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엑시트'가 왜 주목받나.
글/ 김헌식(평론가, 문화정보콘텐츠학 박사)
재난 영화, 영화 ‘엑시트’는 어찌 보면 빤한 영화일 수 있겠다. 대개 이런 영화들은 좋은 작품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특히나 전문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을수록 말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사회관계망의 입소문에 의존하는 형국이니 말이다.
이런 영화에서는 재난의 "상황"이 색다르게 설정되어야 하는데 이는 관객들의 긴장감과 상쾌함을 주기 위해 필요하다. 재난 상황에서 비극을 원하는 여름 관객은 없다. 물론 겨울관객도 마찬가지다. 모처럼 휴식을 위해서 영화관을 찾았는데 비극이라는 짜증스런 결말을 선사받는다면 열받을 일밖에 되지 않는다. 이 영화가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은 기존 재난 영화에 없던 점들이 눈에 들어기 때문이다.
우선 재난 상황이 지진이나 해일이 아닌 인재다. 도시 공포, 위험사회론 때문일까. 확실히 도시 괴담의 공포가 도시 거주민이 많은 가운데 갈수록 먹힐 수 있다. 그런데 그 인재는 단순히 국가 권력이나 제도의 문제도 아니고 테러리스트의 소행도 아니다. 이데올로기 문제가 아닌 자본 시장적 문제이며 이는 또다른 욕망의 문제에서 비롯한다. 화학 물질 개발에 관한 특허 분쟁에서 불만을 품은 전문 연구자의 보복성 행위 즉 무차별가스 살포에서 비롯된다.
주인공이 탈출하는 방법은 클라이밍이다. 색다른 시도였으며 이는 보편성과 특수성을 같이 가지고 있었다. 주인공 용남(조정석)이 대학 산악부 출신이라는 점이 부각되는 점은 여기에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쓸모가 없다고 타박했던 누나를 그 산악부였다는 점이 살리게 된다. 취직에는 하나 쓸데 없는 산악 기술이 도시를 탈출하는데, 단지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가족을 모두 살리는데 톡톡하게 그 역할을 하며 다시 자신의 사랑 의주(임윤아)를 다시 찾게도 한다. 부모 덕에 잘 사는 경쟁자를 물리치고 말이다.
인지심리측면에서는 주로 손을 이용해 건물을 타고 올라가는 모습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영화 ‘본 아이덴티티’에서 맷 데이먼이 보여준 클라이밍의 가능성을 재난 영화에 충분히 확대 재생산했다. 도시는 그냥 끝없이 하늘로 치솟는 콘크리트 산이라는 것을 재난 상황에서 부각시키고도 남음이 있다. 그가운데 오로지 자신의 근육으로 위기를 타개하는 것은 원초적인 성취감을 준다.
가성비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실패 사례들을 뛰어넘었다. 재난 영화에는 많은 비용이 들어가고는 하는데 특히 막대한 인원과 특수 그래픽효과에 대부분 그 비용이 투여되고 한국판 블록버스터를 홍보 문구로 사용하는 것이 통례가 되었다. 물론 흥행은 실패하는 것이 다반사. 하지만 이 영화는 상황의 설정 즉 건물 위로 무조건 올라가야 한다는 설정 때문에 대규모 폭발이나 재난 상황의 극단적 강조에 시각적 연출을 상대적으로 덜했다. 가성비는 인지적 만족감에도 영향을 미친다. 단순 명쾌 상쾌한 서사 구조에 결말에 이른다. 여름 관객들이 예술 영화를 원했다면 눈길을 주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족끼리, 친한 사람끼리,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분 좋게 볼 영화가 언제나 필요하다. 아니 이미 계절에 관계가 없는 상황이다. 여름인데 더욱 그럴 수밖에 없을 뿐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무조건 새로운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철저히 가족주의에 기반을 했고, 주인공 둘은 오로지 가족을 살리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 우선이다. 여기에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구원하기 위해 필사의 탈출을 감행할 뿐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자신보다는 남들 특히 가족에 이어 보습학원에 갇힌 아이들을 먼저 구원하는 인간애도 지니고 있다. 비록 현실에서는 미취업 취준생으로 잉여라는 취급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국가가 제대로 역할을 하는 지 하지 않는 지는 부차적인 담론일 뿐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다른 영화보다 깔끔해 보인다.
덧붙여 단순히 한국사회의 우울이라고 해야할까. 가스 테러를 일으킨 범인은 특허권으로 자신의 보상에 더해 많은 돈을 얻으려 했다. 그것에 피해를 본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마도 그런 기회조차 잡지 못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누구는 남을 해하고 살기를 포기했고 누구는 남도 구하고 자신을 구했다. 지적 능력에 의존했던 그 누구, 몸을 단련했던 그 누구, 재난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지 생각해보면 지금은 재난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육체적 단련자들은 잉여인가. 그것을 전복하는 작업은 영화가 아니더라도 문화예술이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