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전통속의 하이테크놀로지

한지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4. 5. 6. 21:21
고려시대에 생산된 종이를 당시 중국의 문인·학자들은 ‘고려지(高麗紙ㆍ고려 종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한국의 대중가요·영화·드라마를 선호하는 해외 트렌드를 ‘한류(韓流)’라 하듯이 고려지는 고려판 ‘한류’의 원조이자 또 하나의 고려 명품이다.

지난 호에서 소개했듯 송(宋)나라 왕실은 다량의 고려청자를 수입·소비했고, 그 유물들이 남송의 수도 항저우(杭州)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되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이 『고려사』 등의 역사 문헌에 기록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반면에 고려지가 중국에 널리 유통된 사실은 각종 문헌 기록에 많이 나타난다. 1074년(문종28), 1080년(문종34) 7월 고려는 송나라에 대지(大紙) 20부(副*2000폭)를 각각 바쳤다. 원나라(몽골)도 고려와 1218년 공식 관계를 맺은 지 3년 만인 1221년(고종8) 고려로부터 종이 10만 장을 공물로 받아갔다. 또 1263년(원종3) 9월과 이듬해 4월에도 원나라는 다량의 고려 종이를 공물로 수취했다. 이렇게 고려지는 송나라뿐만 아니라 원나라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조선 후기 역사학자 한치윤(韓致奫;1765∼1814년)이 저술한 해동역사(海東繹史)엔 당시 중국인들의 고려지에 대한 평가가 잘 정리되어 있다.

“중국에서 나지 않는 것은 외국의 오랑캐로부터 많이 가져다가 쓴다. 당나라 사람들의 시 속에 ‘만전’(蠻牋*오랑캐 종이)이란 글귀가 많이 인용되어 있는데, 여기엔 다 까닭이 있다. 고려에서는 해마다 종이(*만전)를 조공했다. (중국에서) 책을 만들 때 이것(*고려지)을 많이 사용했다.”(『해동역사』권27 문방류(文房流) 종이편)

고려지가 중국 대륙에서 널리 유통됐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기록이다. 중국인들은 ‘아름다운 흰빛에 결이 있는 매끄러움’ ‘두터움과 흰빛’ ‘흰빛과 질김’ 등의 표현으로 고려지의 우수성을 묘사했다. 종이는 인쇄술·나침반·화약과 함께 중국이 자랑하는 4대 발명품인데, 한나라 채륜(蔡倫)이 2세기 무렵 발명한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천년이 지나지 않아 중국은 고려지를 수입해 사용한 것이다. 그만큼 고려지는 당시 중국 문인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이로 인해 송나라뿐 아니라 양자강 유역의 만족(蠻族)에게까지 널리 유통되었다.

닥나무 재료와 두드리는 도침법이 핵심

경기도 가평 장지방(張紙房)에서 전통 한지를 제작하는 모습. 장지방은 문화재청이 지정한 지장(紙匠)의 공방이다. [사진 김형진 국민대 교수]

최근 몽골에서 고려지를 생산했던 공방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몽골은 품질이 좋은 고려지를 공납받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고려지 기술자를 징발해 현지에서 직접 생산하여 수요를 충당했던 것이다. 고려지의 품질과 기술을 그만큼 신뢰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려지의 기술 수준, 즉 제지기술의 특성은 무엇일까? 서긍의 『고려도경(高麗圖經)』(1123년)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고려의) 종이는 온전히 닥나무만을 써서 만들지 않고 간혹 등(藤)나무를 섞어서 만든다. 다듬이질을 하여 모두 매끈하며, 높고 낮은 등급이 몇 개 있다(紙不全用楮 間以藤造 搥搗皆滑膩 高下數等).”(권23 토산조)

서긍은 고려지의 강점을 사용 재료와 제작 방법에서 찾았다. 『고려도경』에서 등나무가 일부 사용되었다 하나, 고려지의 주재료는 닥나무(*저;楮)다. 마지(麻紙)가 종이의 주재료인 중국과 다르다. 한나라부터 당나라 이전까지 중국 종이의 80% 이상은 마지였고, 민간에 전래된 서예나 회화에 쓰인 종이도 대부분 마지였다.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종이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704∼751년 제작 추정, 불국사 석가탑 출토)의 지질을 분석한 결과 재료가 닥나무임이 밝혀졌다. 당나라 시인의 시(詩) 속에서 만전(*고려지)이란 용어가 나타난 것처럼 고려지의 연원은 통일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때부터 닥나무를 재료로 종이를 제작해 왔던 것이다.

종이 표면을 두드려 가공함으로써 먹의 번짐을 막는 도침법(搗砧法)은 고려지 제작기술의 핵심이었다. 다라니경을 분석한 결과 통일신라의 종이도 이 기술로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기술은 종이 면을 고르게 하여 섬유 사이의 구멍을 메우고 광택 있는 종이를 만드는 데 필요한 종이 가공 기술이다. 또한 긴 섬유를 자르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므로 지나치게 물을 빨아들이거나 보푸라기가 이는 문제점이 해결된다. 적당한 수분을 고르게 먹인 다음, 큰 망치로 두들기는데 그때 두드리는 양을 가늠하는 데서 장인의 솜씨가 발휘된다. 또한 종이 지질이 치밀해지고 광택이 나며 잔털이 일어나지 않아 글씨가 깨끗하게 잘 써진다. 중국에서 고려지를 ‘백추지’(白硾紙*표면이 희고 단단한 종이)나 ‘경면지’(鏡面紙*표면이 거울과 같이 맑고 깨끗한 종이) 또는 ‘견지’(繭紙*표면이 솜처럼 부드러운 종이)라고 표현한 것은 바로 이런 제작기술 덕택이다. 이 기법은 종이 위에 먹을 떨어뜨리면 먹이 스며드는 속도가 느릴 뿐 아니라 먹이 옆으로 번지지도 않는다. 이 기술은 신라부터 조선시대까지 꾸준하게 계승된 기술이다. 반면 중국의 제지술은 종이 표면에 백색 광물질 가루를 바르고, 작은 돌로 비벼 광을 내는 방식이다.

고려지의 품질을 크게 향상시킨 도침법은 닥나무와 같이 비교적 단단한 종이 재료 때문에 창안된 기술이다. 중국에서 많이 사용된 마(麻)와 비단 따위의 종이재료는 닥나무(楮)에 비해 부드럽기 때문에 이 기술을 적용할 수 없다. 그렇다면 왜 고려지는 닥나무를 재료로 했을까? 닥나무는 함경도와 제주도를 제외한 한반도의 자연풍토에서 가장 잘 자라며,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다. 한반도의 자연환경을 가장 잘 이용하여 생산된 것이 고려지인 셈이다.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무렵에 확립된 도침법 기술 덕에 고려지는 종이의 종주국인 중국인도 호평을 할 만큼 경쟁력 있는 수출품이 된 것이다.

‘所’ 시스템으로 수공업 생산 국가적 지원

고려지가 당시 동아시아 세계에서 인기를 끈 것은 단순히 종이 제작 기술의 우수성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선박과 자동차·핸드폰· TV와 같은 제품이 세계 일류제품이 된 것은 끊임없는 기술 축적과 함께 그를 뒷받침한 사회적 생산시스템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시스템은 국가적·사회적 관심과 지원을 바탕으로 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고려 사회는 이러한 사회적 생산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그건 바로 ‘소(所)’ 생산체제로 압축된다.


“고려 때 또한 소(所)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금(金)소, 은(銀)소, 동(銅)소, 철(鐵)소, 사(絲)소, 주(紬)소, 지(紙)소, 와(瓦)소, 탄(炭)소, 염(鹽)소, 먹(墨)소, 곽(藿)소, 자기(瓷器)소, 어량(魚粱)소, 강(薑)소로 구분되었으며, 해당 생산물을 공납했다.”(『신증동국여지승람』권7 여주목(驪州牧) 고적(古跡) 등신장(登神莊)조)

고려 때 제도화된 ‘소’는 금·은·동·철 등의 광산물, 소금(*鹽)·미역(*藿)·생선(*漁)·생강(*薑)·직물(*絲ㆍ紬) ·땔감(*炭)·생선(*魚梁) 등의 농수산물, 자기·칠기(*나전칠기)·종이(*紙)·기와(*瓦)·먹(*墨) 등의 수공업제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한 곳이다. 고려는 ‘소’라는 특수 행정단위를 두고 해당 제품의 전문 기술자인 장인(匠人)과 각종 제품의 생산을 위한 잡역에 동원된 소민(所民)을 두어 수준 높은 수공업제품을 생산했다. 이를 소 생산체제라 한다. 종이와 청자 외에 나전칠기와 먹·칼 등 당시 중국에서 크게 호평을 받은 고려의 수공업제품도 이런 생산체제에서 생산되었다. 소와 함께 향(鄕)과 부곡(部曲) 및 장(莊)·처(處) 등의 특수 행정단위를 묶어 부곡제(部曲制)라 한다. 부곡제는 군현제(郡縣制)와 함께 고려의 지방행정구조를 떠받치는 두 개의 중요한 축이었다.

왕조건국 반대세력을 所에 편제시켜

부곡제의 일부인 소 생산체제는 고려왕조 성립기의 역사적 특성 속에서 생성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이래 개간의 확대로 형성된 새로운 촌락을 군현체제로 편제하는 과정에서 군 또는 현이 되지 못한 영세한 지역을 향이나 부곡·소 등으로 편성했다. 

고려는 왕조 건국에 반대한 세력들을 이곳에 편제시켰다. 당시 지역 간에 사회·경제적 발전 격차가 커서 중앙정부가 전국을 일률적으로 지배할 수 없었던 것도 이런 제도를 만든 또 다른 배경이 되었다. 그 가운데 국가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광산물과 농수산물 및 수공업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소라는 특수 행정구역을 편성했다. 일종의 사회적·지역적 분업체제였던 소에서 고려의 명품으로 해외에서 호평을 받은 고려청자와 고려지가 생산된 것이다.

고려청자와 고려지는 사치와 화려함을 추구한 고려 문벌귀족층의 기호와도 맞물려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소는 명품을 향유한 문벌귀족층과 명품을 만드는 장인층 사이를 이어주는 매개 고리 역할을 하였다. 문화의 향유자와 생산자의 분리는 고도의 예술성을 갖춘 질 높은 문화제품을 생산할 수 있게 했다. 고려지 역시 이러한 사회적 생산시스템의 결과물인 셈이다.

박종기 국민대 교수 j9922@kookmi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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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미국의 시사주간지 『라이프』는 지난 1천 년 동안 인류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그 첫번째로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해 성경을 찍어낸 것을 꼽았다. 당시 귀족과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던 성경이 그의 인쇄기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보급되면서 결국 서양 문명이 현재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인의 문화적 자존심을 한껏 높여주는 증거도 된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751년)과 구텐베르크보다 70여 년 앞서 금속활자로 찍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일명 직지심경, 1377년)을 한국의 선조들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1천 년 간 가장 위대한 발명 또는 세계를 변화시킨 1백대 사 중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인쇄술이 언급될 때마다 우리들은 선조들이 일구어낸 눈부신 인쇄술 덕분에 더 높은 자긍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파피루스(사진 jinhee153).


그러나 세계 최고의 목판과 금속 인쇄물을 발명한 사실은 내세우고 있지만 그와 비견하여 결코 떨어지지 않는 우리 종이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구텐베르크의 성경은 발간된 지 550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지질의 보관에 문제가 있어 열람조차 불가능한 암실에 보관되어 있다. 반면에 한지는 천 년 세월을 견뎌낸 것은 물론 삭지도 않고 썩지도 않는다. 

〈한지의 역사〉 

학자들에 따라 종이의 기원을 이집트의 파피루스로 간주한다. 파피루스는 지중해 연안의 습지에서 자라는데 고대 이집트에서는 이 식물 줄기의 껍질을 벗겨내고 속을 가늘게 찢은 뒤, 엮어 말려서 다시 매끄럽게 하여 파피루스라는 종이를 만들었다. 이집트가 세계 최고의 문명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로 파피루스를 꼽는 학자들도 많이 있다.   


그러므로 종이와 유사한 재료는 동양이 이집트보다 한참 뒤에 발명했다는 것이 사실이다. 이집트에서 파피루스를 사용하는 기간에 동양에서는 문자를 표기하기 위하여 다양한 형태의 소재들, 예를 들어 소나 돼지의 뼈, 거북의 등껍질, 청동 그릇, 나무판자, 얇은 대나무판, 판석 등을 사용했다. 

이집트 제19왕조의 『사자의 서』. 기원전 10세기에 제작됐으며 파피루스 줄기로 만들었다.


기원전 2세기 말부터는 대나무가 주로 사용됐다. 그러나 대나무판은 과거의 어떤 문자판보다 실용적이고 견고한 책 모양새를 갖추긴 했으나 무거운데다 부피 또한 만만치 않아 대중적으로 사용하기에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기원전 4세기 이후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비단 두루마리 서책(書冊)도 있었다. 비단 두루마리는 비교적 가볍고 사용하기가 편리한데다가 섬세한 글씨를 쓰기에 유리한 털로 만든 붓이 출현하자 더욱 활발하게 활용되었다. 그러나 비단은 가격이 너무나 비싸므로 경전이나 국가의 연대기, 문학적인 걸작들이나 그림들로 장식된 회화서에 한정되어 사용됐다. 

공식적으로 종이는 『후한서』 환관열전에서 '105년 환관 채륜이 나무껍질, 마 등을 원료로 종이를 만들어 황제에게 바쳤다'라는 글을 근거로 채륜이 서기 105년에 나무 껍질, 마, 창포, 어망 등 식물 섬유를 원료로 하여 만들었다고 알려진다. 채륜의 종이 발명 연대는 고구려 태조왕(太祖王) 53년, 백제 기루왕(己婁王) 29년, 신라 파사왕(婆娑王) 26년에 해당된다. 

그러나 근래 고고학 발굴에 의하면 종이의 기원은 늦어도 기원전 50∼40년대인 전한(前漢)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므로 채륜이 종이를 최초로 발명했다기보다는 채륜이 황제에게 종이의 제조 과정을 보고한 이후 종이를 문서 표기의 대중적인 소재로 사용하도록 결정했다는데 큰 의미를 둔다. 

한반도에서 종이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2세기∼7세기 사이에 전래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2세기에 전래되었다는 설은 현재까지 한지의 주원료인 닥에 대한 음운론적 접근에서 비롯된 것이다. 닥은 한자로 ‘저(楮)’로 쓰이는데 중국에서는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 사이에 ‘tag’ 혹은 ‘tiag’라는 음으로 읽혔다고 한다. 그러므로 닥은 ‘저(楮)’의 음이 ‘닥’으로 읽혀지고 있던 시기에 종이 원료로서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3세기 설은 1931년 조선고적연구회에서 발굴한 낙랑시대의 유적지인 평남 대동군 남정리 채협총에서 권자본(卷子本)의 질통(帙筒)으로 보이는 채문칠권통(彩紋漆卷筒)과 먹가루[墨粉]가 묻어 있는 벼룻집, 오수전(五銖錢), 화천, 동경(銅鏡) 등이 발견됨으로서 당시에 이미 종이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사용된 종이가 중국에서 수입해온 것인지 아니면 국내에서 생산했는지는 알 수 없다. 또 다른 설의 근거는 백제의 아직기가 서기 284년에 일본에 천자문을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채륜이 종이를 만든 지 180년 뒤의 일이므로 한반도에서 이미 종이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다. 

구례 화엄사 오층탑에서 발견된 8세기 신라시대 종이유물.


4세기 설은 3세기 말부터 4세기 말까지 중국 대륙에서 난리를 피해 우리나라로 온 이주민들이 많아 이들 가운데 종이 만드는 기술자가 있었으리라고 짐작하는 것이다. 4세기 말이라는 견해는 동진의 마라난타가 384년 백제에 불교를 전파하였는데 이때 많은 책과 제지술도 함께 전해졌을 것이라는 데서 비롯된다. 

6세기 말∼7세기 설은 영양왕 21년(610)에 고구려의 담징이 종이·먹채색·맷돌을 전해주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과 불국사의 석가탑에서 발견된 두루말이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두루마리는 석가탑이 완성된 751년에 넣어진 것으로 생각되므로 이때 이미 종이를 만드는 기술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중국에서는 맷돌 등을 이용하여 섬유를 잘게 갈아 종이를 만들었으므로 담징이 함께 전했다고 하는 맷돌은 종이와 관련한 용구로 추측된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제지에도 맷돌을 사용하였고 이는 우리나라의 제지법이 중국의 종이 기술과 동일하다는 것을 추측하게 해준다. 

위의 사실을 종합해보면 2세기에서 늦어도 4세기까지는 우리나라에 종이와 그 제조술이 전래되었다고 보는 것이 대세이고 아무리 늦어도 7세기 이전에 이미 상당한 기술의 축적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황제의 진적은 고려 종이로〉 

우리나라의 종이는 예로부터 명성이 자자했다. 

송나라 손목(孫穆)이 지은 『계림지(鷄林志)』에 '고려의 닥종이는 윤택이 나고 흰 빛이 아름다워서 백추지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고반여사(考槃余事)』에는 '고려 종이는 누에고치 솜으로 만들어져 종이 색깔은 비단같이 희고 질기기는 마치 비단과 같은데 글자를 쓰면 먹물을 잘 빨아들여 종이에 대한 애착심이 솟구친다. 이런 종이는 중국에는 없는 우수한 것이다'라고 적었다. 

중국에서 진귀하게 여겨졌던 신라의 백추지 혹은 경면지(鏡面紙)는 긴 섬유의 종이를 몇 겹으로 붙여서 이를 두드려 광택을 낸 것이다. 백추지는 두드려 만든 하얀 종이라는 뜻이며, 경면지는 두드려 거울처럼 빛나게 한 종이라는 뜻이다. 중국에서 질긴 것이 요구되는 우산, 부채, 책 표지 등의 용도에 우리나라의 종이가 인기가 있었고 그림이나 글씨에는 두드려서 광택이 나는 것을 즐겨 사용했다. 

중국 역대 제왕의 진적을 기록하는 데에 고려의 종이만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 종이의 명성은 조선으로 이어져 한지가 중국과의 외교에 필수품으로 여겨졌다. 한지의 질이 명주와 같이 정밀해서 중국인들은 이것을 비단 섬유로 만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한지는 중국과의 외교에서 조공품으로 많이 강요되었다. 

문종 34년(1080), 고려가 송나라에 보낸 국신물(國信物) 중에는 대지(大紙) 2천 폭과 먹 4백 정이 들어 있으며 송나라로의 수출품 중에는 백지와 송연묵이 많이 들어 있었다. 그뒤 원나라에서도 고려지를 불경지(佛經紙)로 쓰기 위해 구했는데 한 번에 10만 장이라는 막대한 양의 종이를 수입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전상운 박사는 적었다. 

조선 영조 때 서명웅(1716∼1787)이 지은 『보만재총서』에는 '송나라 사람들이 여러 나라 종이의 품질을 논하면 반드시 고려지를 최고로 쳤다. 우리나라의 종이가 가장 질겨서 방망이로 두드리는 작업을 거치면 더욱 고르고 매끄러웠던 것인데 다른 나라 종이는 그렇지 못하다'라고 적고 있어 한국 종이의 우수성을 짐작해볼 수 있다. 

〈요긴한 닥나무〉 

고려시대의 종이가 다른 것에 비하여 질이 좋았던 이유는 종이의 원료로 닥나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종이의 원료에는 채륜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나무 껍질이나 솜, 마 등 여러 가지가 사용됐다. 그러나 마(麻)섬유로 된 종이는 필기하는 데 껄끄러운 감이 있고, 종이의 원료 공급이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지극히 과학적인 사고를 통해 다른 종이 재료를 찾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닥이었다. 

닥나무. 닥나무 잎은 한줄기라도 그 형태가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사진 encyber.com).


닥나무 재배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 기록은 『고려사』에서 찾을 수 있다. 고려시대는 사찰과 유가에서 서적 출판(대장경, 『삼국사기』 등)이 성행했기 때문에 대량으로 종이가 소요되었다. 『고려사』에는 인종 23년(1145)에서 명종 16년(1186)에 종이 생산에 필요한 닥나무를 전국에 재배할 것을 명했다고 적혀 있다. 

조선 시대에도 제지업을 매우 중요시하여 많은 지방에 닥나무 밭을 만들게 하고 닥나무 재배를 시켰다. 또 중국에 제지공을 파견하여 제지술을 배워오도록 하여 국내 제지술 발전에 보탬이 되도록 하였다. 조선 시대 후기에 와서는 종이의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나라에서는 사찰에서도 종이를 만들어서 바치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이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또 요구되는 규격과 질을 보장할 수 없었으므로 태종15년(1415)에 서울에 제지 공장이라고 볼 수 있는 조지소(造紙所)를 설치한다. 『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이 조지소에 대해 적혀있다. 

‘조지소는 창의문 밖에 있다. 표전지, 자문지 및 여러 가지 종이를 만드는 일을 맡는다. 사지(司紙)1명, 종6품 별제(別提) 4명을 두었다. 설립 당시의 기록을 보면 지소에는 2명의 제조(提調)가 행정적인 책임과 기술적인 책임을 맡아보도록 배치되었고 사지, 즉 제지 기술책임자 1명과 별제라는 담당 관리 4명, 85명의 지장(紙匠), 즉 제지 기술공과 95명의 잡역부가 배치된 200명 가까운 인원을 가진 큰 공장이었다. 또 지방에는 모두 698명의 지장이 각 도에 소속되어 있었으니까 이것 또한 큰 인력이었다.’ 

15세기 초에 종이를 만드는 일에 거의 1천 명이 종사했다는 사실은 조선이 동시대에는 세계적인 종이 생산국이라는 것을 뜻한다. 조선은 제지 기술공들이 법적으로 우대받도록 규정하고 그들에게 생활을 보장해주는 특권도 부여했다. 

국보 제196호 신라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755년경)의 종이를 조사한 오오가와란 일본 학자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종이는 매우 희고 광택이 있으며 표면은 평활하고 강한 광택이 있다. 티라든가 풀어지지 않은 섬유 덩어리도 적은 아름다운 종이이다. 얇은 종이임에도 불구하고 먹이 번지지 않는다. 비추어보면 전체적으로 조화 있으며 만지면 파닥파닥하며 치밀하고 밀도가 높은 종이로 보여진다. 종이의 색이 매우 하얀 것을 보면 하얀 종이를 만들기 위해 꽤 노력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종이의 밀도는 0.64g/cm3으로 보통 닥나무 종이 2배 정도의 밀도를 보이며 표면에 먹이 스며드는 것을 관찰하면 종이 표면에 먹의 침투를 막기 위한 무엇인가를 바르고, 다듬이질, 문지름 등의 가공을 했다고 생각된다. 이 종이는 원료의 닥 껍질에서 최종 가공까지 일관되게 정성 들여 만든 것으로 보이며 제지 기술의 뛰어남을 볼 때 고대 한국에서 만든 종이로 보인다.' 

한지 제조의 정확한 유래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지만 상술한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에는 한지 제작 과정을 말미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절에서 쓸 종이를 마련하기 위해 닥나무를 재배할 때는 그 나무 뿌리에 향수를 뿌리며 정결하게 가꾸고, 그것이 여물면 껍질을 벗겨 삶아 찧어 종이를 만든다.' 

바로 닥나무의 껍질로 한지를 만들었음을 알려주는 단서이다. 배도식은 『한국 민속의 현장』에 다음과 같은 설화를 수록하였다. 

'신라시대에 경남 의령군 봉수면 서암리 뒷산 국사봉에 대동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설씨 성을 가진 주지승이 살고 있었다. 이 절 주변에는 닥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었다. 하루는 이 주지승이 닥나무를 꺾어 지팡이 삼아 가지고 다니다가 절 앞의 반석에 앉아 지팡이를 두들겼다. 그리고 다음날 와보았더니, 닥나무의 껍질이 반석에 말라붙어 얇은 막처럼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를 본 주지승은 일부러 닥나무의 껍질을 벗겨서 돌로 짓이겨 반석에 늘어놓고 다음날 다시 와보았다. 그가 예상한 대로 이 껍질 역시 엉겨 붙어서 말라 있었다. 여기서 착상한 주지승은 이를 발전시켜 한지를 만들어 쓰기 시작했다.' 

한지를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닥나무는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나 자랄 수 있다. 닥나무는 뽕나무과에 속하는 낙엽성 관목으로 학명은 브루소네티아 카찌노키이다. 크기는 3미터 정도이며 밭 가장자리, 길가, 둑 등 다른 나무를 심기 어려운 곳에서도 잘 자라서 비탈에 흙의 무너짐을 막기 위하여 심기도 했다. 

낙엽성 관목인 닥나무는 여러 해 동안 매년 줄기를 잘라내도 계속해 새 줄기를 만들 수 있는 나무이다. 어미 나무의 뿌리에서 많이 생겨나는 맹아를 포기나누기나 삽목으로 번식시킬 수 있으며, 추위에 비교적 강하지만 햇볕이 잘 들고 부식질이 많은 곳에서 잘 자란다. 특히 직물의 원료로 한 번 소요되고 난 후 버려야 하는 일년생 풀인 마보다는 재료 공급 면에서도 뛰어나다. 한지의 원료로는 보통 3년이 지난 줄기를 사용하는데, 옮겨 심은 후 5~7년 지난 줄기에서 가장 많은 섬유를 얻을 수 있다. 

한지로 만든 부채.


〈천년의 비밀〉 

한지가 천 년을 견뎌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립중앙과학관 과학기술사연구실> 정동찬 실장의 「전통 과학 기술 조사 연구」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닥나무를 잿물에 넣어 삶아낸 섬유나 그 섬유소(C5H10O5)의 굵기가 균일하기 때문이다. 또한 국내산 한지의 경우 중국 닥을 사용하여 만든 한지나 중국 수입 화선지, 일본 화지에 비하여 섬유의 폭이 매우 작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한지의 경우 다른 나라의 종이와는 달리 섬유의 조직 방향이 서로 90도로 교차하고 있는데 이러한 이유로 전통 한지는 매우 질긴 성질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종이에 방향성이 존재하는 경우 종이가 잘 찢어지는 방향은 섬유의 방향과 같으므로 종이의 강도는 방향성이 없을 때보다 떨어지기 때문이다. 

둘째는 독특한 불순물 제거 방법이다. 제지 과정에 불순물의 제거는 질 좋은 종이의 생산에 필수적인 과정이다. 제지 원료에 들어있는 전분, 단백질, 지방, 탄닌 같은 불순물을 충분히 제거하지 않으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종이가 변색되거나 품질이 저하되기 때문이다. 한지는 화학 펄프에서 사용하는 산성 화학 약품을 쓰지 않기 때문에 중성지의 성격을 띠고 있다. 즉 알칼리성에 비교적 강한 섬유의 특성을 충분히 살려 알칼리성 용재인 나뭇재나 석회를 불순물 제거제로 사용했다. 그래서 한지는 산성을 띤 펄프지처럼 화학 반응을 쉽게 하지 않는 중성지의 성질을 갖고 있다. 

신문지나 오래된 교과서가 누렇게 변색되는 이유는 사용된 펄프지에 약간의 불순물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 불순물 중에는 화학식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C18H24O115과 C40H45O18로 추정되는 고분자물질 리그닌(lignin)이란 성분이 있는데 셀룰로우스가 화학적으로 안정한 반면 리그닌은 불안정하기 때문에 대기 중 산소나 수분, 자외선과 쉽게 반응해 퀴논(quinone)과 같은 물질로 변하면서 색도 노랗게 바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불순물을 가진 종이를 산성지(ph4-5.5)라고 부르는데 변색을 막으려면 책이 자외선이나 수분에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한지의 지질을 향상시킨 셋째 요인은 식물성 풀에서 찾을 수 있다. 한지는 섬유질을 균등하게 분산시키기 위해서 황촉규(닥풀)이라는 독특한 식물성 풀을 사용했다. 황촉규는 아욱과에 속하는 1년생 초본식물로 뿌리에 점액이 많아 종이를 만들 때 지통에 섬유가 빨리 가라앉지 않고, 물 속에 고루 퍼지게 하여 종이를 뜰 때 섬유의 접착이 잘 되도록 한다. 그래서 닥풀은 종이의 가도를 증가시키며 얇은 종이를 만드는데 유리하고 순간적인 산화가 빨라 겹친 젖은 종이가 떨어지기 쉽게 하므로 낱장으로 종이를 말리는 데도 안성맞춤이었다. 

한지는 닥풀의 뿌리에서 추출된 점액을 사용함으로써 섬유의 배열이 양호해졌고, 강도가 증가했으며 광택도 좋아졌다. 또 닥풀의 사용은 종이를 얇게 뜰 수도 있게 하였고 습지의 분지를 용이하게 해주었다. 

세종 15년에 편찬된 『향약집성방』 85권에, 종이 뜰 때 점제로 사용하는 닥풀에 관한 언급이 나오고 있어, 1433년 이전에 이미 닥풀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대개 펄프만을 사용해 만든 종이는 흡수성이 좋아 필기나 인쇄 시 잉크가 번진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종이를 만들 때 펄프에 내수성이 있는 콜로이드 물질을 혼합해 섬유의 표면이나 섬유 사이의 틈을 메우게 되는데(사이징) 닥풀이 이러한 작용을 한다. 

넷째는 표백 방법이다. 순백색의 우량 종이를 제조하기 위해서는 잡색을 띤 비섬유 물질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과정을 표백이라고 하며 전통 한지는 천연 표백제를 사용했다. 냇물 표백법이 그 대표적인 방법으로 옛날부터 한지를 생산하는 곳에는 맑은 물이 항상 필요했다. 천연 표백법은 섬유를 손상시키지 않고 섬유 특유의 광택을 유지하면서 그 강도를 충분히 발휘시킬 수 있게 만들어준다. 

주로 표백 단계에서 제거되는 성분은 냉수, 온수, 알코올-벤젠 및 당류와 분자량이 적은 탄수화물 등이다. 이중에서 당류 성분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당류가 많으면 종이가 햇빛에 노출되었을 때 변색되기 쉽고 완성된 종이의 강도가 약하며 벌레가 생기기 쉬워 종이의 수명이 짧아지기 때문에 가능한 한 당의 함량을 낮추는 것이 좋다. 전통 한지의 수명이 오래 가는 이유는 2차에 걸친 표백으로 닥나무에 존재하는 당류가 거의 빠져 나오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한지의 질을 더 높여주는 조상들의 비법은 또 있다.
한지 제조의 마무리 공정인 도침(搗砧)이 그것이다. 도침은 종이 표면이 치밀해지고 평활도를 향상시키며 광택을 내기 위해 풀칠한 종이를 여러 장씩 겹쳐놓고 디딜방아 모양의 도침기로 골고루 내리치는 공정을 말한다. 이는 무명옷에 쌀풀을 먹여 다듬이질하는 것과 동일한 원리이다. 이 도침 기술은 우리 조상들이 세계 최초로 고안한 종이의 표면 가공 기술이다. 

이와 같은 여러 공정을 거쳐 한지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종이로 빛을 발한다. 한지의 강한 특성은 한지를 몇 겹으로 바른 갑옷의 예에서도 볼 수 있다. 옻칠을 입힌 몇 겹의 한지로 만든 갑옷은 화살도 뚫지 못한다고 한다. 

한지가 이렇게 강한 이유 역시 닥나무 껍질의 인피 섬유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화학 펄프로 사용하는 전나무, 소나무, 솔송나무 같은 침엽수의 섬유 길이(3밀리미터)나 너도밤나무, 자작나무, 유카리 같은 활엽수의 섬유 길이(1밀리미터)보다 훨씬 긴 섬유 길이(10밀리미터 내외)를 닥나무의 인피 섬유는 갖고 있다. 

구한말 러시아 대장성의 조사 보고서인 『한국지』에는 조선 종이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한국의 종이는 섬유를 빼어 만들므로 지질이 서양 종이처럼 유약하지 않고 어찌나 질긴지 노끈을 만들어 쓸 수도 있다. 종이에 결이 있어 그 결을 찾아 찢기 전에는 베처럼 베어지지를 않는다.' 

숙종 9년에 '근래 한량들이 종이 신 신는 것을 멋으로 알아 이를 만들어 파는 자가 많아지자 사대부 집에서 서책(書冊) 도둑질이 심하니 이를 단속해야 한다'는 상소까지 있다. 조선 종이로 노끈을 꼬아 만드는 종이 신뿐만 아니라 종이 등잔, 물을 담는 종이 물통, 종이 대야, 종이 요강까지 있었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종이로 만들 수 없는 세간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단열 효과의 백미 창호지〉 

창호지문(사진 오뚜기).
한지의 우수성은 창문용으로 사용되는 창호지의 열적 성능에서도 잘 나타난다. 필자는 한옥에서 사용되는 창호지와 현대 기술의 산물인 창유리와의 열적 성능을 비교하기 위하여 <표 1>과 같이 시료를 제작하였다. 

이것은 현재 주택에서 주로 사용되는 방법을 채택한 것으로 시료 1은 2중 창문, 시료 2는 외측이 유리창이고 내측은 창호지 문을 설치한 경우이다. 시료 3은 외측은 2중 유리창문(페어 그라스)에 창호지 문을 내측에 설치한 경우이고 시료 4는 외측은 단 창에다 내측은 2중 창호지 문을 설치한 것이다.

이들의 상관 관계를 비교하기 위한 단위로서는 K값(열 관류량, Kcal/m2.hr.°C)을 사용하였다. 측정값을 비교 분석하면 유리창만을 사용한 2중 창(시료 1)의 K값이 5.31이었으나 같은 조건 하에 유리창 한 장과 한지(창호지)를 복합해서 2중 창으로 만든 시료 2의 경우 K값은 4.87로 9%의 열적 상승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유리창으로 된 2중 창에 창호지 문을 내부에 설치한 시료 3의 K값은 2.86으로 시료 1번보다 1.8배의 열적 효과가 있었으며 유리 단 창에 창호지만으로 된 2중 창을 더한 4번 시료의 경우 K값은 2.61로 1번 시료보다 무려 2배 이상의 열적 효과를 얻었다. 

이 실험 결과는 에너지 파동 이래 많은 건물에서 사용되고 있는 값비싼 2중 창문(페어 그라스)보다 단순하게 한지(창호지)를 사용한 2중 창호지 문의 열적 효과가 높다는 것을 뜻한다. 
창호지는 한지가 가장 많이 사용되는 분야 중 하나이다. 창호지의 가장 큰 장점은 현대 문명 기술이 만들어낸 어떤 종류의 창문 재료보다 실용성이 높다는 점이다. 창호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구멍이 있어 방문에 발라두면 환기는 물론, 방안의 온도와 습도까지 자연적으로 조절된다. 온돌에 장판을 발라서 생활했던 우리의 주생활은 방안에 습기가 많은 것이 문제점이었으나 이 습기를 창호지를 통하여 자연적으로 배출되도록 유도하여 쾌적한 생활 공간이 되도록 했다. 

<표1> 실험시료의 구성.


창호지는 바람과 빛을 통과시키고 습도를 조절하는 3가지 특성을 갖고 있다. 습기가 많으면 그것을 빨아들여 공기를 건조하게 하고, 공기가 건조하면 습기를 내뿜어 알맞은 습도를 유지하게 하는 신축성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창호지를 흔히 '살아 있는 종이'라고 하기도 한다. 창호지가 자연 현상에 이처럼 순응하는 성질은 모두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신라시대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한지 기술이 탁월했다는 것은 문화재청이 2000년에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영인본과 해제본을 전통 한지 기법으로 만들었으나 결과는 신라 종이의 정교함을 따를 수 없었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한지를 직접 만들었던 기술자도 제품이 마음에 안 들어 물에 여러 번 풀며 도침도 7번이나 했음에도 보푸라기가 유난히 많이 일어났다고 실토했다. 닥풀이나 닥나무 등 당시의 재료가 현재와 다른 면도 있겠지만 신라시대의 종이를 만들지 못한 것은 또 다른 면에서 선조들의 기술이 탁월했음을 보여준다. 

외국에서는 우리 한지를 최고의 종이로 인정하고 있는 반면에 우리들은 오히려 질이 좋지 않은 종이라 천시하고 한지에 비하여 질이 떨어지는 외국의 펄프 종이가 좋다고 여기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일본의 화지는 우리 전통 한지에 비하여 거칠고 강도도 떨어진다는 사실과 외국의 값싼 닥나무를 수입하여 아무리 전통 한지 흉내를 내려고 해도 실패한다는 사실에서도 전통 한지의 우수성을 알 수 있다. 

특히 시중에 나와 있는 창호지 품질은 그 생산 제조 과정에 따라 현저히 차이가 나는데, 일반적으로 수초지와 기계지로 나뉜다. 수초지는 전통 한지 제작법에 의해 만드는 것임에 반해 기계지는 목재 펄프를 사용하여 만들므로 가격이 싸며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목재 펄프를 많이 사용하면 창호지의 경우를 보더라도 색상이 희고 빳빳하며 엉킨 섬유가 없이 외관이 균일하여 고급품으로 착각되나 전통 한지 제작법으로 만든 창호지보다 강도가 낮고 내구력이 떨어진다. 외관만 보고서 질을 평가할 수 없는 것이 바로 한지의 특징이기도 하다. 

참고적으로 과거에 많이 사용된 두루마리 종이의 이음부분 비밀은 2003년 경북 문경시 영순면 영순 초등학교의 6학년 장건일(12살)과 임병호(12살)군에 의해 밝혀졌다. 

고려대장경(일명 팔만대장경)을 인쇄한 닥나무 종이 연결부위가 900년 동안 떨어지지 않고 있어 과학자들도 그 이유를 잘 몰랐는데 그 비밀은 발효 콩풀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밝힌 것이다. 발효 콩풀은 청국장을 만드는 것처럼 삶은 콩을 발효시켜 으깨 만든 풀이다. 

종이를 이은 부분에 사용한 발효 콩풀은 색깔 냄새 촉감이 좋지 않고 물에 약하지만 온도변화에 매우 강하고 개미가 싫어하며 특히 발효 콩풀 속의 고초균은 항생물질을 만들어 곰팡이를 방지한다는 것도 알아냈다. 이들은 2003년 제49회 <전국과학전람회>에서 화학분야 학생부 최우수상을 받았다. 

이종호(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이종호 님>은 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
▲ 종이가 만든 길…에릭 오르세나 지음·강현주 옮김 | 작은씨앗 | 360쪽 | 1만6000원

종이는 정직해서 전 세계로 확산됐다?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아랍의 압바스 왕조가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에 극적인 승리를 거둔다. 이를 통해 수백년 동안 비밀이었던 종이 제조법이 아랍 세계로 전파되었고 이후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수 세기 동안 종이는 중국에서만 사용됐다. 인더스 강 서쪽 지방에서는 파피루스와 양피지만을 사용하던 시절이었다. 중앙아시아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던 아랍인들은 사마르칸트를 정복함으로써 경이로운 소재인 종이를 발견한다.

압바스 왕조는 종이를 높이 평가했는데 종이가 우수해서가 아니라 종이의 약점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사용하던 다른 소재는 뒷면을 손상시키지 않고도 잘못 쓴 글자를 긁어낼 수 있었다. 이름이나 숫자, 심지어 서명까지 순식간에 고칠 수 있었다. 그러나 종이는 그럴 수 없었다. 왕조는 자신들의 문서에 신뢰를 담아야 했기 때문에 틀린 것을 쉽게 고칠 수 있다는 사실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와 달리 종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직하도록 만들었고 이 속성은 제국 지배자들의 이해와 맞아떨어지면서 전 세계로 확산된다.

프랑스 학술원의 회원이자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식인인 저자는 종이의 발상지인 중국 우루무치에서 시작해 이탈리아 파브리아노, 일본 에치젠, 인도 뭄바이, 캐나다 트루아리비에르, 스웨덴 예블레,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브라질 아라크루스로 이어지는 5대륙 15개국의 수많은 마을들을 일일이 발품 팔아 찾아다니며 종이의 탄생과 발전의 역사를 추적했다. 저자는 이 같은 방식으로 5대륙 6개 도시를 다니며 목화를 통해 세계화의 규칙과 이면을 풀어낸 <코튼로드>로 세계적인 호평을 받았고, 2년여 동안 전 세계 물 위기의 현장을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물로 인해 생존의 경계에 선 사람들을 만난 이야기를 담은 <물의 미래>를 집필하기도 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종이와 관련된 전문가들, 이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만나 들은 이야기를 통해 종이 전파 과정의 정치적·사회적 배경을 설명한다. 저자는 종이를 맨 처음 발명한 사람이 채륜으로 알려졌으나 고고학자들은 무덤이나 망루 등에서 그보다 오래된 종이를 발견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또 종이가 아랍에서 유럽으로 전파되기까지 500여년이나 걸린 이유는 유럽인들이 종이를 이교도들의 불경한 물건으로 간주했기 때문임을 지적한다.

이밖에도 저자는 박테리아를 제거할 수 있는 바이러스를 종이 속에 영원히 고정시키는 기술, 종이를 위한 위생이나 온도에 관련된 최신 기술 등의 지식을 전한다. 마르셀 푸르스트와 루이 파스퇴르 등에게 생명과도 같았던 그들의 원고를 둘러싼 이야기들, 프랑스 ‘위조지폐 제조왕’ 보자르스키의 이야기 등도 흥미롭다.

<임아영 기자 layknt@kyunghyang.com>
에릭 오르세나 지음/강현주 옮김/작은씨앗/1만6000원
종이가 만든 길/에릭 오르세나 지음/강현주 옮김/작은씨앗/1만6000원

종이를 발명한 것은 중국 한나라의 환관 채륜으로 알려져 있지만, 무덤과 망루 등에 대한 고고학적 성과는 채륜 이전에 만들어진 종이의 존재를 증명한다. 중국에서 만든 종이가 세계로 확산된 것은 종이가 가진 ‘정직성’이란 속성 때문이었다. 아랍과 유럽에 종이가 전파되기까지 사용되었던 소재는 뒷면을 손상시키지 않고도 잘못 쓴 글자, 심지어 왕의 서명까지 고칠 수 있었다. 중요한 문서에 적힌 내용을 쉽게 고칠 수 있다는 사실을 통치자는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종이의 틀린 글자는 손상 없이 다시 쓰기가 불가능하다. 이런 속성이 지배자들의 이해와 맞아떨어졌고, 종이는 본격적으로 확산된다. 

8세기에 아랍에 전해진 종이가 500년이나 지난 13세기에 이르러서야 유럽에 정착한 이유는 뭘까. 중세 유럽인의 입장에서, 종이는 아랍에서 온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종이는 코란을 적은 ‘불경스러운 물건’으로 간주되었다. 기독교의 신성한 ‘복음’을 전하는 수단이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책이 전하는 종이 이야기가 재밌다. 인간이 만든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이자 인류 문명과 역사를 혁명적이고도 지속적으로 변화시켰다는 점에서 종이의 역사는 흥미로운 소재일 수밖에 없다. 

저자는 종이 이야기를 들려 주기 위해 발상지인 중국의 우름키에서부터 이탈리아의 파브리아노, 일본의 에치젠, 인도의 볼리우드, 캐나다의 트루아리비에르 5대륙의 15개국을 돌았다. 그가 여행한 곳은 하나같이 종이와 관련된 역사 깊은 기억과 소중한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장소다.

마르셀 프루스트, 루이 파스퇴르 등의 세계적인 문학가 및 과학자에게 생명과도 같은 존재였던 ‘원고’를 둘러싼 이야기, 프랑스 ‘위조지폐 제조왕’ 보자르스키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화장지, 청소년소설, 종이접기 같은 시시콜콜한 소재를 활용해 종이의 다양한 속성을 들려준다.

강구열 기자

■ 종이가 만든 길

에릭 오르세나 지음ㆍ강현주 옮김

작은씨앗 발행ㆍ360쪽ㆍ1만6,000원 

프랑스의 대표 지성 에릭 오르세나는 프랑스 학술원의 회원이자, 1988년 소설 <식민지 전시회>로 최고 권위의 공쿠르 상을 수상한 유명 작가다. 그가 "인류를 위해 가장 오랫동안 가장 위대한 일을 해왔으면서도 오늘날 심각한 위협을 받는 매우 특별한 물건"인 종이를 위해 쓴 두꺼운 헌사가 바로 이 책이다. 저자가 이 책에 앞서 목화를 주제로 세계 6개 도시를 돌아본 뒤 쓴 책 <코튼로드>와 물 위기의 현장을 찾아 다니며 쓴 <물의 미래>는 <종이가 만든 길>과 상통한다. 

저자는 종이의 발상지인 중국의 우름키에서 시작해 이탈리아의 파브리아노, 일본의 에치젠, 인도의 볼리우드, 캐나다의 트루아리비에르, 스웨덴의 예블레 등 '종이 문명'이 스쳐간 다섯 개 대륙 열 다섯 개 국가를 돌며 이 책을 준비했다. 이들 도시는 하나같이 종이와 관련한 깊은 기억과 소중한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오르세나는 책의 서문에서 불현듯 종이에 고마움을 표한다. "이야기를 쓸 수 없었다면 내 인생은 어찌 되었을까"라며 종이를 예찬한 뒤 페이퍼 로드를 떠나기 위해 가방을 싼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종이의 길로 떠나는 여행기이기도 하다. 

저자의 발은 먼저 프랑스 브르타뉴 한복판으로 향한다. 그곳의 중국인 거주지에서 저자는 종이의 발명가로 알려진 채륜 이전에 이미 종이를 만들어낸 이들을 이야기한다. 오르세나는 다시 중국의 투르판으로 과거의 종이를 찾아 나서 그곳 박물관에서 광적인 편집증 때문에 종이를 유럽인보다 먼저 필요로 했던 옛 중국인들의 문서들을 만난다. 

아랍으로 발길을 돌린 저자는 종이의 세계적 확산이 다름아닌 종이가 가진 속성 중 하나인 '정직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수정할 경우 뒷면이 손상되는 종이의 속성을 저자는 정직함이라고 말한다. 누구도 뒷면을 그대로 둔 채 문서를 조작할 수 없음을 알게 된 유럽과 아랍의 제왕들이 자신의 왕조를 지켜줄 신뢰의 표상인 종이를 발 빠르게 확산시켰다는 것이다. 

과거의 종이에 대한 기행을 마친 저자는 현대의 종이가 주는 심상을 관찰하려 인도네시아의 제지공장 주변, 유칼립투스가 빨리 자라는 브라질에 선다. 나를 주어로 한 문장은 다시 아시아로 치닫는다. 예술이라고까지 하는 종이 접기, 태워짐으로써 죽은 자와 교신하는 종이, 살아선 책으로 묶여 산 자와 말하는 종이. 인간이 만든 가장 위대한 발명품인 종이는 시종일관 매혹적이다.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동아일보]

◇종이가 만든 길/에릭 오르세나 지음·강현주 옮김/360쪽·1만6000원·작은씨앗

인류 매혹시킨 종이의 세계정복記


누군가 내 나이를 묻는다면 ‘글쎄요’라고 수줍게 답해야 한다. 한동안은 기원후 100년 전후 채륜이라는 인물이 나의 아버지라고 알려졌었는데 최근 조사 결과 기원전 2세기까지로 확장됐다. 대략 2000살은 넘은 셈이다. 고향은 확실하다. 중국이다. 드넓은 중국 땅 중에서 어디냐고 묻는다면 기찻길 옆 오막살이가 아니라 북부 타클라마칸 사막이나 고비 사막 근처 비단길(실크로드) 주변 건조지대라고 말하겠다. 왜 건조지대냐고? 난 습기엔 약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중국의 4대 발명품으로 화약, 나침반, 인쇄술 그리고 나를 뽑는다. 그런 점에서 비단보다 내가 더 귀한 존재다. 내 한자명과 비단을 뜻하는 한자어에는 모두 ‘실 사((멱,사))’자가 들어간다. 그런 인연 때문인지 비단길은 내 세계정복기의 출발지이기도 하다.

751년 7월 고구려 출신 명장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와 압바스 왕조의 이슬람 군대가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인근의 탈라스 강가에서 격전을 벌였다. 승리는 이슬람군에 돌아갔고 나의 비밀도 처음으로 아랍제국의 손에 떨어졌다. 자, 이제 내 이름을 밝히겠다. 나는 종이다.


아랍제국의 왕들은 곧 나에게 매료됐다. 무엇보다 난 정직하니까.

8세기까지 중국을 제외한 지역에선 나보다 1000살은 더 많은 내 사촌 파피루스 아니면 양피지에 글을 썼다. 염소, 송아지 가죽을 무두질해 만든 양피지는 물론이고 나일 강변에 자라는 갈대의 줄기를 겹겹이 얽어서 만든 파피루스는 두꺼웠다. 그래서 뒷면을 손상시키지 않고도 글자를 긁어내거나 바꿔치기가 가능했다.

하지만 균질한 섬유질 반죽으로 만들어진 나는 얇고 반투명했기에 위·변조를 할 경우 쉽게 들통이 났다. 아랍의 칼리프들은 제국 곳곳에서 올라오는 거짓 없는 보고 때문에 나를 사랑했다. 상인들은 계약의 투명성을 지킬 수 있어 나를 사랑했다. 그리고 코란을 옮겨 적은 행위를 기도와 동일시한 무슬림에게 나는 신의 존재를 품는 존재이기에 이슬람 사원만큼 귀한 대접을 받았다.

중국제국과 아랍제국까지 정복한 내게 남은 것은 기독교 제국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저항은 완고했다. 내가 아랍 출신이라 생각해 불경스러운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다. 실제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황제는 1221년 모든 행정문서에서 나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하지만 1250년 전후로 나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거점 삼아 대량생산되기 시작했다. 특히 성 프란체스코의 고향인 이탈리아 아시시에선 가죽 삶을 때 쓰는 물을 사용하다가 동물성 젤라틴이 종이의 접착력을 높임을 발견했다. 식물과 동물의 만남으로 나는 더욱 강해졌다.

동쪽인 일본으로 가면 나는 신의 경지에 오른다. 기원후 600년경 한반도를 통해 종이 제조기술을 전수받은 일본에선 한반도와 가까운 후쿠이 현 에치젠이 종이의 성지다. 특히 한지의 3종 세트라 할 닥나무, 삼지닥나무, 안피가 골고루 자라 전통 제지소가 몰려 있는 이마다테 마을에선 종이의 신, 가와가미 고젠을 섬기는 신사가 있다. 뿐만 아니다. 8세기 이후 33년마다 3일간 나를 기리는 33식년 축제가 1200년간 지속되고 있다.

면화의 정치경제사를 담아낸 ‘코튼 로드’로 격찬을 받은 프랑스 작가 에리크 오르세나는 나에 대한 오마주를 담아내기 위해 5대륙 15개국을 섭렵했다. 유럽에선 넝마주이란 청소부가 나의 재료를 만들기 위해 만들어졌음을 발견하고, 인도에선 마하트마 간디와 종이기술자 알라 바즈의 만남으로 인도가 종이강국이 됐음을 알아낸다. 최고의 종이가 내구성이 강하고 가벼우며 글자와 그림이 선명하게 인쇄될 수 있는 포장지라는 점도 터득한다.

책은 이렇게 나, 종이에 대한 경이로운 정보가 가득하다. 하지만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고 오탈자가 많은 점이 눈에 거슬린다. 프랑스어를 우리말로 직역해 씨(氏)를 시로, 우루무치를 우름키로, 신장위구르를 진지앙 위구르로, 우마미야를 오메이야드, 연(蓮)을 로뎌스로 어설프게 옮겨 놨다. 곳곳에서 프랑스식 위트 넘치는 문장을 ‘썰렁한 유머’로 전락시킨 번역도 아쉽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