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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치의 눈물

부드러운힘 Kim hern SiK (Heon Sik) 2009. 12. 29. 17:21


 

전우치의 눈물


영화 <전우치>는 우리 고전에 바탕을 둔 판타지액션 영화라는 점에서 그 결과에 일찍부터 이목이 집중되어 욌다. 한국영화에도 우리 고전을 재형상화한 판타지 오락 영화가 하나쯤 제대로 있어야 한다고 할 때 단연 꼽힐 수 있는 것이 전우치였다. 그런데 관객이 영상화의 원작을 다시 찾아 보게끔 만든다면 잘 된 영화다.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존경하는 작품이라면 그 작품의 핵심적인 철학과 정신은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시대가 진중한 사회 의식이 없는 상황이라도 말이다. 그것은 존경이 아니라 무례일 것이다. 적어도 영화 전우치는 고전 <전우치전>을 찾고 싶지 않게 만든다. 고전에 대한 궁금증이 일지 않는 것은 전우치에 대한 매력을 사라지게 하고, 만화 <머털>의 서사의 얼개 속에 몇몇 캐릭터의 선무당적 행위와 대사를 뒷받침하기 위한 시각적 효과만 강조했기 때문이다.



최동훈 감독은 선조들에게 감사하며 영화 <전우치>를 만들었다. 고전 <전우치>같은 소설을 남겨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조에게 감사할 일은 별로 없을 듯하다. 영화가 원작과는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미 이 같은 언질은 충분히 있었다. 변화무쌍한 창작적 변용이야 제작진의 책무이자 자유이다.

다만, 핵심적인 사상까지도 빼놓았으니 아쉬운 이들도 충분히 있겠다. 원작 <전우치전>을 올곧이 반영해주기를 바라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겠다. 특수효과를 빼놓는다면 원작자가 너무 달라진 전우치전을 용인했을리 만무하겠다. 저작권료를 지불하지 않아도 될 작자미상의 고전이기를 다행이었다.


처음에 많은 관객들도 전우치전을 알고 있으니 그 같은 인지된 배경지식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대중적 흥행과 밀접하게 연결될 것이다. 사실 고전 소설을 바탕으로 한 작품은 대중들에게 쉽게 인지되어 있고, 상상력을 자극하기 마련이다.

이미 많이 알려진 고전일수록 관객들의 머리에 배경지식에 따른 연상 이미지가 떠오르기 쉽기 때문이다. 힘주어 강조하지 않아도 역사적인 기록만이 아니라 관람객들이 예상한 틀 거리에 부합하면서도 그 안에서 자유자재의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 대중오락영화의 특징이다.

영화 <전우치>는 고전의 이름만 오마주했다. 고전에서 전우치는 못된 벼슬아치를 혼내주고, 백성을 도와주는데 올인 한다. 왕조 체제 자체에 대해서도 저항하는 캐릭터다. 이 저항과 구호활동에 황당한 도술을 사용하기 때문에 현실적인 설득력은 떨어진다. 하지만 이점이 21세기 CG와 판타지 코드가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전우치전>을 영화화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전우치>의 주인공 전우치에게 의로운 의식은 아주 사소하다. 궁궐에 들어가 왕을 속이는 장면이 전부다. 영화 <전우치>의 전적인 의무는 요괴 퇴마사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서사 구조의 시원은 단순하다. 지하에 갇혀 있어야할 요괴가 세상에 튀어나왔으니 이를 없애는 것인데, 그 요괴가 왜 나쁜 것인지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 백성을 해하기 때문인가, 그 욕망 때문에 세상을 지배하려하기 때문인가. 그냥 나쁘니까 나쁘다.



영화에서 스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요괴와 싸우는 전우치는 그것도 자기 멋에 따라 자신의 능력을 우월하게 인정받고 싶은 개인 욕망 때문이다. 그 욕망에 대대로 수호신으로 여겨져 오던 12지신은 마귀가 되어버린다. 어느새 서양식 이분법적 자연관과 세계관은 전우치전에 결합되었다. 사상적 문화적 맥락은 사라져버렸다.



전우치를 막는 화담(花潭)은 격 높은 도인과 덕의 존재가 아니라 반대의 존재로 전락시키는데 '이유'가 없다. 그냥 그렇게 된다. 화담의 정체는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라 전복적이지도 않다. 도학자의 위선을 풍자하면 차라리 나았다. 부적 도술을 믿고 껄렁거리는 전우치를 비판하던 화담은 진중한 철학과는 관계없이 척결의 대상이 되었고, 전우치의 경거망동은 영웅의 행태로 탈바꿈하는데 언사의 먼지같은 분란이 설득력에 이르는 몰입을 방해한다. 두 캐릭터의 전복성은 많은 고민은 결과이겠지만, 그런 전복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산란스럽다.



무엇보다 감독 말대로 왜 고전 <전우치전>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 생각해야겠다.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밌으면 그만이겠지만, 고전 <전우치전>은 그래도 다른 전기소설(傳奇小說)의 호협류(豪俠類)와 신괴류(神怪類)의 가벼움을 뛰어넘은 사회의식이 있었다. 애초에 고전 <전우치전>이 살아남은 이유는 당대 일반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마귀를 쫓아내는 주인공의 액션이라는 말일까. 현재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당대의 모순이 하나도 없고 마귀만 창궐하기 때문일까. 500년 전의 마귀 아닌 마귀가 아니라 진짜 마귀를 잡아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사회적 평가만이 전부는 아니다.

무엇보다 12지신의 마귀로 변하는 것은 전복성과 패러디의 맥락도 없겠다. 이것은 별 것 아닐 수도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애초에 판타지 영상 콘텐츠를 채울 리얼리티 결핍과 도피를 말한다. 리얼리티가 없을 때 말이 많아지고 영상은 그 말과 따로 논다. 리얼리티의 결핍에 따른 개연성의 단절성을 극복하기 위한 너스레와 연희는 캐릭터의 특성과 따로 놀고, 다시 그 단절됨은 관객의 몰입을 방해한다. 쉽게 말하면 TV의 통속 드라마도 아닌데 영상 작품에 말이 너무 많다.

오로지 많은 제작비의 산물은 미완의 특수효과에 팝콘 영화의 묘미를 애써 찾아야 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것이 특수 효과 액션 장면의 미장센이 원활하지 못하다. 하던 것을 하는 것이 좋은 때가 많다. <타짜>와 <범죄의 재구성>에서 보인 리얼리티가 전문분야라는 점을 생각할 때 그렇지 않은 것이 영화 <전우치>가 고전 <전우치전>을 남겨준 선조의 정신을 저버린 것이겠다.

장르의 다양성을 아우를수 있다는 자신의 능력 발휘와 인정에 대한 강박관념이 요괴같이 작용한 것은 아닌가. 다만, 연출가의 분신들이 애써 쿨하려는 자유주의자 캐릭터로 영화 속에서 일관되게 유지되는 스타일의 향연에서 나름 만족을 찾는다면 족하겠다.