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한비야 신드롬과 윤은혜 캐릭터의 명암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09. 8. 22. 15:36

-대중문화콘텐츠에는 왜 나르시시트가 범람하나

대중문화콘텐츠는 기본적으로 나르시시즘을 반영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아니 빈번한 정도가 아니라 기본적인 원칙을 가지고 있다. 나르시시즘을 자기애라고 표현할 수 있을 텐데 때로는 병리적인 자기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대중적인 스타로 큰 인기를 한 몸에 받는다. 보르빈 반델로는 대중스타들은 경계성 성격장애를 가지고 있으며 나르시시스트의 자아도취 쾌감에 엔돌핀을 분비시킨다고 했다.

나르시시스트 캐릭터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세상에서 제일 잘난 것은 자기다. 이들은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다. 그들이 눈에 보이는 것은 아주 뛰어난 일을 하거나 아주 똑똑하고 엄청난 미모의 사람이다. 즉 시기를 일으킬만한 이들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가 고집하는 대로 따라야 한다고 여긴다. 자신의 요구나 주장을 상대방이 일방적으로 따라야 간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하거나 외면한다고 여기면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트린다. 그들은 자신이 '잘못 알고 있었나'라는 자기 반성적 생각이나 발언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항상 찬사를 듣고 싶어 한다. 이들은 자기 멋대로 해도 많은 이들이 자신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성공하기를 바란다. 샌더 호치킨스의 '사랑과 착취의 심리'는 이를 잘 정리해 많은 이들이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마사 스타우느는 소시오패스(sociopath)가 이러한 나르시스트와 관계가 없다고 하지만 병리적 나르시시스트는 이러한 소시오패스와 연결된다.

최근 세계오지탐험가에서 해외구호 팀장 활동을 하고 있는 이의 신작이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르고, 그가 < 황금어장 >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서 발언한 내용들이 화제에 올랐다. 그가 대중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는 이유는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서 자기만의 생활을 고수하는 나르시시즘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거침없이 자신의 삶을 살면서 당당하게 자기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을 밝히는 행위 속에서 병리적인 특징이 나타난다. 이러한 유형의 캐릭터는 다른 사람이 어떤 것을 느끼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관심이 없다. 자신의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어떻게 차별화되는지 그것을 거침없이 이야기하는데 망설임이 없다. 그것을 당당한 자기주체적 삶이라고 포장된다.

그것에서 엔돌핀이 도는 존재이다. 자신이 어떤 감정 상태에 있었는 지에 충실하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빠져 그것이 사회 전체적으로 어떤 범위에 있는지 가늠하는 것에 무감각하다. 그들은 이 땅에 붙박히지 못하고 끊임없이 부유한다. 그래서 차라리 해외를 떠돈다.

그들은 항상 자신이 옳기 때문에 그럴듯한 테마와 단체에 소속된다. 봉사와 공공적 단체에 있다가 다른 이들에게 끊임없이 그러한 명분을 훈계하거나 교육한다. 그러다가 자신보다 뛰어난 이들이 있거나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 많아지면 이탈한다. 또다시 산정묘지와 같은 자신만의 세계를찾으며부유하고 곧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인사들 중에는 자신이 진보주의자라고 자처하는 경우도 있다. 일반 사람들이 이를 흉내 내다가는 낭패를 당하기 쉽다. 그것은 경계성 성격장애나 자기도취적 나르시시스트 스타를 흉내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와 연결되는 문제이기에 무시할수 없을 지경이다.

이러한 이들이 제작한 콘텐츠에 대중들이 끌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현실에서 부대끼는 대중은 자기애 속에서 여린 자아와 정체성을 지키는 삶을 동경한다. 그러한 동경에 기대어 대중문화 콘텐츠를 파는 이들은 언제나 등장한다. 요즘은 해외에서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떠도는 것을 즐기는 이들이 상품의 판매목록 1위에 올라와 있다.

지금은 약간 시들해졌지만 그것은 노마디즘의 상품화와 연결되어 있다. 사실 노마디즘은 병리적 자기애의 화려한 포장에 불과하다. 단순히 시장의 상품구조에 그럴듯한 담론이라는 당의정이 입혀졌을 뿐 현실도피적인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다. 예컨대, 노마디즘에는 자기만 있지, 타인 존재나 다른 사람의 사고와 행동은 없다.

일본의 영화나 소설이 한국에서 인기를 끄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러한 나르시시즘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할리 퀸 로맨스나 칙릿 계열의 소설들이 1인칭과 환타지 로맨스로 인기를 끄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아와 자기의 정체성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다른 이들은 물론 그들과의 관계성 속에서 자신을 찾는 일에는 무감각하다.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는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 김삼순이 등장한다. 그녀는 자기 하고 싶은대로 다하면서 항상 상처받은 존재라고 여긴다. 혼자 중얼거리며 일기 속에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인형과 혼짓말을 나눈다. 자신을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분노를 터트리거나 할 말을 다한다.

그렇게 해도 젊고 잘생긴 부잣집 남성 주인공은 결국 자신을 좋아한다. 현실에서 이런 여성을 좋아할 남자는 없다. 드라마 '스타일'에서 박 차장(김혜수)은 결국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다한다. 물론 그럼에도 성공가도를 달린다. '엣지있게' 를 외치면 모든 이들은 여기에 종속되어야 하고, 일은 멋지게 처리된다.

자기 성깔대로 멋대로 굴어도 남자들은 자신을 좋아한다. 박차장을 좋아할 남자는 드라마 '그저 바라보다가'의 구동백이나 가능하지만, '스타일'에서는 작가들이 좋아하는 터프와 완소를 겸비한 캐릭터가 그녀를 좋아한다.

최근에 가장 강력하게 등장한 나르시시스트 캐릭터는 '아가씨를 부탁해'의 강혜나(윤은혜)다. 자기의 생각과 행동은 당연히 다른 이들에게 받아들여져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분노한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감정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다른 존재들은 나를 위한 부속물에 불과하고 대상들일 뿐이다. 물론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돈이 엄청나게 많은 집의 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대중들, 시청자들은 그러한 처지가 되지 못한다.

물론 이러한 점들을 모르지 않을 시청자들은 없을 것이다. 그것들은 하나의 판타지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모두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미디어매체는 결국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는 이들에게 강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현실착오적인 성격과 행동을 합리화시켜주고 심지어 마니아 혹은 독립예술 영화로 포장되기도 한다.

흙 하나 없는 사막의 바위 위에 자라나는 것은 선인장이다. 척박한 곳에서 홀로 자라나는 것은 정말 주체성과 존엄성을 지키고자 하는 현대인들의 마음을 투영하기에 알맞다. 하지만 선인장이 그렇게 홀로 우뚝할 수 있었던 것은 뿌리 박테리아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최근 멕시코의 한 생물학 연구소에서 `카르돈 카투스(Pachycereus pringlei)라는 선인장의 뿌리에 있는 박테리아를 발견했는데, 이 박테리아는 바위를 녹이는 능력이 있어 선인장에게 양분을 제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박테리아는 선인장에게 미네랄과 질소를 제공하고, 선인장은 탄소를 제공했다. 박테리아를 제거하자, 선인장은 살 수가 없었다. 거꾸로 선인장에서 분리된 박테라아도 살 수가 없었다.

아무리 고고하고 멋있게 서있는 존재도 그것이 가능한 것은 혼자 때문만이 아니다. 나의 생각이나 존엄이 중요하면 다른 이들의 정체성도 존엄하다. 문화콘텐츠의 캐릭터처럼 나는 옳기에 내 멋대로 하는 삶은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준다. 그 다른 이는 우리의 주인공이다. 대중문화콘텐츠에서 지나치게 나르시시스트 캐릭터를 상품화하는 것은 혹세무민하는 것이다. 피해가 있다면 그들이 아니라 여린 존재들이 받게 될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