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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식 칼럼>우리의 미래, 비극인가 희극인가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1. 2. 9. 17:51

<김헌식 칼럼>우리의 미래, 비극인가 희극인가

2010.04.18 07:26

 




[김헌식 문화평론가]입소문이 영화 흥행에 중요하다고 할 때, 관객의 기대감을 높이는 것은 자칫 부메랑이 될 수 있다. 초기에 관객들을 끌어도 그들이 입소문을 내지 않을 만큼이라면 더욱 심각하다. 특히 대중상업영화에서는 관객들이 원하는 결말로 일관되는 것이 중요하다. < 반가운 살인자 > 와 < 육혈포 강도단 > 은 해피엔딩과 새드엔딩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나기도 하지만, 관객의 기대감이라는 점에서도 희비가 엇갈린다. 

영화 < 반가운 살인자 > 는 애써 영화의 코믹한 내용을 애써 부각시키지 않았다. < 육혈포 강도단 > 은 영화의 희극적인 내용을 강조했다. 유쾌하게 웃기 위해 영화를 선택했다면, 어떤 영화가 재미 있었을까? 기대불일치 관점에 따라 기대감을 높일수록 그 기대감을 채워주기는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 기대감을 충족시킬 수 있는 내용이라면, 문제는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 

< 육혈포 강도단 > 의 내용 가운데 대부분이 희극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졌지만, 관객의 기대감에 미흡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물론 미흡함을 낳은 이유에는 다른 중요한 원인도 있다. 영화 < 하모니 > 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어느 정도 비극적 결과를 예상하게 했다. 새드 엔딩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다. 

< 육혈포 강도단 > 은 마케팅에서 영화적 성격을 코미디물임을 강조했다. 관객들에게 < 육혈포강도단 > 은 희극적 결말을 예상하게 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희극이 아니었다. 이는 한국영화의 고질적인 성격을 드러내주는 것이기도 하다. 즉 여러 장르와 다양한 영화적 포지셔닝을 함께 고려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이는 대박 영화, 천만관객 동원 영화에 대한 집착이 낳는 현상이기도 하다. 

< 육혈포 강도단 > 이 즐거운 결말이 되어야 그 장르적 특성만이 아니라 애초의 마케팅 측면에서 맞는다. 이는 관객들이 원하는 수용자의 욕구와 맞아 떨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 < 반가운 살인자 > 는 희극인지 비극인지 잘 가늠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관객에게 다가간다. 희극적인 내용이라고 해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웃음이 터진다. 

< 육혈포 강도단 > 의 스토리 컨셉은 간단하다. 하지만, 초기에 금방 알려진다. 영화는 외롭고 곤궁한 할머니들이 하와이 여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강도가 되는 과정을 그린다. 할머니 캐릭터를 생각했을 때, 충분히 예상되는 상황과 희극적 요소들이 전개되어 무리 없이 웃음을 준다. 다만 그 웃음의 코드들은 전형성을 이루게 된다. 웃고 나면 수용자의 반응을 기계적으로 이끌어내는 웃음코드들이 배치된 결과임을 알 수 있다. 

< 반가운 살인자 > 는 그렇지 않다.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영화의 중반까지 영화의 제목이 왜 반가운 살인자인지 알 수 없게 만든다. 왜냐하면 주인공이 왜 살인자를 쫓는지도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간단한 희극적 장치들이 힘을 발휘한다. 물론 두 영화의 공통점은 모두 가족에 그 근간을 두고 있다. 자신으로 깨어진 가족을 복원하려는 가장과 가족에서 소외된 노년의 어머니들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가족 속에서 잃은 자신의 마지막 꿈을 찾는 노년 어머니와 가장의 역할을 뒤늦게 하려는 주인공은 분명 다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한국인들의 욕망이 드러나 있다. 할머니들이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훔치고, 결국 강도단이 되어 돈을 마련해야 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생계의 곤란은 아니었다. < 반가운 살인자 > 에서도 극도의 가난 때문에 가족이 붕괴되거나 가장이 현상금을 노리고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은 것은 아니었다. 

딸의 음악교육은 결국 자신들의 자아실현이기도 하다. 살인자의 연쇄 살인 동기도 생계와 같은 사회 경제적 요인과는 관계없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다. 이 영화들을 통해 반추해보면, 대한민국에서는 내적 행복과 만족 그리고 자아실현을 둘러싸고 강도와 살인 등 복마전과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