되고 있는데, 이 경제적인 측면은 정치적 과정과 분리될 수 없다. 그 상징적이면서 실질적인 사례가 대선이었다. 대선을 기점으로 세대 갈등이 일어난 것으로 여겨졌다. 대체적으로 대선 결과이후 국민/기초연금, 정년제 등 몇몇 제도적인 결함에 대한 갈등이 세대 간의 정치적 대결로 집중되었다.
 
현상은 이렇다. 젊은 세대는 투표율이 높으면(70%) 자신들의 지지 후보가 이긴다고 생각했지만 50대의 압도적인 투표로 그렇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이 때문에 무력감과 함께 분노가 갈등 상황으로 치달았다. 50-60대가 똘똘 뭉쳐 정치 사회적 변화가 좌절되었다고 여겨 노인 지하철 무임승차 폐지 이야기가 나왔다. 젊은 세대에게는 박근혜 당선자가 젊은 세대의 미래를 빼앗는다고 간주되었다. 거꾸로 기성세대에게 젊은 세대의 문재인 후보는 불안한 미래를 담보해주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실제적 진실이라 아니라 그런 신념이 초점이다.
 
기득권과 지위를 갖지 못한 이들일수록 더욱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느낀다. 기성세대가 가지는 미래에 대한 불안은 삼포 세대라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미 기성세대가 누린 것들조차 젊은 세대들은 누리지 못한다는 미래 불안이 잠재하고 있다. 
 
미래의 불안을 줄일 수 있는 사회 안전망과 공동체적인 부조를 강화해야 한다. 일자리와 복지 등의 문제는 모두 미래에 관한 것이다. 일자리는 많지만, 그것은 안정된 미래를 담보하지 않는다. 복지도 현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것이다. 사실상 세대 갈등은 미래 갈등이다. 따라서 사회 전체적으로 ‘미래에 대한 준비’가 바로 세대갈등 해법에 연관된다. 사회적으로 개인 등이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는 단지 연금과 같은 금전적인 측면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사회적 네트워크의 구축일 수도 있다.
 
‘올드보이’ 정치? 미래가 없는 정치!
 
정치적으로는 젊은 세대들이 자신을 대표할 만한 정치인이 없다고 여기는 점이 언제나 갈등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제19대 국회의원 비율을 보면 20대 1.2%, 30대 2.27% 50대 47.9%, 60대 19.95%, 그리고 40대는 26.1%이다. 지난 대선에서도 젊은 세대들은 자신이 선택한 후보가 무력하게 좌절되는 것을 보고 허탈해했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좌절로 받아들여졌다. 왜냐하면 정치 대표(국회의원, 대통령)를 통해 미래를 위한 입법과 정책 행위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미래를 대변하는 이들이 없다는 것이다. 노령 정치 지향적 정책의 경우에는 미래보다는 현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측면이 있기에 미래에 대한 정치적 대표자의 상대적 부재로 인한 미래 불확실성이 주는 불안감은 젊은 세대일수록 클 수밖에 없다. 국회에 미래 세대를 위한 국회의원을 할당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형성된 것이다.
 
박근혜식 정치는 올드보이의 귀환이라는 코드로 분석되고 있다. 하지만 영화 <올드보이>를 연상한다면, 올드보이라고 하기에는 과분하다. 최근 청와대가 기용한 주요 인사들은 70대이기 때문이다. 대통령 비서실장 김기춘(73), 화성 갑(甲) 보궐선거 공천 후보 서청원(70),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홍사덕(70), 방송통신위원장 이경재(72), 한국교직원공제회 이사장 이규택(71), 국민대통합위원장 한광옥(71), 문화융성위원장 김동호(76), 지역발전위원장 이원종(72) 등이 박근혜 정부의 원로정치의 편대를 이루고 있다. 고연령대가 문제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역할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과거의 부정부패에 연관이 되어 있거나 최측근 인사를 보은 차원에서 임명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비판받고 있다. 그러한 인사 정책적 인식이야 말로 미래적이 아니라 과거 퇴행적이기 때문이다. 미래세대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현재의 사람만 고려한다면, 원로들은 퇴행적인 권력욕구자들에 더 가깝다. ‘꽃보다 할배’가 예쁘다는 말은 거짓이 된다. 오래된 미래는 좋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매개로 미래를 열기위해 과거를 잊거나 묻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 오래됨이 미래를 담보하지 못하면 그냥 잊어야 할 과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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