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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은 왜 천진난만하게 진격했나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4. 1. 19. 14:04


‘거인’은 왜 천진난만한가
[김헌식의 문화비빔밥] ‘진격의 거인’과 자본주의의 위기
[0호] 2013년 06월 23일 (일)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  media@mediatoday.co.kr
한동안 악당은 대중문화 속에서 상대적인 캐릭터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즉, 절대적인 악인이 아니라 나름 사연과 고뇌가 있는 악당이었다. 하지만 만화와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進撃の巨人, しんげきのきょじん)에 등장하는 거인은 이러한 상대적인 캐릭터와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절대적으로 악하다. 왜냐하면 인간을 잡아먹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설정은 인간을 잡아먹는 거인의 행위를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인간을 살상하는 괴물이 아니라 그대로 찢거나 잘라 삼키는 행위들은 수용자를 전율하게 만든다. 노자가 도덕경(道德經)에서 말하는 ‘자연은 인하지 않다’(天地不仁)는 말을 떠올릴 수도 있다. 그것도 동물이 아니라 같은 종족 유형의 큰 인간에게 사람이 잡혀 먹히는 상황은 더욱 충격적이어서 눈을 뗄 수 없다. 더구나 원인이나 이유에 관계없이 말이다. 
 
다큐 <한반도의 공룡>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은 바로 약육강식의 세계를 점박이의 일대기를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월트 디즈니가 애니메이션 밤비(Bambi, 1942)를 통해 현실 세계의 냉혹함을 강하게 드러냈던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그는 애니메이션을 통해서 무엇보다 드러내려 한 것은 생의 어두운 면이었다. 대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들은 인생의 밝은 면만을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권정생의 작품은 그렇지 않아도 많은 동화 속 세상은 아름답다. 하지만 잔혹동화는 어둡지만 불편한 진실을 담고 있다. 
 
최근 방영된 드라마 <여왕의 교실>에서 마여진 교사(고현정)도 현실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데 집중한다. 그래서 현실을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찌질대지마. 현실을 똑바로 봐. 이제 초딩같은 어리광 그만 부려. 너희들이 사는 대한민국은 1퍼센트에게는 아주 살기 좋은, 행복한 나라야. 그들이 바라는 게 뭔지 아니? 세상이 지금처럼, 이 모습 그대로 있어주기 바래” 
 
  
MBC 드라마 <여왕의 교실>
 
또한 마여진 교사는 차별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차별? 그게 어때서? 경쟁에서 이긴 사람들이 특별한 혜택을 누리고, 낙오된 사람들에겐 불공평한 차별대우를 하는 것. 이건, 너무 당연한 이 사회의 규칙이야. 학교라고 예외는 아니잖아?” 그렇기 때문에 차별당하지 않으려면 1등이 되라고 말한다. 현실은 잘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마교사는 이렇게 말한다. “‘차별이야’, ‘부당해’, ‘사회가 잘못된 거야’ 술 마시며 이런 불만이나 떠들어 대는 거지. 대부분의 너희 부모들처럼. 하지만, 쓸데없어. 경쟁이 나쁘다고 소리쳐봤자, 세상은 달라지지 않아.” 당혹스러울 정도로 너무 현실적인 말들은 반발을 불러일으키기 알맞다.
 
<직장의 신>에서 미스 김(김혜수)도 현실을 요약한 돌직구 발언으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회사에서 내쳐지는 공포, 계약직들은 3개월마다 겪는다. 엄살 피우지 마라”, “쓸데없는 책임감 같은 것으로 도를 넘었다간 자기 목만 날아갑니다”라고 했다. 미스 김은 나아가 “회사란 생계를 나누는 곳이지 우정을 나누는 곳이 아니고, 일하고 돈을 받는 곳이지 예의를 지키는 곳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직장의 신>이나 <여왕의 교실> 그리고 <진격의 거인>은 모두 일본 작품들이다. 자본주의가 고도화되고 어느 정도 한계를 보이고 있는 일본에서 쏟아지고 있는 작품들은 극단화된 현실을 부각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상징과 은유를 통한 현실 묘사를 전면에 내세운 <진격의 거인>은 매우 극단적이다. 저자가 보수 우익의 논리를 대변하고 있을 만하다. 현실은 마치 사람을 잡아먹는 거대한 존재들이 호시탐탐노리고 있기 때문에 이에 전쟁수행준비 같은 게 필요하다는 인식을 봐도 알 수 있다. 
 
  
KBS 드라마 <직장의 신>
 
그런 현실에서는 오로지 강한 존재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듯싶다. 더구나 개인들의 안일한 태도 때문에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여, 개인만이 아니라 결국 공동체-인간 전체가 멸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논리다. 과연 이런 방법이 옳은 것인가라는 의구심이 들 때, 중요한 것은 현실 자체인식 이후에 어떻게 대응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런데 <진격의 거인>에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는데 바로 거인들의 얼굴 표정이다. 그들의 얼굴은 으레 괴수들이나 악당이 갖고 있는 표정이 없다. 사악하거나 표독 혹은 우악스러운 점보다는 단지 천진난만해 보일 뿐이다. 그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는데 그들의 천진난만함을 보노라면 아이의 순수 악을 떠올리게 만든다. 더구나 그들은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몰고 다니거나 부부, 연인들끼리 몰려다니면서 사람을 잡아먹는다. 더구나 그들은 모두 옷을 입지 않고 벌거벗고 있다. 바로 이는 자기중심적 본능을 드러낸다. 그들은 사람을 잡아먹지만 행복한 표정을 짓고, 먹히는 사람의 지인들은 경악을 넘어 정신 분열한다.
 
자본주의는 이런 본능의 물적 토대를 바탕으로 한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천진난만한 얼굴로 무엇이든지 집어 삼킨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성공과 부의 축적으로 치달아 도의라는 것은 그들의 행태에 적용되지 않는다. 만약 집어삼키는 쪽(거인족)에 속해 있다면 행복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에 있다면 잔인한 파멸의 지경에 이른다. <자본주의는 윤리적인가>에서 앙드레콩트 스퐁빌(AndreComte-Sponville)이 말하듯 자본주의는 인(仁)하지 않다. 맑스만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대형 기업들의 무리한 확장 때문에 구멍가게 자영업자들이 다 죽어나간다는 이른바 골목 상권 논란이 일어났을 때, SPC그룹의 파리바게뜨는 자신들은 억울하다고 했다. 그들도 구멍가게에서부터 시작했다고 항변했다. 거인 같은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지배자 삼성 자본의 모태도 이병철 회장의 구멍가게에서부터 시작했다. 거인의 욕망은 끝이 없다. 정작 이 작품에는 일본인의 위기의식이 담겨 있다는데,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겪는 작금의 상황을 이런 거인들의 침입으로 간주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들은 한국에게 거인은 바로 일본임을 간과한다.  
 
  
일본만화 <진격의 거인>의 한 장면
 
<진격의 거인>에서 거인에 대항하는 성안의 인류들은 그 거인들을 무조건 죽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성 안의 인류들은 다른 생명체에 과연 인자한 것일까. 조사 병단의 사샤 브라우스는 전투 기간 중에 제한된 공급의 고기를 훔쳐낸다. 식욕이 강한 사샤가 가져온 고기에 다른 대원들도 달려든다. 그 고기는 결국 다른 동물을 죽인 결과물이다. 거인과 과연 얼마나 다른가. 최근 과학계에서는 동물의 뇌 신호를 인간의 언어로 바꾸어주는 기술이 개발되었다. 인간과 동물의 소통이 가능한 것이다. 한국에서도 차세대 유명기술로 뽑히기도 했다. 이러한 기술이 진보되면 함부로 가축을 도살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를 것이다. 동물의 인권이 부각되는 것은 동물복지법이나 정치 결사도 가능하게 할지 모른다. 당연한 노릇이다. 
 
살육과 고기의 섭취는 물적 추구의 본능이 추동한다. 오늘도 우리는 자신의 물적 행복을 위해 천진난만하게 누군가를 오늘도 살육하고 있는지 모른다. 요컨대, 누구나 거인괴물이 될 수 있다. 거인들은 자신이 죽어가는 지도 모르고 인간고기를 향해 달려간다. 그들은 진격할 뿐이다. 그 끝에는 인간의 공동체적 연대가 치명적인 살상무기로 기다리고 있다. 인간은 결국 도덕과 윤리에 바탕을 둔 연대를 통해 자신들의 생존을 모색할 수밖에 없으며 그럴 때 분별없는 자본주의의 식성에 대항하여 종족을 유지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공부의 신>, <직장의 신>, <여왕의 교실>은 현실만 강조할 뿐 결론이 이런 가치에 부합하지 않으므로 찬성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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