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심리경영 이론과 사고법 100

‘누적적응진화(cumulative adaptive evolution)’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14. 4. 7. 08:17

인구가 받쳐줘야 문화 복잡성 유지한다

일러스트가 있는 과학에세이 54

2013년 11월 22일(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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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가 있는 과학에세이   인류 문명의 수수께끼를 독특한 관점에서 해석해 퓰리처상까지 받은 미국 LA 캘리포니아대 제레드 다이아몬드 교수의 명저 ‘총, 균, 쇠’에는 호주 동부에 있는 태즈메이니아섬 원주민에 대한 흥미로운 사례가 소개돼 있다. 저자는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이 다른 대륙에 비해 문명이 꽃피지 못한 것은 많지 않은 인구가 고립된 채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그 넓은 땅에 불과 수십만 명이 띄엄띄엄 떨어져 수렵채집생활을 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대륙으로 흘러들어올 때 그나마 갖고 있던 기술지식도 제대로 전수되지 못하고 오히려 퇴보했다고. 그 결과 이들은 금속과 문자, 복잡한 정치체계를 갖추지 못했다고 한다.

태즈메이니아섬의 원주민들은 더 극단적으로 퇴보한 경우다. 원래는 대륙과 연결돼 있었으나 약 1만 년 전 해수면이 올라가 섬이 되면서 원주민 4000여 명이 완전히 고립된 채 살아왔던 것. 그 결과 17세기 유럽인들이 태즈메이니아섬을 찾았을 때 이들은 낚시바늘이나 그물도 없었고(따라서 물고기를 잡지 못했다) 바느질도 몰랐고 심지어 불도 피우지 못했다. 훗날 고고학적 조사를 한 결과 약 3500년 전까지는 고기잡이를 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책에서 “인구가 4000명이라면 1만 년 정도는 생존할 수 있었지만 물질 문화는 극히 단순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유전자의 진화? 문화의 진화?

사실 현생인류의 등장과 현대적인 인간 행동(복잡한 기술과 문화, 예술과 몸치장 같은 상징적 행동)의 등장은 그 시기가 맞지 않는다. 즉 호모 사피엔스는 17만~20만 년 전에 나타났지만 현대성은 상부 구석기시대인 약 4만 5000년 전에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를 현생인류 가운데 변이가 일어나 인지능력이 높아진 결과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다이아몬드 교수는 유전자가 아니라 인구수에서 답을 찾은 것이다.

지난 2004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 조셉 헨리치 교수는 태즈메이니아 사례를 분석해 수학적 모형을 만든 논문을 학술지 ‘아메리칸 앤티쿼티’에 발표했는데, 오늘날 ‘헨리치의 전달 모형(Henrich's transmission model)’으로 알려져 있다. 즉 많은 경우 개별적인 기술의 전달은 부정확하지만 인구수가 어느 선을 넘으면 전체적으로는 문제가 없을 뿐 아니라 때로는 전달 과정의 실수가 오히려 더 나은 결과를 낳아 그 기술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다는 것. 그는 이런 현상을 ‘누적적응진화(cumulative adaptive evolution)’라고 명명했다.

지난 2009년 학술지 ‘사이언스’에는 헨리치의 모형을 이용해 상부 구석기시대에 현대적인 인간 행동이 등장한 현상을 설명한 논문이 실렸다. 즉 이 무렵 인구가 늘어나면서 문화의 누적이 가능해졌다는 것. 사실 아프리카에서 이미 9만여 년 전에 인류 행동의 현대성을 시사하는 고고학적 증거가 간헐적으로 나오고 있는데, 연구자들은 그 뒤 인구수가 줄면서 이런 문화가 사라졌고 수만 년 뒤 다시 인구가 늘면서 재등장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헨리치 교수의 가설이나 이를 적용해 현대성의 등장을 설명한 논문은 꽤 그럴듯하지만 둘 다 수학모형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다.

▲ 피험자들은 화살촉 설계 과제(위)와 그물 설계 과제(아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다. 쉬운 과제인 화살촉 설계는 일정한 간격의 점을 연결해 화살촉 모양을 고안한다. 반면 어려운 과제인 어망 설계는 밧줄 세 종류 매듭 세 종류를 이용해(각각 사용할 수 있는 양이 제한돼 있다) 최적의 구조를 만든다. 오른쪽(b와 d)은 피험자가 고안한 화살촉과 그물의 한 예를 보여주고 있다.  ⓒ'네이처'

타인의 작품 참고해 능력 이상의 결과 내

학술지 ‘네이처’ 11월 21일자에는 집단의 크기가 문화적 복잡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실험적 증거를 보고한 논문이 실렸다. 프랑스 몽펠리에대 막심 데렉스 교수팀은 헨리치의 모형을 따라 몇 가지 예측을 했다. 먼저 단순한 과제가 복잡한 과제보다 보존이 잘 될 것이다. 다음으로 복잡한 과제가 보존될 확률은 집단 크기에 비례할 것이다. 그리고 두 과제 모두 집단이 클수록 더 잘 수행될 것이다. 연구자들은 ‘이중과제컴퓨터게임’을 통해 위의 예측을 입증하는 데 성공했다. 

피험자들은 컴퓨터 모니터상에서 활촉을 만들거나 그물을 짜는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피험자들은 수행에 앞서 각각의 작업 과정을 보여주는 동영상을 본다. 먼저 좀 더 쉬운 과제인 활촉 설계의 경우 피험자들은 일정한 간격으로 점이 찍힌 평면에서 점을 연결해 활촉의 모양을 디자인하는 과정을 15회에 걸쳐 수행한다. 이때 피험자는 네 그룹으로 나뉘는데 각각 2명, 4명, 8명, 16명으로 이뤄져 있다. 같은 그룹내 구성원들은 서로 대화를 하지는 못하지만 각 섹션이 끝날 때마다 서로의 디자인을 참고할 수 있다. 이들의 15번째 작품은 평가 기준에 따라 점수가 매겨지고 집단 내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걸 선택해 비교한다.

좀 더 어려운 과제는 그물을 짜는 작업으로 그 과정은 활촉 설계와 마찬가지다. 다만 좀 복잡한데 먼저 그물을 만들 줄은 굵은 줄(빨간색), 중간 줄(파란색), 얇은 줄(녹색) 세 종류가 있고 매듭도 크기에 따라 세 종류가 있다. 또 각각은 사용할 수 있는 양에 제한이 있다. 굵은 줄은 튼튼하기는 하지만 고기가 알아차리기 쉽고 얇은 줄은 고기는 속일 수 있지만 끊어지기 쉽다. 아무튼 이런 여러 사항을 고려해 설계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과제다.

실험 결과 예상대로 쉬운 과제인 활촉 설계는 2명이나 4명 집단이 8명이나 16명 집단보다 점수가 낮기는 했지만 큰 차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어려운 과제인 그물 설계는 큰 차이를 보였다. 2명으로 이뤄진 집단은 평균 685점을, 4명 집단은 1334점을 받은 반면 8명 집단은 2706점, 16명 집단은 2590점으로 훨씬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물의 완성도에서 큰 차이를 보인 것이다. 16명 집단이 8명 집단보다 점수가 약간 더 낮은 건(오차범위 이내) 과제를 하면서 주어진 시간에 비해 참고할 게 너무 많아 오히려 약간 역효과가 난 결과로 보인다. 아무튼 이 결과는 고립된 개인이나 소수 집단은 복잡한 문화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고 만들어낼 수도 없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한 사람의 머릿속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기술도 다른 사람의 작업 결과를 보면서 보완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려 성취할 수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 피험자들이 두 과제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실험 조건 역시 집단의 크기가 클수록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즉 복잡한 과제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활촉을 설계하는 과제를 택해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 그물짜기에 자신이 있는 사람들은 도전을 해 고난이도의 결과물을 만들어낸 것. 즉 능력에 따른 노동의 분업을 통해 두 과제 모두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현대문명은 이처럼 ‘사람만이 희망’인 조건에서 꽃피웠지만, 오늘날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이제는 ‘개인의 고립’이 문제가 되고 있으니 아이러니란 생각이 든다.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 kangsukki@gmail.com

저작권자 2013.11.22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