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카메론은 하필 아바타를 만들었을까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09. 12. 25. 22:29

제임스 카메론은 왜 아바타를 선택했을까




영화 < 아바타 > 는 시공간적 배경만 다를 뿐 백인과 인디언(나비, Na´vi)의 대결을 그렸다. 그 대결 가운데 백인 변절자가 인디언의 리더가 되어 침략자에 맞서 싸우는 내용은 전형적이다. 백인의 변절자이면서 인디언의 전사였던 존 던바(케빈 코스트너 분)의 < 늑대와 춤을 > 이 겹쳐지기도 한다.

영화 < 아바타 > 의 제이크 설리(해병대)나 존 던바(기병대)는 모두 군인이었다. 영화 < 아바타 > 는 다시 한 번 원주민에 대한 백인의 속죄의식이 느껴지기도 한다. 중간 중간 그 속죄의식은 감동적이기도 하다. 적어도 영화 < 아바타 > 에서 현실과는 달리 원주민들이 승리하는 것으로 예견되기 때문이다.

사실 영화에서 제국주의 침략 코드이거나 속죄의식을 통한 또 다른 백인 우월주의를 지적하는 것은 그 방식만큼이나 전형적이다. 낭만적 목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철학적 한계를 보이는 것은 여전하지만, 현대인의 감수성을 자극하기 위한 대중심리 전략이었다면 그것도 이해할 수 있겠다. 문명인은 패배하고, 자연인은 승리하는 컨셉은 결국 현실과는 다르기 때문에 이 영화는 나비족이라는 상상적 존재와 같아졌다.

더구나 영화에서는 선한 자들의 승리로 끝날지 모르지만, 강력한 군대를 앞세운 지구인들의 침략은 여전히 반복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기대하는 것은 판타지 오락영화의 재미였겠다. 영화 < 아바타 > 에서 즐거움으로 제고되는 인간의 자신의 육체적 한계를 넘어 하늘을 날고, 절벽을 자유롭게 오르내리는 꿈의 시각적 실현은 대중콘텐츠의 중요한 대리만족기능이다.



이 영화에서 눈 여겨 보아야 할 점은 투영되는 현대인의 정체성일 것이다. 최근 개봉한 영화 < 더 문 > (Moon, 2009)은 관객을 보기 좋게 속아 넘긴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사람이 주체인 것으로 여기는 관습적 행태를 전복시켜버리기 때문이다. 그는 복제인간이었고, 원본인 진짜는 따로 있었다.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해야 한다.

그것은 테크놀로지의 발달에 따른 인간의 정체성 위협 현상을 말한다. < 아스트로 보이-아톰의 귀환 > (Astro Boy, 2009)에서 텐마 박사는 로봇 실험을 하던 가운데 아들을 잃는다. 그는 아들을 잊을 수 없어 아들을 복제해 로봇을 만든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갖게 되고 아들과 다른 행동을 하게 된다. 아들의 정체성을 갖고 태어났지만, 실제 아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버림받는다.

앞으로 더욱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이제 인간과 같은 존재는 얼마든지 복제되고 복제된 존재는 자신의 정체성에 혼돈스러워할 것이다. 그것에는 복제 자체만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의 파괴에 대한 현대인들의 고민이 투영되어 있다. 정신과 영혼을 침해받지 않는다면 스스로 복제되려고도 한다. 그것을 통해 현실의 자신을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이다.그 과정에서 테크놀로지와 수단주의를 합리화 한다.

영화 < 아바타 > 에서 주인공이 나비족의 일원으로 복제될 수 있었던 것도 신경공학의 발달 때문이었다. 육체적으로는 전혀 다르지만, 일종의 영혼은 동일한 수준이다. 이는 영화 < 매트릭스 > 에서 진일보한 개념이다. 여기에서 영화 < 아바타 > 가 어떤 차별점을 갖는지 영화 < 매트릭스 > 와 비교해볼 필요가 있으며 이는 제임스 카메론의 의도만이 아니라 사회 문화적 함의도 담고 있다.

영화 < 매트릭스 > 에서 저항군은 전자부호상태로 정신이 유체 이탈했다. 그 전자 부호들은 영화 < 아바타 > 에서는 원주민의 몸으로 바뀌었다. 특수 배양된 복제 신체를 자유자재로 조종한다. 즉 영화 < 매트릭스 > 인물들이 디지털 신호체계로 접속한 것과는 달리 영화 < 아바타 > 의 주인공들은 물리적 공간에서 살아움직이는 육체로 활동한다.

< 매트릭스 > 에서는 인간의 정신이 죽으면 육체도 죽지만, < 아바타 > 에서는 육체가 죽으면 육체와 정신이 죽는다. 이는 몸 담론이 중요해진 21세기 물질주의로 회귀한 것이다. 더구나 현실에서는 장애인인 제이크 설리는 아바타를 통해 완벽한 몸 상태를 육지하면서 평소에 이루지 못하는 우월한 능력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것은 건강한 다리를 다시 갖게 되는 것이고, 이를 위해 첩자 노릇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 < 매트릭스 > 의 주인공은 처음부터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전 세계 구원의 임무를 받는다. < 매트릭스 > 의 주인공들은 매트릭스에 갇힌 가면의 삶을 벗어버리고 진실의 삶을 추구하려 한다. 하지만 영화 < 아바타 > 의 주인공은 결국 아바타라는 가면을 쓴 삶을 선택한다. 수단 자체에 대한 부정은 없다.

영화 < 아바타 > 에는 자연의 육체성에 대한 갈구가 담겨 있는데, 그것은 대중의 욕망과 일치하고 거부할 수 없는 현실론이 자리하고 있다. 나아가 테크놀로지와 함께 하나의 수단으로 복제 몸체인 아바타가 결국 본질이 된다. 육체의 아바타는 가면이었지만, 그것이 본질이 된다. 이것이 세기말의 영화 < 매트릭스 >를 뒤로하고, 세기를 넘어선지 10년 된 시점에 제작된 영화 < 아바타 > 에 투영된 현대인의 심리가 아닐까.

바흐친에게 가면은 축제이며 그것은 카니발을 의미했다. 가면은 평소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영웅들이 가면을 쓰고 나왔던 것은 이 점 때문이었다. 영웅들의 행동은 가면을 통해 평소에는 벌일 수 없는 축제를 벌인 것이다. 가면은 비본질이 아니라 삶의 본질을 드러내주거나 그것을 실현하도록 만든다.

영화 < 아바타 > 에서 아바타도 단순히 가면이 아니라 인간이 잃어버린 본성으로 인도하는 매개물이었다. 축제와 카니발에 담긴 정신과도 같다. 물론 그것은 자본의 효율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쉽게 버려진다. 영화 < 아바타 > 는 그야말로 현대인의 아바타를 자임하려 했다. 하지만 축제나 카니발과 같이 곧 끝난다. 하지만 그 자체는 이미 엄청난 이익의 생산을 낳고 있다. 어느새 물질과 관계없는 비물질이 물질이 되고 본질이 된다. 경계 가로지르기를 통해 수단과 목적의 명확한 설정은 종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